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조선 전기조선 전기의 대외 관계

요동 정벌 계획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이 일찍이 「오진도(五陣圖)」와 「수수도(蒐狩圖)」를 만들어 바쳤다. 임금께서 좋게 여겨 명하여 훈도관(訓導官)을 두어 가르치고 각 절제사⋅군관(軍官)⋅서반각품⋅성중애마(成衆愛馬)에 명하여 「진도(陣圖)」를 익히도록 하고, 또 잘 아는 사람을 각 도(道)에 나누어 보내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때 정도전⋅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 등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에 나가기를 모의하여 임금께 의논을 드렸다. 좌정승 조준(趙浚)의 집에 가서 유시(諭示)하였다.

조준이 때마침 병에 걸렸는데 즉시 가마를 타고 대궐에 나와 힘써 불가함을 극언하여 말하길,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사대(事大)의 예를 잃지 않았고, 게다가 새로 개국한 나라로 경솔히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 비록 이해관계로 말하더라도 천조(天朝)는 당당하여 도모할 만한 틈이 없으니, 신은 거사하여야 성공하지 못하고 뜻밖에 변이 생길까 염려되옵니다. ”

임금은 이를 듣고 기뻐하였다. 남은이 화를 내며 아뢰었다. “두 정승(政丞)은 몇 말 몇 되를 출납하는 일은 할 수 있지만, 함께 대사를 하기에는 불가합니다. ” 이로 말미암아 남은 등이 조준과 틈이 생겨 훗날 남은이 조준을 임금께 무고하자, 임금께서 노하여 그를 질책하였다.

태조실록』권11, 6년 6월 14일(갑오)

判義興三軍府事鄭道傳, 嘗撰五陣圖⋅蒐狩圖以進. 上善之, 命置訓導官以敎之, 令各節制使⋅軍官⋅西班各品⋅成衆愛馬, 習陣圖, 又以通曉人, 分遣各道敎之. 時鄭道傳⋅南誾⋅沈孝生等, 謀興兵出境, 獻議於上. 抵左政丞趙浚之第諭之. 浚方疾病, 乃以輿進闕, 極言不可曰, 本國自古不失事大之禮, 且以新造之邦, 輕擧無名之兵, 甚爲不可. 雖以利害言之, 天朝堂堂, 無釁可圖, 臣恐擧事不集, 而變生不虞也. 上聞之悅. 誾憤然曰, 兩政丞, 於出納斗升之事則可矣, 不可與圖大事也. 由是誾等與浚有隙, 後誾搆浚於上, 上怒叱之.

『太祖實錄』卷11, 6年 6月 14日(甲午)

이 사료는 정도전(鄭道傳, 1342~1398) 등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려고 했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다. 태조(太祖, 재위 1392~1398) 대에 표전(表箋)1) 문제가 불거지면서 명나라와 외교 마찰이 발생하였고, 이러는 사이 요동 정벌 논의가 대두되었다.

표전 문제란 조선이 명에 보낸 표전 속에 명에 거슬리는 글자가 섞여 있다 하여, 명 태조가 조선 사신을 억류하는 한편 표전을 지은 책임자로 정도전을 지목하고 그를 압송할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동시에 명나라는 조선이 요동을 정벌할 것이라는 풍설에 계속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간첩을 보내 정탐을 하였다.

당시 명 태조는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위협을 했으나, 실제로 조선을 정벌하려는 의도나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이 요동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에 쐐기를 박을 목적으로 위협을 가하였을 뿐이었고, 조선 정벌보다는 방어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틈을 타 1393년(태조 2년)부터 군비를 강화해 오던 정도전은 1397년(태조 6년) 6월경 요동 정벌 계획을 표면화하고 태조를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요동 정벌 계획은 조준(趙浚, 1346~1405) 등이 군량과 군사훈련 부족, 민심 불안을 내세워 완강하게 반대하여 잠시 보류되었다가 1년이 지난 1398년(태조 7년) 윤5월경부터 다시 대두하여, 태조의 주도 하에 확고한 국가 정책으로 추진되었다. 같은 해 8월 대사헌 성석용(成石瑢)이 진도(陣圖)를 강습하지 않는 절제사 이하 대소원장(大小員將) 292명을 대량으로 탄핵함에 따라 태조가 이들을 처벌한 일이 있었다.

진도 강습을 서두른 이유는 “정도전과 남은(南誾, 1354~1398)이 왕을 날마다 뵈옵고 요동을 공격하기를 권고”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요동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 작업의 일환이었다. 요동 정벌 계획이 다시 추진된 것은 먼저 정도전 등이 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태조를 설득했기에 가능하였다. 이는 특히 표전 문제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요동 정벌 계획은 1398년 8월에 일어난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남은 등이 살해당하고 정종이 즉위하면서 완전히 좌절되었다. 또한 조선에 대해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고압 정책을 펴던 명 태조가 같은 해 윤5월에 사망하고 황태손인 혜제(惠帝)가 즉위하여 양국 관계가 개선되면서 조선과 명나라 양국은 한 시대를 마감하며 정치와 외교 관계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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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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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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