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조선 전기왜란의 전개와 그 영향

진주성 전투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치계하였다. “진주성이 포위되었을 때에 힘써 장사(將士)들이 죽을 고비에서 벗어나 적을 물리치고 성을 안전하게 하여 사람들이 비로소 성지(城池)에서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공이 지극히 큽니다. 적은 창원에 주둔하고 있는데, 바야흐로 다시 침범할 계획으로 호남으로 향하고 있으니 흉계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공이 있는 장사들에게는 따로 포상하는 은혜를 더 하시어 뭇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여 뒷날의 성과를 바라소서.

중위장(中衛將) 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은 본래 군사와 백성들에게 인심을 얻었으므로 성을 수호하고 적을 물리친 것이 모두 그의 공로입니다.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은 고을의 날랜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김시민과 함께 진주성을 지켰는데, 8일에 김시민이 ‘아마도 성을 온전하게 하기는 어려울 듯하니 몰래 수문(水門)을 열어 노약자를 내보내야겠다’라고 하자, 이광악이 ‘이와 같이 하면 군사들의 마음이 크게 변하여 성을 수호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큰소리로 말렸으며, 김시민이 탄환에 맞은 뒤에는 혼자 한 모퉁이를 담당하여 왜적을 쏘아 죽이고 마침내 적을 물리쳐 성을 온전하게 하였습니다.

판관 성수경(成受慶)은 적이 성에 오를 도구를 많이 준비하여 처음부터 동문을 오로지 공격하였지만, 밤낮 5일 동안 굳게 지키면서 용맹을 떨치며 혈전을 벌여 무수히 적을 살해하여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 성을 완전하게 하였습니다. 수성대장(守城代將) 최덕량(崔德良)은 적이 불시에 옛 북문에 충돌하니, 군사들이 도망하여 흩어지매 적이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성에 기어올라 성의 함락이 순간에 달려 있었는데, 최덕량이 이눌(李訥) 등과 함께 도망하는 군졸 몇 사람을 베어 죽이자, 군사들이 그제야 다시 모여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을 떨치며 힘껏 싸워 마침내 한 성을 온전하게 하였습니다. 영장(領將) 이눌의 공은 최덕량과 다름이 없습니다.

율포권관 이찬종(李纘宗)은 적이 본 고을을 포위하려 할 때 사람들이 모두 ‘성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죽는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전 우후 이협(李浹)은 성문에 이르렀다가 도망쳤지만, 그는 혼자 성으로 들어가 협력하여 남문을 지켰으니, 난리에 임하여 명령을 받든 것이 매우 가상하며, 그뿐만 아니라 재주와 국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위급할 때 쓸 만합니다”

선조실록』권34, 26년 1월 22일(정축)

慶尙右道監司金誠一馳啓曰, 晋州圍城時, 力戰將士等出萬死, 却敵全城, 人始知城池之可守, 其功極大. 賊留屯昌原, 方謀再犯, 仍向湖南, 兇計已成. 有功將士等, 另加褒錄, 聳動群情, 以責後效. 中衛將牧使金時敏, 素得軍民之心, 守城却敵, 都是其功. 昆陽郡守李光岳, 率郡精兵數百, 與金時敏協守州城, 初八日, 時敏 ‘恐難全城, 欲潛開水門, 放出老弱. 光岳曰, 如此則軍情大變, 城不可守. 大言止之, 及時敏中丸後, 獨當一隅, 射殪倭賊, 竟能却敵全城. 判官成受慶, 則賊大備登城之具, 自初專攻東門, 堅守五晝夜, 奮勇血戰, 殺敵無算, 竟能却敵全城. 守城代將崔德良, 則賊不意衝突舊北門, 軍潰散, 賊蟻附而上, 城陷決在呼吸, 德良與李訥等, 斬潰卒數人, 軍乃復集, 殊死奮勇力戰, 竟全一城. 領將李訥之功, 與德良無異. 栗浦權管李纉宗, 賊將圍本州, 人皆謂, 入城必死. 故前虞候李浹到城門遁去, 而纉宗獨入, 協守南門, 臨亂用命, 極爲可嘉, 加以材器超凡, 緩急可用.

『宣祖實錄』卷34, 26年 1月 22日(丁丑)

이 사료는 1592년(선조 25) 10월의 진주성전투에 대해 경상우도감사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보고한 문건이다. 김성일의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다. 아버지는 진(璡)이며,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이황(李滉, 1501~1570)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1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파죽지세에 조선 관군은 연패하였다. 하지만 가을에 접어들면서 조선군의 반격으로 승전보가 들려왔는데,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은 관군의 중요한 지원군이기도 했다. 당시 대표적인 전투가 진주성 전투였다. 이를 진주대첩이라 부르기도 한다.

진주성 전투는 제해권(制海權)을 상실한 일본군이 남해안 지방의 거점 확보가 어려워지자 전세 회복을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을 따라 호남 지방으로 향하는 노선을 확보하여 남쪽의 병참 기지 및 식량 공급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1592년 10월 일본은 김해의 주둔군으로 하여금 진주성을 일거에 점령케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3만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다.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 1554~1592)과 판관 성수경(成守慶, ?~1592), 곤양 군수 이광악(李光岳, 1557~1608) 등은 몇천 명의 군사만을 거느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으며, 사다리와 나무단을 성벽에 기대어 놓고 그것을 밟고 올라와 성벽을 넘으려고 하였다. 또한 바퀴 달린 3층짜리 누각을 만들어 접근시켜 놓고 그곳에서 성을 내려다보면서 조총으로 사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성안 군민들은 목사 김시민 등의 지휘 아래 일치단결하여 일본군을 막았다. 이에 일본군은 공격 방식을 바꾸어 새벽 동문과 북문으로 모든 병력을 투입하여 총공격하였다. 이 공격에 동문 방어에 나섰던 김시민이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이후 곤양 군수 이광악이 목사를 대신해 진주성 방어를 지휘하였다. 새벽녘 일본군 진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이를 신호로 일본군은 물러나기 시작했으며,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진주성에서 적의 대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은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최경회(崔慶會, 1532~1593), 이달 등이 이끄는 영호남 의병군이 성 밖에서 후원하는 등 현지 군민이 일체가 되어 협동 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공성전(攻城戰)이었음에도 이 전투가 ‘대첩(大捷)’으로 불린 것은 일본군이 3만여 대군을 동원하고서도 고립된 일개의 성을 점령하지 못하여 작전상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진주성에서의 패전은 일본군에게도 큰 충격이어서, 일본군 본영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보고하기를 꺼렸을 정도였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년) 6월 다시 진주성에서 복수전을 감행하였다.

진주성을 둘러싼 두 번째 전투는 일본이 명나라 군대와 강화 회담을 진행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일본군은 이 무렵 경상도 지역으로 철수하여 5월 밀양 이남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일본군은 전년도 7월경부터 울산에서 거제도에 이르는 해안 및 도서 지역 10여 곳에 성(왜성)을 쌓고 있었는데, 이 무렵 왜성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일본군은 경상우도의 요지이자 전라도로 가는 관문에 해당하는 진주성을 공격하여 앞서의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雪辱)하고 강화 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하였다. 일본군은 명과 강화 회담을 진행하면서 명의 대표인 심유경(沈惟敬)에게 진주성 공격 계획을 알려 주었다. 일본군의 진주성 계획이 알려지자 조선군은 전투에 대비하여 준비를 서둘렀다. 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 ?~1593)과 판관 성수경(成守慶, ?~1593)을 비롯한 인근 고을의 부사, 현령, 현감 등이 진주성에 집결하였다. 또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1537~1593), 경상 우병사 최경회 등도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 안에 모여 들었다. 수천 명의 군사와 6~7만 명의 성안 주민만으로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전투력이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진주성 공격 계획을 명에게 알렸지만 명은 회담을 이유로 전투를 피하면서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진주성 군민은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공방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동문 밖에 토산을 쌓아 망루에서 내려다보면서 성안으로 조총 사격을 가하였으며, 며칠 후부터는 ‘귀갑차(龜甲車)’라는 새로운 전쟁 도구를 동원하여 성을 공격해 왔다. 귀갑차를 앞세운 계속적 공격에 성벽이 무너졌으며, 진주성 함락에 많은 군민이 자결하였다. 진주성 방어를 총지휘하던 김천일 역시 아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했으며, 의비 논개(論介)가 촉석루(矗石樓)에서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임진왜란시기 진주성전투 참가자의 포상 과정과 의미」,『지역과 역사』17,김강식,부경역사연구소,2005.
「임란시 일차진주성대첩에서의 학봉과 김시민의 공업」,『아시아문화』12,박익환,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1996.
「진주성의 수호신 김시민」,『군사』13,장문평,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86.
「제이차 진주성전투와 김천일의 전공문제」,『군사』5,조원래,국방부 전사편찬위원호,1982.
「임진왜란에 대한 몇 가지 의견」,『남명학연구』7,최영희,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1998.
「임란기 학봉 김성일의 구국 활동」,『신라문화』23,최효식,,2004.
편저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2010.
『임진왜란사』,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7.
「조⋅명군의 반격과 전국의 추이」, 조원래, 국사편찬위원회, 2003.

관련 이미지

진주성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