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조선 후기붕당 정치와 탕평 정치

인조 반정

임금께서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내쫓고 이이첨(李爾瞻)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중략)…… 처음 광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선조께서 세자를 바꾸려는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광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그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몹시 시기하고 모후(母后)를 원수처럼 여겨 그 시기와 의심이 날로 쌓였다. 적신 이이첨과 정인홍(鄭仁弘) 등이 또 광해의 악행을 종용하여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을 해도(海島)에 안치하여 죽이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 1562~1613)을 멸족하는 등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임금의 막내아우인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도 무고로 죽자, 원종대왕(元宗大王)이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존호를 삭제하는 등 그 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선조의 예전 신하로서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모두 추방하여 당시 어진 선비들은 죄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초야로 숨어 버렸고 사람들은 모두 불안해 하였다. 또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 해마다 쉴 새가 없었고, 간신배가 조정에 가득 차고 후궁이 정사를 어지럽혀 크고 작은 벼슬아치의 임명이 모두 뇌물로 거래되었으며, 법을 무시하고 가혹하게 거둬들여 백성들이 물과 불 속에 든 것 같았다.

임금께서 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묘사직이 망해 가는 것을 보고 억울하고 원통해 하며 난리를 평정하고 세상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 무인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이 먼저 큰 계획을 세웠는데. 신경진 및 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는 모두 임금의 가까운 친속이었다. 이에 서로 은밀히 모의한 다음, 뛰어난 선비들 가운데 위엄과 인망 있는 자를 얻어 일을 같이하고자 하여 전 동지(同知) 김유(金瑬)를 방문하였고 말 한마디에 서로 의기투합하여 드디어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으니, 곧 경신년이었다. 그 후 신경진이 전 부사(府使) 이귀(李貴)를 찾아가 사실을 말하자 그도 본래 이 뜻을 두었던 사람이라 매우 좋아하였다. 드디어 그 아들 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 및 문사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유생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과 공모하였다. 이로부터 모의에 가담하고 협력하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임술년 가을에 마침 이귀가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되자 신경진을 끌어들여 중군(中軍)으로 삼고 중외에서 서로 호응할 계획을 세웠다.

인조실록』권1, 1년 3월 13일(계묘)

上擧義兵, 奉王大妃復位, 以大妃命, 卽位于慶運宮. 廢光海君, 放于江華, 誅李爾瞻等, 大赦國中. ……(中略)…… 初光海在東宮, 宣廟有欲易之意. 及嗣位, 深忌永昌大君, 讐視母后, 猜疑日積. 賊臣李爾瞻⋅鄭仁弘等, 慫慂其惡, 安置臨海君⋅永昌大君于海島而殺之, 族延興府院君金悌男.【王大妃之父也.】屢起大獄, 殺戮無辜. 上季弟綾昌君佺, 亦被誣而殞, 元宗大王以憂薨. 幽閉大妃于西宮, 去大妃號, 禍將不測. 先朝舊臣異議者, 悉竄逐之, 一時賢士, 不罹罪罟, 卽遯于荒野, 人皆危懼. 大興土木之役, 連年不息, 兇孽滿朝, 後宮亂政, 大小除拜, 皆由賄賂, 暴斂無藝, 國人如在水火中. 上見倫紀已絶, 宗社將亡, 慨然有撥亂反正之志. 武人李曙⋅申景禛, 首建大計, 景禛及具宏⋅具仁垕, 皆上近屬也. 相與密謀, 欲得文士中有威望者同事, 乃訪於前同知金瑬, 一言相契, 遂定推戴之策, 卽庚申歲也. 其後景禛往見前府使李貴言之, 貴素有此志, 大喜. 遂與其子時白⋅時昉及文士崔鳴吉⋅張維, 儒生沈器遠⋅金自點等合謀. 自是預謀効力者日衆. 壬戌秋, 李貴適拜平山府使, 引申景禛爲中軍, 以爲中外協應之計.

『仁祖實錄』卷1, 1年 3月 13日(癸卯)

이 사료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당시의 상황과 그 과정을 반정군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다. 인조반정은 1623년(광해군 15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펼치고자 했지만,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대북 측은 자신들의 학문적 정통성을 확립하고 집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식(曺植, 1501~1572)을 높이고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황(李滉, 1501~1570)을 폄하하는 ‘회퇴변척(晦退辨斥) 사건’을 일으켰다. 이에 대북 정권에 대한 사림의 지지는 약화되었고, 서인남인과의 반목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새로운 왕위 옹립의 싹을 없애기 위해 임해군(臨海君, 1574~1609)과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를 유폐시키는 등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였다.

광해군과 대북 정권의 패륜적인 행위를 더 이상 지켜 볼 수 없었던 이귀(李貴, 1557~1633)⋅김자점(金自點, 1588~1651)⋅김유(金瑬, 1571~1648)⋅이괄(李适, 1587~1624)서인반정을 모의하여 1623년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이반(李而攽, ?~1623)의 누설로 탄로 날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李曙, 1580~1637)는 장단에서, 이중로(李重老, 1577~1624)는 이천에서 군사를 일으킨 뒤 홍제원에서 김유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능양군이 반정군을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삼아 그날 밤 창의문(일명 자하문)으로 진군하였다. 궁궐에 도착한 반란군은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 ?~1624)의 도움으로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였다. 이어 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 종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이다.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잡혔다. 인목대비 김씨는 광해군의 죄를 들어 사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새 왕의 간청으로 폐서인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 이이첨(李爾瞻, 1560~1623)⋅정인홍(鄭仁弘, 1535~1625)⋅이위경(李偉卿, 1586~1623) 등 수십 명은 참형에 처해졌고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의 이귀⋅김유 등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각기 등위에 따라 권좌의 요직을 차지했으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1년 후에 난을 일으켰다가 그 수하에게 죽음을 당했다. 남인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 영의정에 영입되면서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인조 즉위 후 서인 공신들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인조도 공신들을 파격적으로 대우하였다. 대북파의 전횡에 반대하다 축출되었거나 자진 퇴거했던 인사들도 복귀하였다. 이후 조선의 정국은 서인이 우세를 점한 가운데 남인이 참여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서인은 주도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고 국혼은 서인계만이 해야 한다는 숭용산림(崇用山林)국혼물실(國婚勿失)을 표방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인조대 전반 정치적 갈등과 붕당론-이귀와 김류의 대립을 중심으로-」,『역사와 경계』60,김용흠,부산경남사학회,2006.
「인조반정과 서인정권에 대한 논란」,『한국 전근대사의 주요 쟁점』,오수창,역사비평사,2002.
저서
『조선후기 정치사 연구Ⅰ-인조대 정치론의 분화의 변통론』, 김용흠, 혜안, 2006.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신병주, 새문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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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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