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조선 후기붕당 정치와 탕평 정치

예송의 전개

○ 좌참찬 송준길상소하기를, ……(중략)…… 대신들 뜻이 모두 국조 전례에 자식을 위하여 3년복을 입는 제도는 없고 고례(古禮)로 하더라도 명명백백하게 밝혀 놓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후일 후회스러운 일이 있을지 모르니 차라리 국조 전례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도 다른 소견 없이 드디어 기년제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 후 바깥 논의가 분분하여, 혹자는 대왕대비께서 선대왕에 대하여 당연히 3년을 입어야 한다고도 하고, 심지어는 참최(斬衰)를 입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으며, 혹자는 또 정희왕후(貞熹王后)예종 대왕에 대하여 3년을 입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분명한 증거가 있는 말인지 신으로서는 알 수 없으나 조종조에서 과연 그렇게 하였다면, 참으로 오늘의 예는 의심할 만하기에 신은 더욱 대단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상신(相臣)에게 고하여 ‘실록(實錄)’을 상고하고 나서 다시 논의하자고 청하기도 하였으나, 국가에 일이 많아 미처 못 했던 것입니다.

이번에 장령 허목이 그 상소문에 경전을 인용하고 의리에 입각하여 매우 장황한 논설을 하였습니다. 신이 그의 논설에 대하여 비록 감히 할 말을 다해 가면서 서로 힐난할 수는 없으나, 의심되는 곳이 없지 않습니다. ‘의례(儀禮)’에서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하여”라고 한 것은 위아래를 통틀어 한 말입니다.

만약 허목의 말대로라면 가령 사대부의 적처(適妻) 소생이 10여 명인데, 첫째 아들이 죽어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3년복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죽으면 그 아비가 또 3년을 입고 불행히 셋째가 죽고 넷째, 다섯째, 여섯째가 차례로 죽을 경우 그 아비가 다 3년을 입어야 하는데, 아마 예의 뜻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소(註疏)에 이미 둘째 적자(嫡子) 이하는 통틀어 서자(庶子)라고 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혀놓았고, 그 아래에 “체(體)는 체이나 정(正)이 아니라고 한 것은 바로 서자로서 뒤를 이은 자를 말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허목은 그 ‘서자’를 꼭 첩의 자식으로 규정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이는 주소를 낸 이의 말이 앞뒤가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게 되니, 아마 그러한 이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년조에서 말한 장자(長子)와 장자부(長子婦)에 대해서도 허목은 또한 모두 첩의 자식으로 단정하고 있으니 예의 뜻이 과연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데 신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략)……

현종실록』권2, 1년 3월 21일(병자)

○ 장령 허목상소하였다. “신이 좌참찬 송준길이 올린 차자를 보았는데, 상복(喪服) 절차에 대하여 논한 것이 신이 논한 것과는 크게 거리가 있었습니다. 모두 예경에 의거하여 쟁론을 하면서 이렇게 해야 예라고들 하고 있지만, 이 예는 대례(大禮)입니다. 이 예에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면 앞으로 예의 기준을 어떻게 정하겠습니까?

신이 말한 것은 ‘적통은 장자로 세운다(立嫡以長)’ 하는 그 뜻입니다. 그리고 장자를 위하여 3년을 입는 까닭은 위로 쳐서 정체(正體)이기 때문이고 또 전중(傳重)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 소생인 둘째를 후사로 정하고 역시 장자라고 명명하며 그의 복이 참최 삼년(斬衰三年) 조항에 있지만, 그가 말한 ‘첫째 아들을 위하여 참최복을 이미 입었으면 둘째 장자를 위해서는 3년을 입지 않는다’ 한 기록은 경전(經傳)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첫째부터의 다섯째 여섯째까지도 모두 3년은 입어야 할 것인가?’ 한 그 말은, 신으로서는 무엇을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은 ‘정체’ 그것이지, 꼭 첫째이기 때문에 참최를 입는 것은 아닙니다.

상복전(喪服傳)의 주(註)에 이르기를, ‘적처 소생이면 모두 적자라고 명명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적처 소생인 둘째는 중자(衆子)이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서자(庶子)는 첩자(妾子)를 호칭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중자를 들어 말한 경우가 있는데 바로 오복도(五服圖)에서 ‘장자를 위하여는 참최 3년을 입고, 중자를 위하여는 부장기(不杖期)를 한다’ 한 것이 그것으로, 중자를 들면 서자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자란 장자의 아우, 또는 첩자, 또는 아직 출가하지 아니한 딸까지 포함되는데, ‘중자’라고 했을 경우 장자와 크게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또 서자를 들어 말한 경우도 있는데, 바로 ‘서자는 장자가 되어도 3년을 입을 수 없다’ 한 것이 그것으로, 서자를 들면 중자는 그 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장자와 확실한 구별을 짓기 위하여 첩자와 같은 호칭을 쓴 것입니다. 이상의 경우가 아니고서는 적자⋅서자를 동격으로 호칭한 예가 없는데, 가령 상복장의 전으로 말하더라도 대부(大夫)의 적자는 대부의 복을 입지만 대부의 서자는 자기가 대부가 되어야만 자기 부모를 위하여 대부의 복을 입을 수 있고, 대부가 서자에게는 강복(降服)을 합니다. 적자와 서자는 그 신분이 이렇게 뚜렷한 구분이 있으며, 또 ‘비록 승중을 하였더라도 3년을 입을 수 없다[雖承重不得三年]’ 한 주소(註疏)에도 적자(嫡子)와 서손(庶孫), 서자(庶子)와 적손(嫡孫)의 구별이 있어 하나는 적(嫡), 하나는 서(庶)가 명명백백합니다. 그렇다면 적처 소생의 경우 모두 적자라고 명명하지 않았습니까? 서자라는 호칭은 첩자를 이름이 아닙니까? 적자⋅서자는 따질 것 없이 첫째 아들이 아니면 3년을 입을 수 없다고 한다면, 『예경(禮經)』에 이른바, ‘장자(長子)를 위하여 참최 3년을 한다’ 한 것은 첫째 아들이기 때문이겠습니까, 정체(正體) 전중(傳重)이기 때문이겠습니까?” ……(하략)……

현종실록』권2, 1년 4월 10일(갑오)

○ 左參贊宋浚吉疏曰, ……(中略)…… 大臣之意, 皆謂我朝典禮, 實無爲子三年之制, 其在古禮, 倘不十分明白, 或有他日之悔, 則無寧遵用國典之爲愈. 故臣亦無異見, 遂以期制爲定矣. 厥後外議紛然, 或以爲大王大妃之於先大王, 當服三年, 至有以爲當服斬衰者, 或以爲貞熹王后之於我睿宗大王, 亦服三年. 此說之有明據, 臣不能知, 而祖宗朝所行果如是也, 則今日之禮, 誠有可疑者, 臣於此尤不勝瞿然之至. 蓋嘗告諸相臣, 請考實錄以來, 以爲更議之地, 而朝家多事, 有所未遑矣. 今者掌令許穆之疏, 引經據義, 論說甚勤. 臣於此論, 雖不敢索言相難, 而亦有所不能無疑者. 蓋儀禮父爲長子, 通上下而言者也. 若如穆之說, 則設令大夫士適妻所生有十餘子, 而第一子死, 其父爲之服三年. 第二子死, 其父又服三年, 不幸而第三死, 第四第五六死, 皆爲之服三年, 竊恐禮意, 決不如此也. 註疏旣明言第二嫡子以下, 通謂庶子之義, 而其下文, 謂體而不正, 卽庶子爲後者也. 此庶子, 穆必以妾子當之. 果爾則疏家之說, 前後自相逕庭, 似無是理. 而期條所謂長子長子婦等處, 穆亦皆以妾子爲斷, 未知禮意, 果如是否, 此臣之所未曉也.……(下略)……

『顯宗實錄』卷2, 1年 3月 21日(丙子)

○ 掌令許穆疏曰, 臣得見左參贊宋浚吉進箚, 論喪服之節, 與臣所論, 大相不同. 皆據禮爭論, 則如此禮也, 此大禮. 此禮不定, 將何以爲禮也. 臣所言者, 立嫡以長之義也. 所以爲長子三年者, 以正體於上, 又以其所傳重也. 第一子死, 而立嫡妻所生第二長者, 亦名長子, 而其服在斬衰三年條, 則所謂旣爲第一子服斬, 則爲第二長者, 不服三年之文, 經傳不見. 自第一子至於五六, 而皆服三年之喩, 臣不知其所謂也. 所重者, 爲繼祖禰之正體也, 非爲第一子斬也. 喪服傳註曰 嫡妻所生, 皆名嫡子, 又曰嫡妻所生第二長者, 是衆子, 又曰 庶子妾子之號. 有擧衆子而言者, 五服圖, 爲長子斬衰三年, 爲衆子不杖期, 是也, 擧衆子則庶子在焉. 衆子長子之弟及妾子女子子在室亦如之, 謂之衆子, 未能遠別也. 有擧庶子而言者, 庶子爲長子, 不得三年是也, 擧庶子而衆子在焉. 以遠別於長子, 故與妾子同號也. 非此類, 嫡子庶子, 未嘗同號, 蓋以喪服傳言之, 大夫之嫡子, 服大夫之服, 大夫之庶子爲大夫, 則其爲父母服大夫, 大夫降其庶子. 嫡子庶子, 其分不亂如此, 而至於雖承重, 不得三年註, 有嫡子庶孫, 庶子嫡孫之別, 一嫡一庶, 且甚明白. 嫡妻所生, 不曰皆名嫡子乎. 庶子之稱, 不曰妾子之號乎. 毋論嫡子庶子, 非第一子, 不得三年云爾, 則禮經所謂爲長子斬衰三年者, 爲第一子乎. 爲正體傳重乎. ……(下略)……

『顯宗實錄』卷2, 1年 4月 10日(甲午)

이 사료는 예송(禮訟) 논쟁 당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한 송준길(宋浚吉, 1606~1672)과 삼년설을 주장한 허목(許穆, 1595~1682)상소문으로 『현종실록』에 실려 있다. 예송효종(孝宗, 재위 1649~1659)효종 비가 사망하자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기간을 얼마로 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서인남인 사이의 논쟁이다. 예송은 표면적으로는 전례 문제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붕당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과 삼년설을 주장한 남인 사이의 정권 투쟁이었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이 퇴위하고 대북 정권도 몰락하였다. 이후 정국은 현종(顯宗, 재위 1659~1674) 대까지 60년간 반정 세력인 서인남인⋅소북의 공존 체제가 확립되어 붕당 정치가 토대를 잡아 갔다. 그러나 효종 시기부터 허적(許積, 1610~1680) 등 소수의 남인이 중용되기 시작하면서 세력 기반을 쌓아 나갔고, 이러한 정치적 기반 위에서 남인현종 시기 서인예송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 다툼을 하기에 이르렀다.

예송은 표면적으로 자의대비가 효종효종 비의 상에 입을 복제를 두고 일어났던 분쟁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차자(次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종법상 위치가 특수하다는 점에 있었다. 장자였던 소현세자(昭顯世子) 사후, 왕위 계승은 소현세자의 장자로 승계되었어야 하나, 봉림대군(鳳林大君), 즉 효종이 즉위하면서 왕통 계보가 차자로 넘어간 것이다. 남인의 삼년설과 서인의 기년설은 종통론적으로 효종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의 장자와 차자로 각기 다르게 보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효종을 정통으로 보는 남인 세력은 제왕(帝王)의 가례(家禮)에 대한 특수성을 강조하였다. 반면 차자로 보는 서인 세력은 예의 보편적 원리를 강조하여 왕실과 사서인(士庶人)의 예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각기 전거를 제시하였으나, 그 전거들도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분명한 단안이 도출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논쟁은 끝없이 지속되었다. 예(禮)의 적용에 있어 ‘분별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보면 제왕가는 사서인과 달라 왕위 계승자에게 종통을 주게 되므로 효종이 장자의 지위에 있고 그에 대한 모후의 의복을 3년으로 단정하게 된다. 그러나 예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효종이 왕위에 올랐더라도 태어날 때의 차례인 차자 지위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에 대한 상복도 기년(朞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게 된다. 대체로 허목윤휴(尹鑴, 1617~1680) 등의 남인 학자들이 분별주의적 경향을, 송시열(宋時烈, 1607~1689)송준길서인 학자들이 보편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효종 서거(1660) 이후 서인효종이 적장자가 아니라 하여 기년설(朞年設)을, 남인은 삼년설(三年設)을 들고 나옴으로써 1차 예송인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촉발되었다. 당시 조정은 양측의 장자⋅차자설을 모두 버리고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명률(大明律)』을 근거로 한 이른바 국제기년복(國制朞年服)을 채택하였다. 이는 효종의 장⋅차자의 지위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서 절충적 입장을 취한 것이었다. 또한 정치적으로 현종 즉위 원년이었기에 주도세력이자 명망 높은 송시열이 속한 서인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그들이 주장한 바에 가까운 기년설이 채택되어 서인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일단락되었던 예송논쟁은 현종 말년(1674)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가 문제가 되었다. 이번에 서인대공설(大功設)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여 2차 예송인 갑인예송(甲寅禮訟)이 전개되었다.

현종은 말년에 이르러 서인들의 전횡을 혐오하게 되었는데, 특히 당파적 의논을 심하게 배척하였다. 대체로 1672년(현종 13년) 이후부터 서인 정권에 대한 현종의 불신은 표면화되었고, 이에 따라 남인의 등용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었다. 현종은 외척인 김우명(金佑明, 1619~1675)⋅김석주(金錫胄, 1634~1684) 등의 청풍 김씨 세력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들은 기해예송 때부터 허목윤휴 등의 설을 좇아 ‘효종적장자설(孝宗嫡長子說)’을 고수하고 있었다. 반면 송시열송준길을 필두로 한 서인 세력은 ‘효종중서자설(孝宗衆庶子說)’을 지지하였다. 서인 세력은 그동안 왕권을 극도로 위축시켰고, 그들의 이상정치론과 현실적인 견제 때문에 외척은 오랫동안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통(宗統)에 흠이 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서인의 ‘효종중서자설’은 왕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결국 현종서인의 반대를 뒤로하고 독단으로 기년복을 복제로 확정하였다. 이렇듯 제2차 예송은 1차 예송과 같은 예학적 논쟁보다는 정치적 의미가 더 중요한 사건이었다. 즉 갑인예송은 예학적 견해의 대립이었다기보다는, 왕실과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 세력의 오랜 갈등의 결과가 정치 투쟁으로 표면화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제2차 예송 당시 남인은 이 논쟁에 별로 개입하지 않았음에도 서인의 몰락으로 인한 반사 이득으로 득세할 수 있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7세기 예송 연구의 현황과 반성」,『한국의 철학』22,이영춘,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1994.
「조선후기 예송 연구」,『부대사학』11,지두환,부산대학교 사학회,1987.
저서
『조선후기 왕위계승의 정통성논쟁 연구』, 이영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4.
『조선후기 남인과 서인의 학문적 대립』, 허권수, 법인문화사, 1993.
편저
「붕당정치의 전개」, 이영춘, 국사편찬위원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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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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