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조선 후기조선 후기 청과의 관계

인조 반정과 친명 배금 정책

왕대비가 교서를 내려 중외에 선유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략)……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 온 것이 200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그리고 임진년에 재조(再造)해 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선왕께서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에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1619, 광해군 11) 오랑캐를 정벌할 때는 은밀히 장수를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펼쳐지게 하였다.

중국 사신이 본국에 왔을 때 그를 구속하여 옥에 가두듯이 했을 뿐 아니라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할 생각을 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가 됨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그 통분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를 거역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사직에 죄를 얻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어떻게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에게 군림하면서 조종조의 천위(天位)를 누리고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폐위하고 적당한 데 살게 한다. ……(후략)……”

인조실록』권1, 1년 3월 14일(갑진)

王大妃下敎書, 宣諭中外. 若曰 ……(中略)…… 我國服事天朝, 二百餘載, 義卽君臣, 恩猶父子. 壬辰再造之惠, 萬世不可忘也. 先王臨御四十年, 至誠事大, 平生未嘗背西而坐. 光海忘恩背德, 罔畏天命, 陰懷二心, 輪款奴夷, 己未征虜之役, 密敎帥臣, 觀變向背, 卒致全師投虜, 流醜四海. 王人之來本國, 羈縶拘囚, 不啻牢狴. 皇勑屢降, 無意濟師, 使我三韓禮義之邦, 不免夷狄禽獸之歸, 痛心疾首, 胡可勝言! 夫滅天理⋅斁人倫, 上以得罪於宗社, 下以結怨於萬姓, 罪惡至此, 其何以君國子民, 居祖宗之天位, 奉宗社之神靈乎? 玆以廢之, 量宜居住. ……(後略)……

『仁祖實錄』卷1, 1年 3月 14日(甲辰)

이 사료는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성공한 직후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가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을 폐위하면서 반포한 교서의 일부이다. 교서에서는 광해군을 폐위한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그 중 외교 사안에 대한 부분을 옮긴 것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 이르러 동아시아 정세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명나라와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국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를 압박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즉위하여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하며, 대외 관계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였다. 특히 황폐해진 산업을 일으키고 국가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양전 사업호적 정리를 실시하였다.

광해군은 중국에서의 변화에 현실적으로 대처하는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취하였다. 후금이 명을 압박하자 명은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여러 구실을 대며 출병을 피하였으며, 출병하더라도 압록강 주변에서 과시만 할 뿐 힘을 행사하진 않았다. 1619년(광해군 11년) 명의 요청으로 1만여 명의 군사를 원병으로 보냈는데,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1560~1627)에게 명나라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라 하였다. 출병하여 형세를 관망하여 향배를 정하도록 밀령을 내려, 명의 요청을 들어 주면서도 후금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게 했던 것이다.

광해군의 중립적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서인 세력은 1623년(인조 1년)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仁祖, 재위 1623~1649)를 왕으로 옹립한 정변을 일으켰다. 인조 정권은 후금의 존재를 인정하는 외교정책을 반인륜적인 것이라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무렵 강성해진 후금이 조선에 형제의 관계를 맺자는 요구를 해 왔으나 응하지 않자, 1627년(인조 5년)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의주⋅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1636년(인조 14년)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형제의 관계를 군신(君臣)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하였다. 그러고는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10만여 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인조 정권은 이를 막지 못하고 봉림대군⋅인평대군과 비빈(妃嬪)을 강도(江都)로 보낸 뒤,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하였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金尙憲, 1570~1652)⋅정온(鄭蘊, 1569~1641)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최명길 등의 주화파 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서인 세력이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은 광해군이 강상(綱常)의 윤리에 어긋나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했다는 것이며, 이들은 집권 후 이러한 성리학적 명분론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이는 대외적으로 주자(朱子, 1130~1200)의 존화양이(尊華攘夷)적 명분론에 입각한 친명 배금(親明排金)의 외교정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명분론에 입각한 대내외적인 정책 고수는 청의 발호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현실적 대처 능력을 상실하게 했고, 마침내 정묘호란병자호란을 초래하게 하였다. 두 번의 호란을 겪으며 오랑캐로 여겼던 청의 무력에 굴복하게 되자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던 조선의 자부심은 큰 상처를 입었다. 뒤이어 명나라가 오랑캐인 청나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기존의 국제 질서가 붕괴해 버리자 명에 의존하던 조선의 정통성은 크게 손상 받았다.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해 대내외적 질서를 확립해 가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러한 전통적 중화 질서의 붕괴를 천지 대란으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치열한 사상적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을 새로운 국제 관계의 중심으로 인정하는 주화론(主和論)은 배제되고 종래의 주자학적 이념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이 국론이 되면서 조선 성리학은 더욱 강고한 명분주의의 틀을 고수하게 되었다. 이는 청에 굴복한 현실을 관념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지만, 병자호란 이후 심양에 억류되어 있다 귀국해 왕위에 오른 효종(孝宗, 재위 1649~1659)과 그에 의해 발탁된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중심으로 한 서인 정권의 정통성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인조대 전반 정치적 갈등과 붕당론」,『역사와경계』60,김용흠,부산경남사학회,2006.
저서
『조선후기 지식인의 대외인식』, 김문식, 새문사, 2009.
『한중관계사 연구』, 전해종, 일조각, 1970.
편저
「호란 전의 정세」, 김종원, 국사편찬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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