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조선 후기조선 후기 청과의 관계

나선 정벌

청차(淸差) 이일선(李一善)이 칙서를 가지고 왔는데,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등이 상에게 성문 밖에서 맞이할 것을 권하니, 승지 서원리(徐元履)도 그 말에 적극 찬동하였다. 상이 서교(西郊)에 나아가 맞이하고 희정당(熙政堂)에서 접견하였다. 이일선이 말하기를, “대국이 군병을 동원하여 나선(羅禪)을 토벌하려는데 군량이 매우 부족합니다. 본국에서도 군병을 도와주어야 하니 본국에서 다섯 달 치 군량을 보내 주시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의 형세는 어떠하오?” 하자 이일선이 말하기를, “적병은 100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나, 저희들이 이처럼 달려오게 된 것은 북로(北路)에 비축한 것이 없음을 염려한 나머지, 내지(內地)의 곡물을 수송하여 군량을 대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 지역에 군량을 운송하자면 형세상 매우 어렵기는 하겠으나, 어찌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효종실록』권20, 9년 3월 3일(경자)

淸差李一先齎勑而來, 領議政鄭太和等勸上郊迎, 承旨徐元履力贊其議, 上幸西郊以迎之, 接見于熙政堂. 一先曰 “大國將發兵伐羅禪, 饋餉甚難. 本國亦當助兵, 請自本國, 齎五月糧以送. 上曰 賊勢如何 一先曰 “賊兵不過千餘人云矣, 俺等之所以疾馳而來者, 蓋慮北路無儲蓄, 欲輸內地之粟, 以繼軍食故也. 上曰 絶域飛輓, 其勢雖難, 安得不副.

『孝宗實錄』卷20, 9年 3月 3日(庚子)

이 자료는 1658년(효종 9년) 청나라에서 나선 정벌(羅禪征伐)에 앞서 조선에 군량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나선 정벌은 조선 효종(孝宗, 재위 1649~1659) 때 조선이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를 공격한 싸움을 말한다. ‘나선’은 러시아 사람, 곧 ‘러시안(Russian)’을 한자음으로 옮긴 것이다.

16세기 말엽부터 영토의 팽창을 시작한 러시아는 주요 재정 수입원 중 하나인 모피의 확보를 위해 동진 정책을 계속하였다. 1643년 처음으로 러시아 원정대가 흑룡강 인근 지역에 들어와 탐사를 실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찍이 이 지역에 자리 잡은 수렵민들과 분쟁을 일으켰다. 이들 원정대는 1646년 귀국하여 흑룡강 유역에 모피와 광물 등 자원이 풍부하다는 보고를 올렸다. 두 번째 러시아 원정대는 1649년 러시아 야쿠츠크를 출발하여 1650년(효종 1년) 흑룡강 서안의 야크사(雅克薩)에 진입하였다. 이들은 청나라에 복속된 토착민인 다우르 족(達斡爾族, Daur)을 회유하여 러시아에 편입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이들을 학살하고 이 지역을 알바진(Albazin, 러시아어: Албазин)이라 칭하였다. 아울러 요새를 쌓고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고 식량을 약탈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651년(효종 2년) 가을 러시아인들은 흑룡강의 지류인 우수리 강(烏蘇里江) 하구로 내려가 아찬스크(Achansk, 러시아어: Ачанск) 요새를 만들고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모란강(牡丹江) 인근의 영고탑(寧古塔) 주둔 군사를 동원하여 러시아인들을 축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652년 4월 아찬스크 요새 공략에서 청군은 우수한 무기를 갖춘 러시아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참패하였다. 다음해 봄에 러시아 원정대는 스스로 아찬스크 요새를 파괴하고 철수하여 흑룡강 상류에 쿠마르스크(Kumarsk) 요새를 세우고 소수 부족에 대한 약탈 행위를 계속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내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남방에 집중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며, 숙련된 총병이 부족하였다. 따라서 러시아군을 격퇴하고자 1654년(효종 5년) 2월 사신 한거원(韓巨源)을 보내 조총 군사 100명을 뽑아 영고탑에 보내 주도록 요구했다. 조선은 청의 요청에 응해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邊岌)의 지휘 아래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 50여 명을 출병시켰다. 조선군은 4월 16일 영고탑에서 청나라 군사와 합류하여 배를 타고 출발하였다. 총 750명으로 구성된 조청 연합군은 28일과 29일 목단강이 송화강과 만나는 지점에서 약 400명의 러시아군을 맞아 전투를 벌였다. 연합군은 중화기가 없고, 청나라 군선은 숫자는 많았지만 크기가 작고 약하여 대형 범선인 러시아 배를 상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강으로 나가지 않고 연안에 나무로 만든 방패를 세운 다음 청군이 강에서 러시아군의 주의를 끌면, 조선군이 방패 뒤에서 러시아 배를 집중 사격하는 작전을 펼쳤다. 적군은 5월 2일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며, 연합군은 5일까지 추격전을 벌였다. 살아남은 러시아군은 흑룡강 상류의 쿠마르스크 요새로 도망가서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이에 연합군은 추격을 중지하고 철수하였다. 조선군은 사상자 없이 원정을 마쳤으며, 5월 7일 강에 토성을 쌓고 16일 회군하여 6월 21일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이것이 제1차 나선 정벌이다.

도주한 러시아군은 병력과 화약 등을 보충하여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1655년 쿠마르스크 요새를 공격하여 공방전을 벌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며, 1657년에도 송화강 내륙에 침투한 러시아군과 교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이에 1658년(효종 9년) 3월 청나라는 다시 조선군 파병을 요청하여, 함경북도 병마우후 신류(申瀏, 1619~1680)를 대장으로 조총군 200명과 초관⋅기고수(旗鼓水)⋅화정(火丁) 등 60여 명이 2차 나선 정벌에 나섰다.

조선군은 5월 중 영고탑에 도착하여 청나라 군사와 합류하였다. 48척의 크고 작은 배와 조선군을 포함하여 총 2500여명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6월 5일 송화강 본류로 나갔으며 6월 10일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러시아군과 교전하였다. 연합군은 배를 포위하고 처음부터 함포와 조총 사격을 집중하여 러시아군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러시아 배가 단단해서 쉽게 부술 수 없었으므로 불화살을 이용한 화공(火攻)을 펼쳐서 7척의 선박을 불태우고 3척을 나포하였다. 이때 러시아군은 360명 중 220여 명이 전사하였고, 나머지는 날이 어두워진 틈을 타서 한 척의 배를 타고 도주하거나 실종되었다. 연합군 피해는 전사 120여 명(조선군 8명 포함), 부상 230여 명(조선군 25명 포함)이었다. 이것이 제2차 나선 정벌이다.

두 차례에 걸친 나선 정벌효종 시기 북벌 계획을 추진하여 군사력을 강화한 것에 대한 간접적 근거로 볼 수 있다. 조선군이 적은 수의 병력으로 청나라 군사에 비해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을 통해 확인된다. 이는 북벌 계획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선군의 사격술과 전술에 대한 훈련이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나선정벌과 신류의 『북정록』」,『군사사 연구총서』5,계승범,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08.
저서
『조선시대 비변사 연구』, 반윤홍, 경인문화사, 2003.
『요동묵시록-효종이 부른 노래』, 신용우, 작가와 비평, 2011.
편저
「청국과의 관계」, 최소자, 국사편찬위원회, 1997.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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