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근대서양 세력의 접근과 대응

이항로의 척사론

동부승지를 사임하며 품고 있던 바를 진소(陳所)함. 【병인(丙寅, 고종 3, 1866) 9월 13일】1)

……(전략)……

적의 정세를 미리 살펴 분명하고 조리 있게 지금의 일을 논할 수는 없으나, 그 대강만을 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국론이 두 가지 설로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양적과 화친할 수 없다는 것은 내 나라 사람(國邊人)의 주장이고 양적과 화친하자는 것은 적국 쪽 사람(賊邊人)의 말입니다. 전자를 따르면 옛 문물 제도를 보전할 수 있지만 후자를 따르면 금수(禽獸)의 나라가 될 것이니, 이것이 대강의 구분입니다. 타고난 천성을 조금이라도 지닌 자라면 모두 알 수 있는 일인데, 하물며 밝고 성스러운 전하께서 어찌 분별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종묘사직의 위급한 화가 바로 닥친 가운데 이득을 따져 요행을 바라는 논의가 그 사이를 타고 틈을 엿본다면, 성상께서 과연 토로장군(討虜將軍) 손권(孫權)이 책상을 내리쳤던 용기2)와 같이 단호하고 강력하게 진압하실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국변인들의 주장에도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싸워 지키자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오랜 도읍지를 떠나자는 설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싸워 지키는 것은 떳떳한 도리이고 도읍지를 떠나는 것은 임기응변의 방편입니다. 떳떳한 도리는 사람들이 모두 지킬 수 있지만 임기응변은 성인(聖人)이 아니면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누구든지 대개 태왕(太王)과 같은 덕을 지녔다면 가능하지만 태왕과 같은 덕이 없다면 뭇사람의 호응이 없을 것입니다. 백성은 한 번 흩어지면 다시 모을 수 없고 대세는 한 번 떠나가면 다시 오게 할 수 없으니, 이것이 신이 일에 앞서 깊이 염려하는 까닭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혹시 사변이 일어난다 해도 차라리 떳떳한 도리를 지킬지언정 대번에 성인의 일로써 스스로 견주려 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만약 싸워 지킨다는 설로 굳게 뜻을 정하여 비록 많은 사람이 가로막고 흔들어도 조금도 동요되지 않으신다면 귀머거리나 절름발이 같은 사람도 백배의 용기를 낼 것입니다. 하물며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사람이나 초야의 충의로운 사람이면 누군들 백성을 격려하고 권장하여 전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게 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 속히 애통해 하는 뜻의 교서를 내려 스스로 외적을 들이게 된 것을 반성하고 선후책을 잘 처리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보이시길 바랍니다. 한편의 말이 지극히 간절하여 귀신도 울리고 목석도 감동시킬 수 있다면 백성의 마음을 고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 대신을 믿어 체통을 높이고, 삼사(三司)3) 이 외에 언로(言路)를 넓게 열고, 장수를 뽑고, 군비를 다스리고, 덕망을 지닌 사람들을 최대한 등용해야 할 것입니다. 또 8도 안에서 각각 본도의 가장 덕망이 높은 자 한 사람을 호소사(號召使)4)로 삼아 그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높이는 뜻을 보여 주며 영화로운 벼슬과 녹봉이 그 부관들에게까지 미치도록 하여, 그로 하여금 충효와 절개를 갖춘 인사들을 수습하여 의병으로 삼아 관군과 서로 호응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이 오면 적의 칼날을 꺾고 막아 내어 왕실을 호위하도록 하고, 적이 가면 윤리와 강상(綱常)을 닦고 밝혀 사교(邪敎)5)를 잠재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전화위복의 계기를 또한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략)……

『화서집』권3, 소차, 사동부승지겸진소회소

1)『승정원일기』에는 이항로의 상소가 9월 12일에 국왕에게 올라간 것으로 되어 있다. (박성순, 『조선후기 화서 이항로의 위정척사사상』, 경인문화사, 2003)
2)중국 후한(後漢) 말 삼국 시대 토로장군을 지낸 손권이 조조(曹操)를 치기를 의논할 때 사람들이 모두 조조의 위세를 두려워하였고 일부 대신은 조조를 맞이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때 손권이 칼을 빼어 책상을 자르며 “여러 장수나 관리 중에 조조를 맞이하자고 말하는 자는 이 책상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한 고사를 말한다.
3)조선 시대 국왕에게 간행⋅탄핵 등을 올려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합하여 부르던 말. 언론삼사(三司)라고도 한다.
4)전쟁이 났을 때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를 모집하던 임시 관직.
5)여기서는 천주교를 말한다.

辭同副承旨兼陳所懷䟽【丙寅九月十三日】

……(前略)……

不得逆探賊情, 條論時事, 鑿鑿符合, 然姑擧其大槩. 則今國論, 兩說交戰. 謂洋賊可攻者, 國邊人之說也, 謂洋賊可和者, 賊邊人之說也, 由此則邦內保衣裳之舊, 由彼則人類陷禽獸之域, 此則大分也. 粗有秉彝之性者, 皆可以知之, 况以殿下之明聖, 豈容左腹之入也. 但恐宗社危急之禍, 迫於呼吸, 而計利徼幸之論, 乘間抵隙, 則未知聖明果能持之如一, 剛决鎭壓, 如孫討虜斫案之勇否也. 此愚臣之所大懼也. 其主國邊之論者, 又有兩說. 其一戰守之說也, 其一去豳之說也, 臣愚以爲戰守, 常經也, 去豳, 達權也. 常經, 人皆可守, 達權, 非聖人不能也. 何者, 葢有太王之德則可, 無太王之德, 則無歸市之應矣. 百姓一散, 不可復合, 大勢一去, 不可復來, 此愚臣所以先事深憂. 願殿下脫有事變, 寧守常經, 而毋遽以聖人之事自况也. 殿下若於戰守之說, 堅定聖志, 雖萬夫沮撓, 不動毫髮, 則喑聾跛躄, 且增百倍之氣矣. 况簪纓世臣之族, 草野忠義之人, 孰不願激勸小民, 爲殿下效死哉. 臣願殿下亟下哀痛之敎, 自訟致冦之由, 明示善後之意. 十行絲綸, 丁寧懇惻, 足以泣鬼神而動木石, 則其鼓發民情之端, 得之於此矣. 敬信大臣, 以尊體統, 三司之外, 廣開言路, 選將繕武, 極用人望. 八道之內, 又各擇本道人望所歸者一人, 爲號召使, 假之以威權, 示之以尊寵, 爵祿之榮, 及於副貳, 使之收拾忠義氣節之人, 以爲義旅, 與官軍相爲應援. 賊來則折衝禦侮, 以衛王室, 賊去則修明彜倫, 以息邪敎. 則其轉禍爲福之幾, 又得之於此矣.

……(下略)……

『華西集』卷3, 疏箚, 辭同副承旨兼陳所懷疏

이 사료는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이항로(李恒老, 1792~1868)가 위정척사적인 관점에서 강경한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한 상소문이다.

프랑스 극동함대는 1866년 8월 병인박해를 계기로 7척의 함선에 1500여 명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읍을 점령하였다. 이들은 조선 정부에 학살 책임자 처벌과 조선⋅프랑스 조약을 체결하자고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당일 대책 회의를 소집하고 재야 노론 학자인 이항로를 동부승지로 발탁하였다. 이항로는 늙은 몸을 이끌고 도성에 올라와 9월 동부승지를 사임하는 상소를 통해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에게 척사(斥邪)의 대의를 피력하고 프랑스 함대와 결전을 치를 것을 아뢰었다.

이항로는 이 상소에서 서양 세력의 침입에 직면한 당시의 국론을 나라의 입장에 선 사람[國邊人]과 적의 입장에 선 사람[賊邊人]으로 구분하고, 전자의 주장을 따르면 나라 안 사람들과 문물제도를 예전과 같이 보전할 수 있지만, 후자의 주장을 따르면 사람들을 짐승이나 다름없는 지경에 빠뜨리게 될 것임을 경고하였다.

이항로는 또한 전자의 싸워 지키자는 설(戰守之說)과 도성을 버리자는 설(去豳之說) 두 가지가 있다고 구분하였다. 이항로는 싸우면서 고수하자는 것은 일반적인 원칙이며, 수도를 떠나는 것은 임시방편을 능란하게 취해야만 하는 것이라 전제하고, 일반적인 원칙은 사람마다 다 지킬 수 있지만 임시방편을 능란하게 취하는 문제는 성인(聖人)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주전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주전설과 함께 토목공사나 가렴주구 금지 등 백성을 위한 현실적인 대책도 함께 아뢰었다.

상소를 올린 다음 날인 9월 13일 이항로는 고종을 알현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다시 심법(心法)을 강조하였다. 국가의 대본(大本)은 국왕의 마음에 달려 있는데 마음이 올바름을 얻을 때 만사가 순조롭고 그렇지 않을 때는 작아지고 좀스러워진다고 하며, 심법을 닦아 극기하여 선을 따라 대본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이후 여러 상소에서도 서양의 물품 사용을 금지하자는 양물금단론(洋物禁斷論)과 척사론을 주장하였는데, 서양을 막는 대책은 모두 이러한 그의 심성론으로 귀착되었다.

척사 상소 및 직접 대면을 통해 이항로의 척사론을 접한 고종은 그의 견해를 전폭적으로 수용하였다. 대원군도 9월 14일 대책 회의를 열던 의정부 회의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결연한 항전 의지를 밝혔다. 그리하여 마침내 강화도에서 이항로의 제자인 양헌수(梁憲洙)의 효과적 작전으로 프랑스 함대를 퇴각시켰으며, 10월에는 공식적으로 서양 물품 사용을 금지하는 전교가 내려졌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병인양요 시기 이항로의 천거를 둘러싼 정국의 동향」,『사총』72,박성순,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2011.
「쇄국양이와 위정척사사상-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경우-」,『영남사학』5⋅6합,홍순창,영남대학교 사학과,1976.
저서
『조선후기 화서 이항로의 위정척사사상』, 박성순, 경인문화사, 2003.
『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 오영섭, 국학자료원, 1999.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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