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근대개항과 불평등 조약

한성 조약과 톈진 조약

한성 조약

이번 경성사변은 작은 문제가 아니어서 대일본 대황제는 깊이 생각하고 이에 특별히 전권대사 백작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대조선국에 파견해서 편리한 대로 처리하게 하며, 대조선국 대군주는 돈독한 우호를 진심으로 염원하여 김홍집(金弘集)에게 전권(全權)을 위임하여 토의⋅처리하도록 임명하고 지난 일을 교훈으로 삼아 후일을 조심하도록 한다. 양국 대신은 마음을 합해 상의하여 아래의 약관을 만들어 우의가 완전하다는 것을 밝히며, 또한 이로써 장래 사단이 생기는 것을 방지한다. 이에 전권 문서에 의거하여 아래와 같이 각각 서명하고 도장을 찍는다.

제1조, 조선국은 일본에 국서를 보내 사의를 표명한다.

제2조, 이번에 피해를 입은 일본국 인민의 유가족과 부상자를 돌보아 주고, 아울러 상인들의 화물이 훼손⋅약탈된 것을 보충[塡補]하기 위해 조선국은 11만 원(圓)을 지불한다.

제3조, 이소바야시(磯林) 대위를 살해한 흉도(兇徒)를 조사⋅체포하여 중죄로 처벌한다.

제4조, 일본 공사관을 새로운 곳으로 옮겨 신축해야 하므로 조선국은 땅과 건물을 내주어 공사관 및 영사관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을 수축이나 중축할 경우 조선국이 다시 2만 원을 지불하여 공사비로 충당하게 한다.

제5조, 일본 호위병의 막사는 공사관 부지로 정하되 제물포조약 제5관에 비추어 시행한다.

대조선국 개국(開國) 493년 11월 24일

특파전권대신(特派全權大臣) 좌의정 김홍집

대일본국 메이지(明治) 18년 1월 9일

특파전권대사(特派全權大使) 종3위(從三位) 훈1등(勳一等) 백작 이노우에 가오루

별단(另單)

1.약관 제2조, 제4조의 금액은 일본 은화로 계산하여 3개월 내에 인천에서 지불을 완료한다.

1 제3조의 흉도를 처리하는 것은 조약을 체결한 후 20일을 기한으로 한다.

대조선국 개국 493년 11월 24일

특파전권 대신 좌의정 김홍집

대일본국 메이지 18년 l월 9일

특파전권대사 종3위 훈1등 백작 이노우에 가오루

고종실록』권21, 21년 11월 24일(갑자)

톈진 조약

대청국(大淸國) 특파전권대신(特派全權大臣)【태자태부문화전대학사(太子太傅文華殿大學士) 북양통상대신(北洋通商大臣) 병부상서(兵部尙書) 직예총독(直隷總督) 1등 숙의백작(一等肅毅伯爵)】이홍장(李鴻章)과 대일본국 특파전권대사(特派全權大使)【참의 겸 궁내경 훈1등 백작(參議兼宮內卿勳一等伯爵)】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각기 받든 유지(諭旨)에 따라 공동으로 회의하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한다. 모든 약관을 아래에 열거한다.

1. 중국은 조선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하고, 일본국은 조선에서 공사관을 호위하던 군대를 철수한다. 서명하고 날인한 날로부터 4개월 이내에 각기 모든 인원을 철수시킴으로써 양국 간 분쟁이 생겨날 우려를 없애고, 중국은 마산포(馬山浦)를 통하여 철수하고 일본은 인천항을 통하여 철수할 것을 의정(議定)한다.

1. 양국은 조선 국왕이 군사를 훈련시키도록 권고하여 자위와 치안을 유지하게 하고, 조선 국왕이 다른 나라 무관을 1명, 혹은 여러 명을 선발 고용하여 훈련을 위임하게 하되, 이후 중국과 일본 양국은 관원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훈련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승인한다.

1. 장래 조선국에 변란이나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 중국과 일본 양국이나 혹은 어떤 한 나라가 파병이 필요할 때는 우선 상대국에 공문을 보내 통지해야 하며, 사건이 진정되면 곧 철수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

대청국(大淸國) 광서(光緖) 11년 3월 4일

특파전권대신 문화전 대학사 직예총독 1등 숙의 백작 이홍장

대일본국 메이지(明治) 18년 4월 18일

특파전권대사 참의 겸 궁내경 훈1등 백작 이토 히로부미

고종실록』권22, 22년 3월 4일(계묘)

漢城條約

此次京城之變, 所係非小, 大日本大皇帝, 深軫宸念, 玆簡特派全權大使伯爵井上馨, 至大朝鮮國, 便宜處理, 大朝鮮國大君主, 宸念均願敦好, 乃委金弘集以全權, 議處之任命, 以懲前毖後之意. 兩國大臣和衷商辦, 作左約款, 以昭好誼完全, 又以防將來事端. 玆據全權文憑, 各簽名鈐印如左.

第一條 朝鮮國修國書, 致日本國, 表明謝意事.

第二條 恤給此次日本國遭害人民遺族, 竝負傷者, 曁塡補商民貨物, 毁損掠奪者, 由朝鮮國撥支拾壹萬圓事.

第三條 殺害磯林大尉之兇徒, 査問捕拿, 從重正刑事.

第四條 日本公館, 要移新基建築, 當由朝鮮國, 交附地基房屋足容公館, 曁領事館. 至其修築增建之處, 朝鮮國更撥交貳萬圓, 以充工費事.

第五條 日本護衛兵辦營舍, 以公館附地擇定, 照壬午續約第五款施行事.

大朝鮮國開國四百九十三年十一月二十四日

特派全權大臣左議政 金弘集

大日本國明治十八年一月九日

特派全權大使從三位勳一等伯爵 井上馨

另單

一, 約款第二第四條金圓, 以日本銀貨算, 須期三箇月, 於仁川撥完.

一, 第三條兇徒處辦, 以立約後二十日爲期.

大朝鮮國開國四百九十三年十一月二十四日

特派全權大臣左議政金弘集

大日本國明治十八年一月九日

特派全權大使從三位勳一等伯爵 井上馨

『高宗實錄』卷21, 21年 11月 24日(甲子)

天津條約

大淸國特派全權大臣【太子太傅文華殿大學士北洋通商大臣兵部尙書直隸總督一等肅毅伯爵】李鴻章,大日本國特派全權大使【參議兼宮內卿勳一等伯爵】伊藤博文, 各遵所奉諭旨, 公同會議, 訂立專條, 以敦和誼. 所有約款臚列於左.

一, 議定中國撤駐紮朝鮮之兵, 日本國撤在朝鮮護衛使館之兵. 辨自畫押蓋印之日起, 以四箇月爲期限內, 各行盡數撤回, 以免兩國有滋端之虞, 中國兵, 由馬山浦撤去, 日本國兵, 由仁川港撤去.

一, 兩國均允勸朝鮮國王敎練兵士, 足以自護治安. 又由朝鮮國王選僱他外國武辨一人或數人, 委以敎演之事, 嗣後中, 日兩國, 均勿派員在朝鮮敎練.

一, 將來朝鮮國, 若有變亂重大事件, 中日兩國, 或一國要派兵, 應先互行文知照, 及其事定, 仍卽撤回, 不再留防.

大淸國光緖十一年三月初四日

特派全權大臣文華殿大學士直隷總督一等肅毅伯爵 李鴻章

大日本國明治十八年四月十八日

特派全權大使參議兼宮內卿勳一等伯爵 伊藤博文

『高宗實錄』卷22, 22年 3月 4日(癸卯)

1884년(고종 21년) 10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동양 삼국의 정치적 국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11월에 체결된 한성조약은 갑신정변 사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서울에서 조선 전권대신 김홍집(金弘集)과 일본 측 전권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듬해 3월 이홍장(李鴻章)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에 체결된 톈진 조약갑신정변으로 인해 조선에서 양국이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고자 한 타협책이었다.

갑신정변이 청군에 의해 진압되자 조선 정부는 즉시 각국 공사관에 이번 사건이 김옥균(金玉均, 1851~1894) 등의 간신이 왕명을 사칭해 일본 공사의 보호를 요청하고 대신들을 타살한 것이라 알리고, 일본 공사에게 정변 개입 사실을 강하게 항의하는 한편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비롯한 갑신정변 주역들의 인도를 요구하였다. 이어 조선 정부는 10월 27일 전권대신 서상우(徐相雨)와 전권부대신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거절로 교섭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가 전권대신이 되어 2개 대대 병력과 7척의 군함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왔다. 11월 18일 일본 전권대사 이노우에가 대부대를 이끌고 한성에 들어오자 조선에서는 좌의정 김홍집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22일부터 협상을 개시하였다. 협상 결과 일본이 요구한 3개 조건 가운데 공사관 건축비를 반감하여 2만 원으로 하고, 이미 약정된 공사관 호위병을 1,000명씩 주둔시키겠다는 조항을 삭제한 뒤, 24일에 대체로 일본 측 요구대로 타결되었다. 이때 조선은 김옥균갑신정변 망명자들을 인계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인도적인 이유를 내세워 이를 거절하였다. 특히 일본은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공사가 정변에 연루되었다는 조선 측의 주장을 어떤 경우에도 수용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갑신정변의 책임과 관련되었기 때문이었다.

한성 조약 결과 조선 정부는 전권대신을 임명해 일본에 국서를 전달하였다. 갑신정변으로 피해를 입은 일본인 38명은 주로 조선 민중의 공격을 받아 희생된 민간인이었으며, 이중 2명은 청일 간 전투와 후퇴 과정에서 사망한 일본 군인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전보금 총 13만 원을 1886년까지 모두 일본에게 지불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일본은 자국 군대의 명백한 군사적 개입에도 불구하고 한성조약을 통해 조선 측으로부터 사죄와 전보금(塡補金) 및 공사관 재건비 등을 약속 받았다. 반면 일본 공사의 정변 가담 책임과 망명자 송환 문제에 대한 조선 측의 요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 정부는 제물포조약에 이에 한성조약에서도 사죄와 배상금을 받아 내며 조선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갑신정변 진압 과정에서 청일 양군이 창덕궁에서 전투를 벌여 청군 3명과 일본군 2명이 전사하였다. 정변 이후에도 양국군이 서울에 그대로 주둔하자 조선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는 양국이 개전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이때 일본이 먼저 청에 협상을 제의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로 위협을 느낀 일본은 일단 조선에서 양군을 철수해 충돌을 막자는 입장이었다. 일본은 러시아가 영국과 충돌하는 일이 발생할 경우, 청과 영국이 맺을지도 모를 동맹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반면, 청은 초기에는 일본 측의 군대 철수안에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청군의 주둔은 속국 조선을 보호하기 위함이며, 조선 정세가 안정되고 그 자위력을 갖추면 철수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그해 프랑스군의 베트남 공격이 거세지며 전세가 불리해지고 일본과 프랑스 간 동맹 가능성에 관한 정보가 입수되자 철병 문제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동시에 청은 러시아의 남하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하였다.

청일 양국의 전권대신인 이토와 이홍장은 톈진에서 1885년 2월 18일부터 3월 1일까지 모두 6차에 걸친 협상을 벌였다. 양국은 군대 공동 철수에 관해서는 합의했지만 정변 당시 양국 지휘자의 처벌과 서울 주둔군의 철수 문제에 대해서는 팽팽하게 맞섰다. 일본 측은 다케조에 공사가 조선 국왕의 명확한 의뢰, 이른바 일사래위(日使來衛)를 받아 왕의 신변 보호를 위해 궁궐에 들어갔을 뿐이며, 청군 지휘관들이 군대를 이끌고 왕궁에 들어와 일본 공사를 공격했으므로 반드시 청군 지휘관의 처벌과 일본인에 대한 배상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반면 청측은 청의 군사 행동은 조선 정부의 요청에 따른 정당한 것으로 다케조에 공사가 정변에 가담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협상 초반인 2월 19일 청과 프랑스가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청은 협상에 강경한 기조를 견지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피해 보상 주장은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철병 시기와 규모에 관해서도 의견이 대립하였다. 일본은 모든 병력의 철수를 주장하였고, 청은 청 교관 20명은 제외할 것을 요구했으나 4개월 내에 전면 철수로 합의하였다. 한편 이홍장은 청의 조선 출병권을 주장하였다. 조선에 분쟁이 일어날 경우 속국 조선에 대해 일본과 달리 파병할 권리가 있음을 조약에 명시하려 하였다. 이에 이토는 일본도 동등한 파병 권리가 있으며, 변란 발생 시 상대국의 승낙 하에 파병할 수 있다고 반박하였다.

그런데 3월 1일,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 저지를 빌미로 조선 거문도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발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청일 양국은 서둘러 협상을 타결하여, 이른바 출병권 문제는 일본 측 요구대로 조선에 중대 사건이 발생할 경우 상대국에 문서로 통지하고 출병할 수 있음을 명시하고 교섭을 마무리하였다.

톈진 조약은 조선에 관한 청일 양국의 권리를 규정한 첫 약정이었다. 양국 군대 철수, 제3국 교관 파견, 양국의 동등한 출병권을 규정하고 있고, 특히 조선의 군사 문제에 관해서 청일 양국의 대등한 권리를 명시하였다. 특히 이 출병권 문제는 10년 뒤인 1894년(고종 31년) 조선에서 갑오 농민 운동이 발발하자 청일 양국이 조선에 출병하는 빌미로 작용하였다. 톈진 조약의 교섭 과정에서 청불 간 전투와 타결, 영국의 거문도 사건 등 이때 조성된 국제 환경이 중요 변수로 작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동아시아에서 조선의 문제는 청일 간의 문제를 넘어 서양 열강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청일 양국도 서양 열강을 의식하였다. 일본은 러시아를 의식해 양국이 공동으로 러시아에 대응해 조선에 내정 간섭하자는 내용을 청에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갑신정변은 조선의 근대 독립국가 수립 과정에서 국내적, 국제적 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갑신정변의 선후 처리를 위한 청일간의 외교교섭 시말」,『논문집』8,김경창,경희대학교,1974.
「거문도사건과 조선의 중립화론」,『강원사학』17⋅18,엄찬호,강원대학교 사학회,2002.
「열강의 대한정책에 대한 일연구-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중심으로-」,『역사학보』29,최문형,역사학회,1981.
저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김용구, 도서출판 원, 2004.
편저
『구한말조약휘찬』상, 국회도서관입법조사국, 국회도서관, 1964.
『조약으로 본 한국근대사』, 최덕수 외, 열린책들, 2010.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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