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근대동학 농민 운동

고부의 사발통문

계사(癸巳, 1893) 11월 일

전봉준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김도삼

송주옥

송주성

황홍모

최흥열

이봉근

황찬오

김응칠

황채오

이문형

송국섭

이성하

손여옥

최경선

임노홍

송인호

각 마을의 집강(執綱) 귀하

위와 같이 격문을 사방에 빨리 전달하니 사람들의 논의가 비등하였다.

매일 멸망할 것이라고 노래하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며 기일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이때에 도인(道人)들은 전후의 방책을 토의⋅결정하기 위하여 고부(古阜) 서부면(西部面) 죽산리(竹山里) 송두호(宋斗浩)의 집으로 도소(都所)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순서를 결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일.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목을 베어 매달 것

일.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일.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을 침탈한 탐욕스러운 아전을 쳐서 징벌할 것

일.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향할 것

위와 같이 결의가 이루어지고 따라서 군사전략에 능하고 여러 일에 민첩한 지도자가 될 장...

……(이하 판독 불능)……

『나라사랑』15집, 1974

癸巳十一月 日

全琫準

宋斗浩

鄭鍾赫

宋大和

金道三

宋柱玉

宋柱晟

黃洪模

崔興烈

而鳳根

黃贊五

金應七

黃彩五

而文炯

宋國燮

李成夏

孫如玉

崔景善

林魯鴻

宋仁鎬

各里 執綱 座下

右와 如히 檄文을 四方에 飛傳니 物論이 昇沸얏다

每日亂亡을 謳歌던 民衆드른 處處에 모여서 말되 「낫네 낫서 亂離 낫서」「에이 참 되얏지 그냥 이로 지서야 百姓이 사람이머 잇겟」며 期日이 오기 기다리더

이에 道人드른 先後策을 討議決定기 爲하야 古阜西部面竹山里宋斗浩家에 都所를 定고 每日雲集하여 次序를 決定니 그 決議된 內容은 左와 如

一. 古阜城을 擊破고 郡守 趙秉甲을 梟首 事

一. 軍器倉과 火藥庫를 占領 事

一. 郡守의게 阿諛야 人民을 侵漁 貪吏를 擊懲 事

一. 全州營을 陷落고 京師로 直向 事

右와 如히 決議 되고 서 軍略에 能고 庶事에 敏活 領導者될 將...

……(이하 판독 불능)……

『나라사랑』15집, 1974

통문은 대개 여러 사람에게 어떠한 내용을 알리기 위한 글이다. 조선 시대 동학 농민군이 주고받던 사발통문(沙鉢通文)동학 농민 운동 주역들이 거사한 내용과 그 결의, 그리고 거사 계획을 전파하던 도구로 활용되었다. 사발통문은 사발에 대고 그 주위에 원형으로 거사 주역들의 이름을 썼는데, 이는 서명의 순서를 파악할 수 없는 형태로 거사의 주모자가 누군지 알 수 없게 하려는 뜻이 숨어 있다. 이 사발통문은 보안을 유지하면서 혁명 가담자들만 수신자로 한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변혁의 의지를 담은 소통 도구였다.

대표적인 사발통문은 1893년(고종 30년)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全琫準, 1855~1895) 등이 작성한 것이다. 전봉준은 농민 대표 20여 명과 함께 결의문을 작성하고 사발처럼 동그랗게 연명하였다. 이 사발통문은 1894년(고종 31년) 1월 10일에 일어났던 고부 민란이 사전에 계획하여 일어났음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1890년대 고부는 전운사(轉運使) 조필영(趙弼永)과 균전사(均田使) 김창석(金昌錫)의 탐학 등으로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여기에 군수 조병갑(趙秉甲, ?~?)의 학정과 수탈이 가세되었는데, 조병갑은 만석보(萬石洑)를 새로 수축한다면서 당초 약속과 달리 물세를 추가로 거두었고, 농사지을 수 없는 진황지(陳荒地)에 대해서도 토지세를 부과했으며, 부자들에게는 불효⋅음행 등의 죄목을 씌워 돈을 착복하였다.

1893년 11월 초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 농민 40여 명은 군수 조병갑에게 나아가 만석보의 물세를 감해 달라고 등소(等訴)했지만, 조병갑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전봉준 등 몇 명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에 전봉준 등 20여 명은 11월 하순에 사발통문을 돌려 봉기를 선동하고, 각 마을의 집강(執綱)에게 고부성 점령, 조병갑 처형, 무기고 점령, 탐관오리 처단, 전주성 점령과 서울 진격 등을 내용으로 하는 봉기 계획을 알렸다. 명단에 있는 전봉준과 송두호(宋斗浩)를 비롯해 정종혁(鄭鍾赫), 송대화(宋大和), 김도삼(金道三), 송주옥(宋柱玉) 등 6명이 고부 사람이었다. 최경선(崔景善)은 태인, 손여옥(孫如玉)은 고창 사람인데 이 두 사람은 전봉준의 수족과 같이 행동을 함께했다.

그러나 때마침 조병갑이 11월 30일 익산 군수로 교체되자 이 계획은 보류되었다. 고부 농민들은 12월에 조병갑의 탐학에 대해 전라 감영에 소장을 올렸지만, 감사는 오히려 조병갑을 비호하였다. 그 사이 몇 명이 고부 군수로 발령을 받았지만 아무도 부임하지 않아 결국 조병갑이 1894년 1월 9일 고부 군수로 유임되었다.

조병갑이 유임되자 1월 10일 고부 농민들은 풍물패를 일으켜 사방에서 모인 군중을 정비하고 대나무로 죽창을 만들어 무장하고, 다음 날 아침 고부 관아를 기습 습격하였다. 고부 농민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이는 앞의 사발통문 서명자 20명 중 전봉준⋅최경선⋅김도삼⋅정익서(鄭益西) 등의 사전 계획과 준비에 의해 일어난 봉기였다.

농민들은 감옥을 부수고 억울하게 갇힌 죄수들을 풀어 주었고, 말목장터로 나와 만석보를 허물고 쌓아 두었던 보세미(洑稅米)를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농민들은 말목장터에서 진을 쳤다가, 나중에 백산(白山)으로 진을 옮겼다. 이후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가 동학 교인인 농민들을 잡아들이자, 농민군은 3월에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일어나 다시 고부 관아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고부 민란은 조병갑의 가렴주구로 생활이 위협받게 된 농민들이 참여한 봉기였다. 1893년 11월에 작성한 사발통문은 고부 민란의 실질적인 계획이자, 전봉준을 비롯한 민란 지도자들이 향후 자신들의 결의와 구상을 담은 비밀 지령서이기도 했다. 사발통문 거사 계획으로 일어난 고부 봉기는 이후 무장 기포(茂長起包)로 이어지는 등 본격적인 동학 농민 운동의 시발이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격문을 통해서 본 전봉준의 혁명사상」,『나라사랑』15,김용덕,외솔회,1974.
「1890년대 초반 민중의 동향과 고부민란」,『1894년 농민전쟁연구』4,배항섭,역사비평사,1994.
「고부민란의 사발통문」,『노산 유원동 박사 회갑논총』,신용하,정음사,1985.
「고부민란의 연구 상」,『한국사연구』48,정창렬,한국사연구회,1985.
「고부민란의 연구 하」,『한국사연구』49,정창렬,한국사연구회,1985.
저서
『전봉준전기』, 김의환, 정음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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