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근대동학 농민 운동

폐정 개혁 12개조

1. 인명을 함부로 죽인 자는 벨 것

2. 탐관오리는 발본해서 없앨 것

3. 횡포한 부호들을 준엄하게 응징할 것

4. 유림과 양반들의 소굴을 토벌해 없앨 것

5. 천민들의 군안(軍案)은 불지를 것

6. 종 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7. 백정의 머리에 패랭이를 벗기고 갓을 씌울 것

8. 무명잡세 등은 혁파할 것

9. 공적이고 사적인 채무를 막론하고 과거의 것은 모두 시행하지 말 것

10. 외적과 연락하는 자는 벨 것

11. 토지는 평균분작(平均分作)으로 할 것

12. 농군의 두레법은 장려할 것

오지영, 『동학사』(초고본) 3, 집강소의 행정, 1926

一. 人命을濫殺한者는버힐事

一. 貪官汚吏는祛根할事

一. 橫暴한富豪輩를嚴懲할事

一. 儒林과兩斑輩의巢窟을討滅할事

一. 賤民等의軍案은불지를事

一. 종文書는불지를事

一. 白丁의머리에페낭이를벗기고갓을씨울事

一. 無名雜稅等은革罷할事

一. 公私債를勿倫하고過去의것은竝勿施할事

一. 外賊과連絡하는者는버힐事

一. 土地는平均分作으로할事

一. 農軍의두레法은奬勵할事

吳知泳, 『東學史』(草稿本) 3, 執綱所의 行政, 1926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고종 31년) 1월 고부 지방 농민들이 수탈에 대항하여 봉기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3월 20일 무장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이후 중앙군을 물리치고 4월 27일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은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이 이끄는 관군과의 충돌에서 패배하며 관군 측에 강화를 요청하였다. 관군의 기세는 공세적이었지만 청일 양군의 상륙으로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던 정부는 이에 응하였다. 이에 5월 7일 관군과 농민군 사이에 전주 화약(全州和約)이 맺어졌다.

전주 화약의 요체는 해산하는 농민군에 대한 신변 보장과 농민군 측이 요구한 「폐정 개혁안(弊政改革案)」을 국왕에게 보고하겠다는 홍계훈의 약속이었다. 이후 농민군은 서둘러 전주성을 비워 주고 각자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전주 화약 직후 농민군의 활동이 진정된 것은 자체적 역량 부족 때문이기도 했지만, 관군과의 충돌로 청일 양군이 계속 주둔할 빌미를 제공할지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때 전봉준(全琫準, 1855~1895)전라 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27개조의 「폐정 개혁안」을 제시했는데, 현재 14개 조항이 「전봉준 판결 선고서」에 전해진다. 농민군은 또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에게도 「폐정 개혁안」 14개조를 제시하고 그 이행을 촉구하였다. 탐관오리 처벌과 수취 기관 철폐, 삼정(三政) 폐지와 개혁, 무명잡세(無名雜稅) 철폐, 도고(都賈)를 비롯한 국내 특권 상인에 대한 규탄 등 농민과 상인들의 삶과 직결된 경제적 요구가 많았다. 이들 조항들은 농민군에게 개혁이 필요한 항목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전주 화약으로 많은 농민군이 해산했으나,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농민군 지도부는 전라도 53개 군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직접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 후 전라도 감사 김학진이 집강소를 공식적으로 인정함에 따라, 그와 농민군 사이에 12조항의 「폐정 개혁안」이 합의되었다.

그 중 사회적 측면에서 신분제의 전면적 폐기를 제기했다는 점은 혁명적이다. 또한 봉건 체제의 기초인 지주제의 전면적 폐기까지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토지의 평균분작을 주장하여 궁극적으로는 농민의 토지 소유를 지향하였다. 또한 소생산자인 농민이 외국 상인의 상권 침해를 저지시키려고 한 점으로 보아 반침략에 대한 방향성도 보인다. 집강소 활동 시기 동학 농민군의 개혁 사업이 봉건적 사회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지만, 그 밑바탕에는 봉건 체제 전반에 걸친 변혁 의지와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식이 깔려 있었다.

위의 12개 조항의 「폐정 개혁안」은 오지영(吳知泳)이 쓴 『동학사』에 나온다. 그런데 초고본과 간행본의 차이가 있고,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의 기록이며, 이른바 ‘토지 평균분작(平均分作)’ 조항이 이곳에만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진위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의 「폐정 개혁안」의 기본적인 흐름 위에 있었으며, 토지 평균분작 조항도 조선 후기 실학파들의 토지 개혁 논의 등을 볼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조항이라는 견해도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갑오동학농민운동의 목표와 방향으로서의 폐정개혁안」,『민족사상』5-3,김진윤,한성대학 민족사상연구소,2011.
「동학농민군 집강소의 사회신분제 개혁과 토지개혁 정책」,『진단학보』78,신용하,진단학회,1994.
「동학군의 폐정개혁안 검토」,『역사학보』23,한우근,역사학회,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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