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근대동학 농민 운동

전봉준 공초

개국 504년 2월 초9일 동도(東徒) 죄인 전봉준의 초초문목(初招問目)

심문(問) 너의 성명은 무엇인가.

진술(供) 전봉준입니다.

……(中略)……

심문 네가 전라도 동학 수괴라 하니 과연 그런가.

진술 처음 창의(倡義)로 기포(起包)하였으나 동학 수괴라 할 것은 없습니다.

심문 너는 어느 지방에서 사람들을 모았는가.

진술 전주와 논산 땅에서 모집하였습니다.

심문 작년 3월에 고부 등지에서 민중을 모두 모았다 하니 무슨 사연으로 그리 하였는가.

진술 당시 고부 군수가 정해진 액수 외의 가렴주구가 몇 만 냥이므로 민심이 억울하여 이런 행동이 있었습니다.

심문 비록 탐관오리라고 해도 명색이 반드시 뒷일이 있을 것이니 상세히 말하라.

진술 지금 그 상세한 내용을 다 말할 수 없고 그 대략을 말하겠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의 보 아래에 보를 새로 쌓고는 가혹하게 민간에게 명령하여 상등 논에는 1두락(斗落)에 2말을 거두고 하등 논에는 1두락에 1말을 거두니 도합 세금이 700여석이었고, 백성들에게 황무지를 주어 경작해 먹는 것을 허락하면서 관에서 문서로 증빙하여 징세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정작 가을 추수기가 되자 강제로 거둔 일이요, 둘째는 부민(富民)에게 강제로 빼앗은 돈이 엽전 2만여 냥이고, 셋째는 그 아비가 일찍이 태인 군수를 한 적이 있으므로 그 아비를 위하여 비각(碑閣)을 세운다 말하고 강제로 거둔 돈은 1천여 냥이요, 넷째는 대동미(大同米)를 민간에서 징수할 때는 고운 백미(白米)로 16말에 해당하는 값을 정하여 거두어들이고 상납할 때는 거친 쌀로 바꾸어 그 차액을 착복한 일이요, 그 외에도 허다한 내용은 이루 다 적을 수 없습니다.

심문 지금 말한 것 중에 2만여 냥을 강제로 빼앗은 돈은 무슨 명목으로 하였는가.

진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어른에게 공손하지 않으며, 음란하고 잡기를 하였다는 등의 죄목을 얽어서 행하였습니다.

……(中略)……

심문 이 외에 고부 군수가 어떤 일을 하였는가.

진술 지금 말한 사건이 모두 민간에 탐학한 일일 뿐더러 보를 만들 때 다른 사람의 산에서 수백 년 된 나무를 억지로 베게 하고 보 공사에 참여한 민정(民丁)에게 한 푼의 돈도 지급하지 않고 강제로 시켰습니다.

심문 고부 군수의 성명은 누구인가.

진술 조병갑(趙秉甲)입니다.

……(中略)……

심문 기포할 때 네가 어찌 주모(主謀)가 되었는가.

진술 여러 백성들이 다 저를 추대하여 주모하라 하기에 백성들의 말에 따랐습니다.

심문 백성들이 너를 주모라고 할 때 너의 집에 왔는가.

진술 백성 수천 명이 저의 집 근처에 모인 고로 자연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심문 수천 명의 백성이 무슨 까닭에 너를 추천하여 주모가 되었는가.

진술 백성들이 비록 수천 명이라 하나 대개 어리석은 농민이요, 저는 문자를 조금 아는 연고입니다.

심문 네가 고부에 살 때 동학을 가르치지 않았는가.

진술 제가 약간의 아동을 가르쳤지만 동학을 가르친 일은 없습니다.

심문 고부 땅에는 동학이 없는가.

진술 동학도 있습니다.

심문 고부에서 기포할 때 동학이 많았는가, 억울한 백성이 많았는가.

진술 기포 당시에는 억울한 백성과 동학이 합하였으나 동학은 적고 억울한 백성이 많았습니다.

심문 기포 후에 무슨 일을 하였는가.

진술 기포 후에 황무지에서 강제로 거둔 세금을 돌려주고 관에서 쌓은 보를 철폐하였습니다.

심문 그 때는 언제인가.

진술 작년 3월 초입니다.

심문 그 후에는 무슨 일은 하였는가.

진술 그 후에는 흩어졌습니다.

심문 흩어진 후에는 무슨 일 때문에 다시 기포하였는가.

진술 그 후에 장흥 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가 안핵사(按覈使)로서 우리 고을에 와서 기포한 백성을 동학이라 통칭하고 이름을 열거하여 체포하며, 그 집을 불태우며 당사자가 없으면 처자를 잡아 살육을 일삼는 고로 다시 기포하였습니다.

심문 그러면 너는 당초에 관아에 소장을 한번 올려보지도 않았는가.

진술 처음에는 40여 명이 집단으로 소송하였지만 잡혀 갇혔고, 재차 등소하다가 60여 명이 내쫓겼습니다.

심문 집단 소송은 언제였는가.

진술 처음은 재작년 11월이고 다음은 동년 12월입니다.

심문 2차 기포는 안핵사 때문이며 그대가 주모하였는가.

진술 그렇습니다.

심문 2차 기포 후 어떤 일을 하였는가.

진술 감영의 군사 만여 명이 고부 인민을 모두 살육하려 하는 까닭에 부득이하게 접전을 벌였습니다.

심문 어디에서 접전하였는가.

진술 고부 땅에서 접전하였습니다.

……(中略)……

진술 작년 10월달 저는 전주에서 기포하고 손화중은 광주에서 기포하였습니다.

심문 다시 기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진술 그 후에 들으니 일본이 개화라 칭하고 처음부터 민간에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또 격문도 없이 군사를 이끌고 우리 도성에 들어가 야반에 왕궁을 습격하여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하기로 초야의 사족과 백성들이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마음으로 비분강개하여 의병을 규합하여 일본인과 전투하여 이런 사실을 우선 일차 따져 묻고자 함이었습니다.

심문 그 후 다시 무슨 일을 하였는가.

진술 그 후에 생각한즉, 공주 감영이 산이 험하고 하천을 끼고 있어서 지세가 뛰어나므로 이곳을 차지해 지키면 일본 병사가 쉽게 반격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공주로 들어가 일본군에게 격문을 전달하여 대치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군사가 먼저 공주를 차지하여 일의 형세상 전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차례 전투 후 10,000여 명의 군사 중에 수를 세니하니 남은 자가 불과 3,000여 명이고, 그 후 또 두 차례 전투 후 수를 세니 불과 500여 명이므로 패하여 달아나 금구에 이르러 다시 불러 모으니 수효는 조금 늘었으나 기강이 없어 다시 전투를 벌이기 몹시 어려웠습니다. 일본 군사가 뒤따르는 까닭에 두 차례 전투하다가 패해 달아나 각기 해산하였습니다.

……(中略)……

심문 재차 불러 모을 때 무슨 방책으로 규합하였는가.

진술 불러 모을 때 충의지사(忠義之士)는 같이 창의하라 하고 방을 붙였습니다.

심문 불러 모을 때 자원자만 규합하였는가 아니면 억지로 하였는가.

진술 내가 본래 거느린 4,000명은 다 자원자이고 그 외의 각지에 통문한 뜻은, 이와 같은 의거에 호응하지 않는 자는 불충(不忠)하고 무도(無道)하다 하였습니다.

……(下略)……

을미년(1895) 2월 11일 전봉준 재초문목(再招問目)

심문 네가 작년 3월에 기포한 뜻은 백성을 위하여 해가 되는 것을 없애겠다는 뜻이었다고 하니 과연 그런가.

진술 과연 그렇습니다.

심문 그렇다면 내직(內職)에 있는 자나 외임(外任)을 맡은 관원이 모두 탐학한가.

진술 내직에 있는 자가 매관매직을 일삼으나 내외를 막론하고 모두 탐학하였습니다.

심문 그렇다면 전라도 일도(一道)에서 탐학하는 관리만을 제거하자고 기포하였는가, 8도를 일체로 하려는 의향이었느냐

진술 전라도 일도의 탐학을 제거하고 내직으로 매직하는 권신(權臣)을 내쫓으면 8도가 자연히 일체가 될 것입니다.

심문 전라도 감사 이하 각읍 수령이 모두 탐학하는 관리인가.

진술 열에 여덟 아홉입니다.

심문 무슨 일을 가르켜 탐학이라 하느냐.

진술 각읍 수령이 상납이라 칭하면서 간혹 결복(結卜)에 추가로 거두며, 호역(戶役)도 마구 거두며, 다소 여유 있는 백성이 있으면 공연히 죄를 얽어 돈과 재물을 억지로 빼앗고 토지를 침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심문 내직으로 매관하는 자는 누구인가.

진술 선혜청 당상 민영준(閔泳駿), 민영환(閔泳煥), 고영근(高永根) 등입니다.

……(中略)……

심문 너와 함께 모의한 손화중, 최경선 등이 모두 동학을 몹시 좋아하는 자냐.

진술 그렇습니다.

심문 동학이라는 것은 무슨 주의이고 무슨 도학(道學)인가.

진술 마음을 지켜 충효를 근본으로 삼아 보국안민(輔國安民)하자는 일입니다.

심문 너도 동학을 몹시 좋아하는 자인가.

진술 동학은 마음을 지키고 하늘을 공경하는 도(道)이므로 몹시 좋아합니다.

……(中略)……

심문 마음을 닦고 하늘을 공경하는 도를 어찌 동학이라 하느냐.

진술 우리들은 동쪽에서 태어났으므로 동학이라 칭하나, 당초 본래의 뜻은 시작한 사람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요, 나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뒤따라 칭할 뿐입니다.

심문 동학에 들어가면 괴질을 면한다 하니 그러한가.

진술 동학 서적 중에, 과거 3년간 괴질이 있으니 하늘을 공경하고 마음을 지키면 피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심문 동학은 8도에 모두 전파하였느냐.

진술 5도는 교를 시행하였으나 서북의 3도는 알 수 없나이다.

심문 동학은 배우면 병을 피하는 것 외에 다른 이익이 없느냐.

진술 다른 이익은 없습니다.

……(中略)……

심문 재차 기포한 것을 일본 군사가 궁궐을 침범하였다고 한 까닭에 다시 일어났다 하니 다시 일어난 후에는 일본 병사에게 무슨 행동을 하려 하였느냐.

진술 궁궐을 침범한 연유를 힐문하고자 하였습니다.

심문 그러면 일본 병사나 각국 사람이 경성에 머물고 있는 자를 내쫓으려 하였느냐.

진술 그런 것이 아니라 각국인은 다만 통상만 하는데 일본인은 병사를 거느리고 경성에 진을 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 영토를 침략하는가 하고 의아해한 것입니다.

……(下略)……

동학난기록』하(국사편찬위원회, 1971), 『전봉준공초』

開國五百四年二月初九日東徒罪人全琫準初招問目

問 爾姓名爲誰

供 全琫準

……(中略)……

問 汝於何地의셔招集人衆얏느냐

供 全州地와論山地의셔招集얏니다

問 昨年三月間의古阜等地의셔民衆을都聚얏다니何事緣으로그리얏노

供 其時古阜倅가額外의苛斂이幾萬兩인고로民心이冤恨야此擧가有얏이다

問 雖曰貪官汚吏라도名色必有然後事니詳言라

供 今不可盡言其細目而其槪을略告옵다一은民洑下의築垘고勒政을로民間의傳令야上畓則一斗落의二斗稅을收고下畓則一斗落一斗稅을收니都合租가七百餘石이陳荒地을百姓의게許其耕食야官家로文券야徵稅아아다더니及其秋收時의勒收事요一은富民의게勒奪錢葉二萬餘兩이요一其父가曾經泰仁倅故로其父을爲야碑閣을建告다고勒斂錢이千餘兩이요一은大同米을民間徵收기는精白米로十六斗式準價로收斂고上納則麤米을貿야利條을沒食한事요此外許多條件은이로記得할슈읍이다

問 今所告中의二萬餘兩勒奪錢은何名目으로行얏너냐

供 以不孝不睦淫行及雜技等事罪目을搆成야行홈이오이다

……(中略)……

問 此外의는古阜倅가何等事을行얏너냐

供 금의所陳事件이다民間의貪虐일더려築垘時의他山數百年邱木을勒斫고築垘役의民丁을一錢도不給고勒役얏니다

問 古阜倅姓名은誰오

供 趙秉甲이니다

……(中略)……

問 起包時에汝가읏지主謀가되얏냐

供 衆民이다矣身을推야主謀라기의民言을依이니다

問 衆民이汝로主謀라할에汝家에至얏더냐

供 衆民數千名이矣家近處의都聚고로自然이된일이올시다

問 數千名衆民이何故로汝을推야主謀게얏느냐

供 衆民이雖曰數千名이오나皆是愚蠢農民이요矣身은文字을粗解는緣故니이다

問 汝가古阜의住接時의東學을行敎치아니얏냐

供 矣身이如干童蒙을訓導고東學은行敎일읍니다

問 古阜地의는東學이無냐

供 東學도有하니이다

問 古阜起包時의東學이多야冤民이多냐

供 起包時의冤民이며東學이合얏오東學은少고冤民은多니다

問 起包後의何事을行얏는냐

供 起包後陳荒勒徵稅을還推고自官으로築垘거슬毁破얏이다

問 其時는何時오

供 昨年三月初이니다

問 其後는何事을行얏냐

供 其後는散落야니다

問 散落後의는何事을因하야다시起包얏냐

供 其後의長與(興)府使李容泰가按覈使로本邑의來야起包人民을東學이라通稱고列名야捕捉며其家舍을燒灰며當者가(無)면妻子을捕야殺戮을行는고로다시起包얏이다

問 然則汝의가自初의官庭의一次呈狀도아니야보앗냐

供 初次의는四十餘名이等訢(訴)다가捉囚을被고再次等訢(訴)다가六十餘名驅逐을當니이다

問 等訢(訴)는何時인고

供 初次再昨年十一月再次同年十二月

……(中略)……

供 昨年十月分의矣身은全州셔起包고孫化中은光州셔起包니이다

問 시起包은何故오

供 其後에聞직貴國이開化라稱고自初로一言半辭도民間에傳布미無고檄書도업시率兵고우리都城에入야夜半에王宮을破擊야主上을驚動엿기로草野의士民더리忠君愛國之心으로慷慨을不勝야義旅을糾合야日人과接戰야此事實을一次請問 코져니이다

問 其後다시何事을行얏난고

供 其後에思量즉公州監營山阻고河을帶야地理가形勝故로此地을雄據야固守을謀즉日兵이容易히擊拔치못로公州에入야日兵의거檄을傳야相持코자야더나(니)日兵이만쟈公州을雄據야스니事勢가接戰안니슈無故로二次接戰後萬餘名軍兵을點考즉所餘者不過三千餘名이요其後二次接戰後點考즉不過五百餘名인故로敗走야金溝에至야다시招募니數爻은稍增나紀律니업셔다시開戰기極難더니日兵니隨後故二次接戰다가敗走야其各散解니이다

……(中略)……

問 再次招募時에何方策으로糾合얏냐

供 招募時忠義之士은가치倡義라고揭榜니이다

問 招募時에自願者만糾集얏냐或勒驅얏냐

供 矣身이本來所率四千名은다自願者요其外에各處의通文辭意은若此擧을應치아니는者은不忠無道라니이다

……(下略)……

乙未二月十一日全琫準再招問目

問 汝가昨年三月起包之意는民을爲야害除으로意를삼마다니果然耶아

供 果然이로쇼니다

問 然則內職居니며外任의宰한官員이다貪虐耶아

供 內職의居니가賣官鬻爵으로事를삼으나內外을勿論고다貪虐이외다

問 然則全羅一道貪虐는官吏만除자起包얏더야八道를一體로랸意向이냐

供 全羅一道貪虐을除고內職으로賣爵는權臣을屛逐면八道가自然一體로될터이오이다

問 全羅道監司以下로各邑守宰가다貪官耶아

供 十에八九이다

問 何事를指目야貪虐이라나냐

供 各邑守宰가上納이라稱고或結卜에加斂며戶役도橫徵며稍饒之民이잇시면空然이搆罪야錢財勒奪고田庄도橫侵함이非一非再외다

問 內職으로賣官者誰인고

供 惠堂閔泳駿閔泳煥高永根等이외다

……(中略)……

問 汝로同謀한孫化中崔慶善等이다東學을酷好는者냐

供 然니이다

問 東學이라는거션何主意何道學고

供 守心야忠孝로本을삼아輔國安民잔일이외다

問 汝도東學을酷好者耶

供 東學은守心敬天는道故로酷好니다

……(中略)……

問 修心敬天道을잇(엇)지東學이라稱냐

供 吾道은東에出故로東學이라稱나自初本意은始作人이分明히知得거시요矣身은他人의稱를隨야稱이외다

問 東學에投入면怪疾을免다니然냐

供 東學書中云三年怪疾이在前니敬天守心여免다여니다

問 東學의八道에다傳布여냐

供 五道은다行敎여스나西北三道은알슈업나이다

問 東學을學則病을免은外에他利益은無냐

供 他利益은엄이다

……(中略)……

問 再次起包은日兵이犯闕엿다故로再擧얏다니再擧後에日兵의거무擧措을行랴여냐

供 犯闕緣由을詰問 코지(자)미니다

問 然則日兵이며各國人이京城에留住者을驅逐랴냐

供 그러미아니라各國人은다만通商만日人은率兵야京城에留陣는故로我國境土를侵掠는가疑訝이니다

……(下略)……

『東學亂記錄』下(國史編纂委員會, 1971), 『全琫準供草』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은 1894년(고종 31년) 12월 2일 전라도 순창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 옥에 갇힌 그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과 내통한 사실 여부를 추궁 받았다. 그러나 그와 관련해 그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자백이 없자 일본 영사관 감옥으로 이감된 후 1895년(고종 32년) 3월 30일 의금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봉준은 사형되기 전 1895년 2월 9일부터, 2월 11일, 2월 19일, 3월 7일, 3월 10일까지 5차(3차 일부와 4차부터는 일본 영사가 직접 신문)에 걸쳐 일본 영사와 법부대신 서광범(徐光範, 1859~1897)의 심문을 받았는데, 이에 대한 기록이 바로 「전봉준 공초(全琫準供草)」이다. 총 274개 문항을 통해 농민 전쟁의 전개 상황과 1⋅2차 봉기 목적, 농민군의 규모, 전봉준동학 입도 의도와 농민 전쟁에서의 역할, 대원군과의 관계 등에 대해 전봉준의 증언을 접할 수 있다. 이 자료는 2월 9일과 2월 11일자 공초 기록 가운데 그 일부이다.

1894년 1월 고부 봉기와 관련해서는,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 1844~1911)의 수탈상과 전봉준이 주모자가 된 이유, 그리고 고부 봉기 당시 동학과 농민들과의 관계 등을 언급하고 있다.

3월부터 시작된 제1차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해서는, 무장 기포가 안핵사 이용태(李容泰, 1854~1922)의 동학도에 대한 탄압이 한 배경이었다는 점과 전라도 일대뿐 아니라 중앙의 매관매직하는 고위 관료들, 특히 민영준(閔泳駿, 1852~1935)을 비롯한 민씨 척족과 수탈을 일삼는 각 지방의 수령의 처단을 위한 것임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1894년 9월 2차 동학 농민 운동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으로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마음에서 일으켰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이후 전봉준의 정국 파악과 대응을 알려 주는 내용 등은 동학 농민 혁명의 전개⋅발전 과정을 파악하는 데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공초의 3~5차 대부분의 심문에서 일본 영사는 대원군과의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전봉준은 “대원군의 교시가 없더라도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행했을 뿐”이라며, 대원군의 연루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연구에서 제2차 동학 농민 운동에 대원군 세력이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전봉준은 또 동학이 충효를 근본으로 삼아 보국안민을 주의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동학의 범위가 주로 경기⋅전라⋅경상⋅충청⋅강원 등 5도에 집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전봉준 공초」는 그의 사형 판결 선고서와 함께 동학 농민 운동의 배경, 전개 과정 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 하겠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전봉준 공초의 분석-동학란의 성격 일반」,『사학연구』2,김용섭,한국사학회,1958.
「자료 해제 : 동학농민군 지휘자 전봉준 손화중 최영창 (경선(卿宣)) 판결선고서 원본」,『한국학보』11-2,신용하,일지사,1985.
「전봉준의 혁명사상 고찰-공초록을 중심으로-」,『동학연구』9⋅10,최현식,한국동학학회,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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