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근대일제의 침략과 의병 항쟁

기리노 도시아키(桐野利秋)의 정한론

지금 천하의 정세는 각국이 분쟁하고 대소 강약이 서로 병탄하여, 갑(甲)이 일어나면 을(乙)이 쓰러져 성쇠(盛衰)가 엇갈리고 있다. 이때를 당하여 우리 일본은 동양의 바다 가운데 고립되어 2500여 년 간의 국풍(國風)에 익숙하여 아직 5대주 내부의 정세를 알지 못한다. 또 국력이 쇠잔하고 군비가 공허하고 인심이 게으르고 약하여 황국(皇國) 독립의 기개가 없다. 이를 알면서 고식적으로 세월을 보낸다면 몇 년을 지나지 못해 죽어 넘어지고 뒤집혀 망해 다른 나라에 예속될 것은 분명하다. 지금 이를 떨치고 일어나 우리나라로 하여금 각국과 같이 달려 천하에 독립시키고자 한다면 오직 전투하고 공격하고 정벌하여 해외로 건너가 먼저 구주 각국 사이에 종횡무진 활동하고 위력을 비교하여 이로써 마침내 천하만국 사이에 나란히 서는 길밖에 없다. 지금 영국⋅프랑스⋅프러시아⋅러시아와 같은 각국은 서로 맞서 아직 힘을 중국⋅조선⋅만주에 미칠 여가가 없다. 이때에 우리 일본은 마땅히 그 틈을 타 중국⋅조선⋅만주로 건너가 이를 빼앗아 가져 이로써 구주 각국에 침입하는 기초를 세워야 한다.

『서남기전』제1책 상권1, 부록 제1장, 기리노 도시아키의 정한론에 관한 실화

方今宇內の狀勢, 各國分爭し, 大小强弱相倂呑し, 甲起り乙仆れ, 互に盛衰を爲す. 此時に當り, 我が日本, 東洋海中に孤立し, 二千五百有餘年の國風に慣習し, 未だ五大洲裡の狀勢を熟知せす, 又た國力衰殘, 兵備空虛, 人心惰弱, 皇國獨立の氣慨なし. 尙ほ斯の如くにして, 因循推移せば, 未だ多年ならずして, 斃踣覆滅して, 他國の屬隷となるや昭昭乎として明がなり. 今之を振起作興し, 我國をして各國と幷馳して宇內に獨立せしめんと欲するときは, 唯戰鬪攻伐して海外に渡り, 先づ歐洲各國の間に縱橫し, 威力を較し以て竟に宇內萬國に幷立するにあるのみ. 今や英佛普魯の如き各國相持して以て未だ力を支那朝鮮滿洲の間に及ばすに暇はらず. 此時に及て我日本宜しく其間に乘じ, 支那朝鮮滿洲の間に跋涉し, 之を略取し以て歐亞各國に侵入するの基を立つべし.

『西南記傳』第1冊, 上卷1, 附錄 第1章 桐野利秋の征韓論に關する實話

이 사료는 1875년(고종 12년) 사쓰마 번(薩摩藩)의 무사였던 기리노 도시아키(桐野利秋)가 동지인 이시카와 구로[石川九郞] 등과 나눈 담화의 일부로,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이 조선을 포함하여 대륙으로 진출할 것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일파의 정한론(征韓論)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정한론은 조선을 무력 침공한다는 침략적 팽창론으로 이미 에도 막부 시대에도 제기되었으나, 1868년(고종 5년) 메이지 유신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이들은 왕정복고(王政復古)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장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유업(遺業)을 계승해 대륙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1차적으로 조선을 제압함으로써 당시 서구 제국의 압박을 받고 있던 자신들의 처지를 벗어나기 위함이고, 동시에 메이지 정부를 향한 국내의 불평불만을 나라 밖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868년 일본 정부는 그들의 왕정복고를 대마도(對馬島)를 통해 조선 정부에 통고하고 양국의 국교 회복을 청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정권은 이들이 가지고 온 서계(書契)에 종래와 달리 ‘황(皇)’이나 ‘칙(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거기에 찍은 인장도 조선 정부에서 내린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접수를 거부하였다. 이후 일본 정부는 조선과의 외교를 전담해 오던 대마도로부터 그 직임을 회수하고, 1869년(고종 6년)과 1870년(고종 7년) 외무성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조선 측의 완강한 거부에 부닥쳐 타결을 보지 못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 조야에서 정한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였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1869년 “조선을 정벌하면 일본의 국위를 세계에 떨치고, 국내의 인심을 국외로 향하게 할 수 있다. ”며 정한론을 주장했다. 또한 조선에 파견됐던 외무성 관리 사다 하쿠보(佐田白茅)는 귀국 보고에서 “30개 대대의 병력만 동원하면 4로(路)로 나누어 공격해 50일 내에 정복이 가능하다. 지금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 침공을 계획하고 러시아가 호시탐탐하는데 일본이 우유부단하면 기회를 잃을 것이다. 재정 면에서도 군사비는 50일 이내 회수가 가능하며, 조선은 쌀⋅보리 등 곡물이 풍부하고 조선인을 홋카이도(北海道) 개척 사업에 전용(轉用)하면 일거양득이다. ”라며 즉시 출병을 주장했다.

1873년(고종 10년)에는 이것이 정치 문제화되자 사쓰마 번의 군벌이자 메이지 정부의 참의(參議)인 사이고 다카모리 및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외무경(外務卿)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등 강경 정한론자들은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이 해외 시찰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이고가 스스로 조선에 가서 외교적 타결을 시도하고 여의치 않으면 이를 빌미로 조선에 파병하여 무력행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9월에 귀국한 이와쿠라 등 많은 각료가 내치(內治)의 우선과 시기상조론을 들어 정한론에 반대하였다. 이후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파의 다섯 참의는 각료직을 사퇴하고, 이른바 ‘세이난(西南) 전쟁’이라는 사족(士族)의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퇴하면서 정한론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정부 내에서 이와쿠라 등이 정한론에 반대한 것은 시기와 조건의 문제 때문에 서둘러 실행하지 않겠다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정한론의 내용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1875년(고종 12년) 운요호(雲揚號)를 몰래 보내 이른바 조선군으로부터 포격 사건을 유도하고 무력 위협으로 조선의 개항을 관철시켰다(강화도 포격 사건과 강화도 조약). 이 과정은 사이고 등의 정한론 구상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근대 일본의 한국 인식」,『일본의 침략정책사연구』,박영재,역사학회,1984.
「개항이후 일본의 조선정책」,『1894년 농민전쟁연구 3』,최덕수,역사비평사,1993.
「메이지시대의 한일관계 인식과 일선동조론」,『한국민족운동사연구』37,최혜주,한국독립운동사연구회,2003.
「정한론 : 근대 일본의 침략사상과 조선정벌정책」,『한국정치외교사논총』14-1,홍순호,한국정치외교사학회,1996.
저서
『한일관계의 근대적 개편 과정』, 김흥수,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09.
『정한론과 조선 인식』, 장용걸, 보고사, 2004.
『19세기 후반의 대마주와 한일관계』, 현명철, 국학자료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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