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근대일제의 침략과 의병 항쟁

청⋅일 강화 조약(시모노세키 조약)

일청강화조약

제1조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자주독립을 훼손하는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

제2조 청국은 아래 토지의 주권 및 해당 지방의 성루(城壘)⋅병기 제조소 및 관청 소유물을 영원히 일본에 할여한다.

1. 아래의 경계 내에 있는 펑텐 성[奉天省] 남부의 땅

……(중략)……

2. 타이완 전도(全島) 및 그 부속 도서(島嶼)

3. 펑후 열도(澎湖列島), 즉 영국 그리니치(Greenwich) 동경 119도에서 120도와 북위 23도에서 24도 사이에 있는 여러 도서

제3조 앞 조항에 게재하고 부속 지도에 표시할 경계선은 본 조약 비준 교환 후 곧바로 일청 양국에서 각각 2명 이상의 경계공동획정위원을 임명하여 실지(實地)에 대해 확정하도록 한다. 그리고 만약 본 조약에 정한 곳의 경계가 지형상 혹은 시정상(施政上)에 완전하지 않으면 해당 경계획정위원은 이를 개정할 임무를 가진다. 경계획정위원은 가급적 신속히 그 임무에 종사하고 임명 후 1개 이내에 이를 종료해야 한다. 단, 경계획정위원이 개정할 곳이 있을 때에는 그 개정할 곳에 대해 일청 양국 정부에서 인정할 때까지는 본 조약에 게재하는 경계를 유지한다.

제4조 청국은 군비 배상금으로 고평은(庫平銀) 2억 냥(兩)을 일본국에 지불할 것을 약정한다.

……(중략)……

제5조 일본국에 할여된 지방의 주민으로서 위의 할여된 지방의 이외에 주거하려고 하는 자는 자유롭게 그 소유 부동산을 매각하여 퇴거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본 조약 비준 교환의 날로부터 2년간을 유예한다. 단, 이 연한이 만료됐음에도 아직 해당 지방을 떠나지 않은 주민은 일본국의 편의에 따라 일본국(신)민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일청 양국 정부는 본 조약 비준 교환 후 곧바로 각 1명 이상의 위원을 타이완 성(省)에 파견하여 성을 양도받고, 본 조약 비준 교환 후 2개월 이내에 양도를 완료한다.

6조 일청 양국 간 일체의 조약은 교전으로 인해 소멸되었으므로 청국은 본 조약 비준 교환 후 신속히 전권위원을 임명하여 일본국 전권위원과 통상 항해 조약 및 육로 교통 무역에 관한 약정을 체결할 것을 약정한다. 그리고 현재 청국과 서양 각국 간에 존재하는 제반 조약⋅장정을 일청 양국 간 제 조약의 기초로 한다. 또 본 조약 비준 교환일로부터 제 조약의 실시에 이르기까지 청국은 일본국 정부의 관리⋅상업⋅항해⋅육로⋅교통⋅무역⋅공업⋅선박 및 신민에 대하여 모두 최혜국 대우를 부여한다. 청국은 그 외에 아래의 것을 양여하되 해당 양여 사항은 본 조약 조인일로부터 6개월 후에 유효한 것으로 한다.

……(중략)……

제7조 현재 청국 내에 있는 일본국 군대의 철수는 본 조약 비준 교환 후 3개월 이내로 한다. 단, 다음 조항에 기재한 규정에 따르는 것으로 한다.

제8조 청국은 본 조약의 규정을 성실히 시행한다는 담보로써 일본 군대가 일시 산둥성[山東省]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점령하는 것을 승인한다. 그리고 본 조약에 규정한 군비 배상금의 첫 회와 그 다음 회의 불입을 완료하고 통상 항해 조약의 비준 교환을 완료한 때 청국 정부에서 위 배상금 잔액의 원금과 이자에 대하여 충분하고 적당한 약정을 수립하고 청국 해관세로 저당할 것을 승인할 경우 일본 군대는 위에서 언급한 장소에서 철수한다. 만약 또 이에 관한 충분하고 적당한 약정이 수립되지 않는 경우, 해당 배상금의 최종회 불입을 완료한 후가 아니면 철수하지 않는다. 아울러 통상 항해 조약의 비준 교환을 완료한 후가 아니면 군대를 철수하지 않는 것으로 한다.

……(중략)……

앞의 증거로서 양 제국의 전권대신은 이에 기명하여 조인한다.

메이지(明治) 28년 4월 17일, 즉 광서(光緖) 21년 3월 23일 시모노세키에서 2통을 작성한다.

대일본 제국 전권변리대신 내각총리대신 종2위 훈1등(從二位勳一等) 백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대일본제국 전권변리대신 외무대신 종2위 훈1등(從二位勳一等) 자작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대청제국 흠차두등 전권대신(欽差頭等全權大臣) 태자태부문화전대학사(太子太傅文華殿大學士) 북양대신 직예총독 1등 숙의백(肅毅伯) 이홍장(李鴻章)

대청제국 흠차전권대신 2품정대(二品頂戴) 전 출사대신(前出使大臣) 이경방(李經方)

일본 외무성, 『일본외교연표병주요문서』, 1966

日淸講和條約

第一條 淸國ハ朝鮮國ノ完全無缺ナル獨立自主ノ國タルコトヲ確認ス因テ右獨立自主ヲ損害スヘキ朝鮮國ヨリ淸國ニ對スル貢獻典禮等ハ將來全ク之ヲ廢止スべシ

第二條 淸國ハ左記ノ土地ノ主權竝ニ該地方ニ在ル城壘, 兵器製造所及官有物ヲ永遠ニ日本國ニ割與ス

 一 左ノ境界內ニ在ル奉天省南部ノ地

……(中略)……

 二 臺灣全島及其ノ附屬(諸)島嶼

 三 澎湖列島即英國「グリーンウイチ」(Greenwich) 東經百十九度乃至百三十度及北緯二十三度乃至二十四度ノ(間ニ)在ル諸島嶼

第三條 前條ニ揭載シ附屬地圖ニ示ス所ノ境界線ハ本約批准交換後直チニ日淸兩國ヨリ各二名以上ノ境界共同劃定委員ヲ任命シ實地ニ就テ確定スル所アルヘキモノトス而シテ若本約ニ揭記スル所ノ境界ニシテ地形上又ハ施政上ノ點ニ付完全ナラサルニ於テハ該境界劃定委員ハ之ヲ更正スルコトニ任スべシ. 該境界劃定委員ハ成ルべク速ニ其ノ任務ニ從事シ其ノ任命後一個年以內ニ之ヲ終了スべシ. 但(シ)該境界劃定委員ニ於テ更定スル所アルニ當リテ其ノ更定シタル所ニ對シ日淸兩國政府ニ於テ加認スル迄ハ本約ニ揭記スル所ノ境界線トスべシ

第四條 淸國ハ軍費賠償金トシテ庫平銀貳億兩ヲ日本國ニ支拂フべキコトヲ約ス

……(中略)……

第五條 日本國ヘ割與セラレタル地方ノ住民ニシテ右割與セラレタル地方ノ外ニ住居セムト欲スルモノハ自由ニ其ノ所有不動産ヲ賣却シテ退去スル(コト)ヲ得べシ其ノ爲メ本約批准交換ノ日ヨリ二個年(間)ヲ猶豫スべシ但(シ)右年限ノ滿チタルトキニ未タ該地方ヲ去ラサル住民ヲ日本國ノ都合ニヨリ日本國(臣)民ト看做スコトアルべシ

日淸兩國政府ハ本約批准交換後直チニ各一名以上ノ委員ヲ臺灣省ヘ派遣シ該省(ノ)受渡ヲ爲スべシ而シテ本約批准交換(後)二個月以內ニ右受渡ヲ完了スべシ

第六條 日淸兩國間ノ一切ノ條約ハ交戰ノ爲メ消滅シタレバ淸國ハ本約批准交換ノ後速ニ全權委員ヲ任命シ日本國全權委員ト通商航海條約及陸路交通貿易ニ關スル約定ヲ締結スベキコトヲ約ス而シテ現ニ淸國ト歐洲各國トノ間ニ存在スル諸條約章程ヲ以テ該日淸兩國間諸條約ノ基礎トナスべシ又本約批准交換ノ日ヨリ該(諸)條約ノ實施ニ至ル迄ニ淸國ハ日本(國)政府官吏商業航海陸路交通貿易工業船舶及臣民ニ對シ總テ最惠國待遇ヲ與フべシ淸國ハ右ノ外左ノ讓與ヲ爲シ而シテ該讓與ハ本約調印ノ日ヨリ六個月(ノ)後有效ノモノトス

……(中略)……

第七條 現ニ淸國版圖內ニ在ル日本國軍隊ノ撤回ハ本約批准交換(後)三個月內ニ於テスべシ但(シ)次條ニ載スル所ノ規定ニ從フべキモノトス

第八條 淸國ハ本約ノ規定ヲ誠實ニ施行スべキ擔保トシテ日本國軍隊ノ一時山東省威海衛ヲ占領スルコトヲ承認ス而シテ本約(ニ)規定シタル軍費賠償金ノ初回次回ノ拂込ヲ了リ通商航海條約(ノ)批准交換ヲ了クタリ時ニ當リテ淸國政府ニテ右賠償金ノ殘額ノ元利ニ對シ充分適當ナル取極ヲ立テ淸國海關稅ヲ以テ抵當トナスコトヲ承諾スルニ於テハ日本國ハ其ノ軍隊ヲ前記ノ場所ヨリ撤回スべシ若又之ニ關シ充分適當ナル取極立タ(サ)ル場合ニハ該賠償金ノ最終回ノ拂込ヲ終リタル時ニ非サレハ撤回セサルべシ尤通(商)航海條約ノ批准交換ヲ了リタル後ニ非ザレバ軍隊ノ撤回ヲ行ハザルモノト承知スベシ

……(中略)……

右證據トシテ兩帝國全權大臣ハ茲ニ記名調印スルモノナリ明治二十八年四月十七日即光緖二十一年三月二十三日下ノ關ニ於テ二通ヲ作ル

大日本帝國全權辨理大臣 內閣總理大臣從二位勳一等伯爵 伊藤博文 印

大日本帝國全權辨理大臣 外務大臣從二位勳一等子爵 陸奧宗光 印

大淸帝國欽差頭等全權大臣 太子太傅文華殿大學士北洋通商大臣 直隷總督一等肅毅伯爵 李鴻章 印

大淸帝國欽差全權大臣 二品頂戴前(出使大臣)大使 李經方 印

日本 外務省, 『日本外交年表並主要文書』, 1966

이 사료는 1894년(고종 31년)에 시작된 청일 전쟁을 종식시킨 청과 일본의 강화 조약인 ‘시모노세키 조약’의 일부이다. 일본은 이 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시켰으며, 광활한 영토의 할양과 막대한 군비 배상금을 받아 낼 수 있었다.

1894년 6월에 발발한 청일 전쟁은 8월 평양 전투와 황해 해전을 거치면서 일본 쪽의 우세가 드러났다. 일본은 이 여세를 몰아 압록강을 건너 10월에는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공격하였다. 위기를 느낀 청국은 전쟁을 마무리하기 전인 1895년(고종 32년) 1월 장음환(張蔭桓)을 전권대신으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산둥 반도 작전을 벌이고 있던 일본은 강화 조건을 유리하기 만들기 위해 교섭을 거부했다. 일본은 2월 중순까지 랴오둥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타이완을 침략하여 협상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다급해진 청국은 휴전을 요청하는 한편, 이홍장(李鴻章)을 전권대신으로 시모노세키로 파견했다. 일본의 전권대신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협상 중간에 이홍장이 피습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랴오난(遼南)⋅타이완(臺灣)⋅펑후(膨湖) 등의 할양과 군비 배상금 3억 냥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의 강화 조약이 3월 23일 체결되면서 청일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조약 체결 일주일 만에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함께 랴오둥 반도의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른바 삼국 간섭이었다. 이들 삼국은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점령하면 조선의 독립은 유명무실해지고 유럽 각국의 상업상 이익이 방해되어 동양 평화에 장애가 된다며 랴오둥 반도 반환의 이유를 들었다. 결국 청일 강화 조약은 당초 합의한 대로 비준되었지만, 랴오둥 반도는 1895년(고종 32년) 9월 23일 청일 간 ‘요동 환부 조약(遼東還附條約)’ 체결로 청국에 반환되었다.

청일 강화 조약 결과 일본은 조선에서 청국의 영향력을 배제시켰을 뿐만 아니라 청국에 대해 열강과 동등한 특권을 인정한 통상 조약을 체결하게 됐고, 타이완⋅펑후 열도 등에 대한 영토 분할로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했다. 특히 청국으로부터 받아 낸 군비 배상금은 금본위제 실시와 군비 확충을 위한 자금에 모두 사용하였다. 반면 청국은 삼국 간섭의 대가로 독일에게 자오저우 만(膠州灣)을 조차한 것(1897)을 시작으로 열강의 영토 분할 대상이 되고 말았다.

한편 조선은 조약 1조와 같이 청국과의 종속 관계가 완전히 폐지됨과 동시에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강화 교섭 당시 청국은 청일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자는 안을 제시했지만, 일본이 이를 거부해 청국만 조선이 독립국임을 확인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결국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내정 개혁을 요구했고, 이러한 명분 아래 청일 전쟁을 도발했음에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해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그 지배권을 확립했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청일⋅러일전쟁의 전후처리와 한국문제」,『한일관계사연구』36,조명철,한일관계사학회,2010.
저서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최문형, 지식산업사, 2001.
편저
『구한말조약휘찬』상, 국회도서관입법조사국, 국회도서관, 1964.
『청일전쟁과 조선 : 외침과 저항』, 박종근⋅박영재, 일조각, 1989.
『청일전쟁기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전략』, 왕현종 외, 동북아역사재단, 2009.
『조약으로 본 한국근대사』, 최덕수 외, 열린책들, 1989.
『청일전쟁의 재조명』,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편, 한림대학교 출판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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