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도의 여러 읍에 고하는 격문
【을미년(1895) 12월】
'격문' 관련자료
아, 우리 8도의 동포들은 차마 망해 가는 나라를 내버려 두려 하는가. 너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500년 왕조의 남겨진 백성이 아닌 자가 없는데, 나라와 집안을 위해 어찌 한두 사람의 의사(義士)가 없단 말인가. 참혹하고 슬프다. 이것이 운(運)인가 명(命)인가.
아, 우리 조선은 국초부터 모두 선왕의 법을 지켜 와 온 천하가 소중화(小中華)
로 일컬었다. 백성의 풍속은 요순의 삼대에 견줄 만하고, 유교는 정자(程子)·주자(朱子) 여러 어진 이를 스승으로 삼았으니, 아무리 어리석은 남녀라도 모두 예의의 가르침을 숭상했고 임금의 다급함에는 반드시 달려가 구원할 마음이 있었다. 옛날 임진왜란
때는 의병
을 일으킨 선비가 한없이 많았고, 병자호란
때에도 순절(殉節)한 신하가 많았다. 대체로 청나라가 침몰하고부터 다행히 우리나라만은 깨끗해졌으니, 바다 밖의 작은 땅에 불과하지만 음(陰)의 가운데서 한 가닥 양(陽)의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소중화(小中華)' 관련자료
'임진왜란' 관련자료
'의병' 관련자료
'병자호란' 관련자료
아, 통탄스럽다. 외국과 통상하는 계책이 실로 천하 망국의 근본이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문을 열고 도적을 받아들였으니 이른바 대대의 권세가는 기꺼이 왜적의 앞잡이가 되었다. 살신성인은 상소
를 올린 선비들뿐으로 소꼬리의 수치(牛後之恥)1)
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송(宋)나라를 우롱한 금(金)나라의 계책은 헤아릴 수 없고, 노(魯)나라에 남아 있던 주(周)나라의 예는 보전하기 어려웠으니, 때문에 시골에 사는 미약한 백성조차도 오직 어두운 방 속의 부녀자가 나라를 근심하는 탄식처럼 간절할 뿐이었다. 갑자기 갑오년(1894) 6월 20일 밤에 마침내 우리 조선은 삼천리 강토를 잃고 말았다. 종묘
사직
이 위기일발에 처했으니, 누가 이약수(李若水)2)
처럼 임금을 껴안으며, 고을이 모두 저들의 먹이가 되었는데도 안진경(顔眞卿)3)
처럼 군사를 모집하는 자는 보이지 않도다. 옛날 보잘것없던 고구려가 하구려(下句麗)4)
로 된 것도 오히려 수치로 여겼는데, 하물며 지금 당당한 이 나라가 소일본(小日本)이 된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상소' 관련자료
1)
소꼬리의 수치(牛後之恥) : 닭의 머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가 되지 말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약소국이 강대국을 섬기는 부끄러움을 뜻함.
'종묘' 관련자료
'사직' 관련자료
2)
중국 송나라 때 사람으로 금나라 군사에게 포로로 끌려간 흠종(欽宗)을 보호하다가 피살됨
3)
중국 당나라 말기 사람으로, 안록산(安祿山)·이희열(李希烈)의 반란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죽음.
4)
중국의 전한(前漢) 말기에 ‘고구려(高句麗)’를 낮추어 일컫던 말.
아, 저 섬나라 오랑캐(島夷)
일본
의 수령은 조약과 신의의 법리로도 애초에 말할 것조차 없거니와, 생각하건대 저 국적(國賊)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머리카락이 누구로부터 나온 것인가. 원통함을 어찌할까. 국모(國母)의 원수를 생각하며 이미 이를 갈았는데, 참혹함이 더욱 심해져 임금께서 머리를 깎이시고 의관을 찢기는 지경에 이른 데다가 또 이런 망극한 화를 당하였으니, 천지가 뒤집어져 우리가 각기 하늘에서 부여받은 본성을 보전할 길이 없게 되었다. 우리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금수로 만드니 이 무슨 일인가. 우리 부모로부터 받은 머리카락을 깎았으니 이 무슨 변괴인가.……(중략)……
무릇 여러 방면의 충의의 인사들은 모두 우리 왕조가 배양한 몸이니, 환란을 피하기는 죽는 것보다 괴로우니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찌 저들을 베는 것만 하겠는가. 이 땅은 만분의 일밖에 되지 않지만 사람은 백배의 기백을 더할 수 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으니 와신상담의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이때가 어찌나 위급한지 어육(魚肉)의 화를 면하기 어렵다. 나는 오랑캐로 변화된 자가 어떻게 세상에 설 수 있는지를 듣지 못하였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온전히 살아날 가망이 만무하니 화(禍)인지 복(福)인지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죽을 ‘사(死)’자 하나로 지표를 삼을 따름이다. 말의 피를 입에 바르고 함께 맹세함에 그 성패와 이해는 예측할 바가 아니요, 양자택일해서 이 길을 취하니 그 경중과 대소가 여기서 구분될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쏠리면 어찌 신령의 도움이 없겠는가. 나라의 운수가 다시 열리어 장차 온 세상이 영원히 맑아진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진 자에게는 대적할 자가 없다는 말을 의심치 말라. 군사 행동으로 저들을 베는 것을 어찌 기다리겠는가.
이에 감히 먼저 의병
을 일으키고서 마침내 사람들에게 이를 포고하노라. 위로 공경(公卿)에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가 애통하고 절박한 마음이 없겠는가. 지금은 참으로 위급 존망의 때이니, 각자 거적에서 잠을 자고 창을 베개 삼으면서 모두 끓는 물과 불 속으로 나갈지어다. 그리하여 기어코 온 세상이 재건되어 하늘이 다시 밝아지는 것을 볼 것이니, 이 어찌 한 나라에만 공이 되겠는가, 실로 만세에 말이 전해질 것이리라.
'의병' 관련자료
이 같이 글을 보내어 타일렀는데도 이후 혹시 영을 어기거나 태만하게 여기는 자가 있으면 곧 역적과 한 무리로 보아 단연코 군사를 일으켜 먼저 토벌할 것이다. 각자 가슴에 새기고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부디 정성을 다하여 함께 대의를 펼치도록 하자.
「격고팔도열읍」, 『의암집』 권45, 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