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근대일제의 국권 침탈과 국권 회복 운동

안중근 의사의 최후 진술

재판장 : 피고들에게 말하노니, 이번 재판도 거의 진행되어 최후의 진술만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앞에서 두 변호인에게서 상세한, 그리고 피고들에게 유익한 변론도 들었는데 이제 피고들도 할 말이 있다면 그 진술할 기회를 주겠다.

안중근 : 아직까지 나는 할 말이 많다.

재판장 : 피고는 이제까지 중복된 것을 잘 말하는데, 중복되지 않도록 순서 있게 말해 보라.

안중근 : 이틀 전 검찰관의 논고를 대강 들어 봤으나, 그 중에는 검찰관이 오해한 부분이 아주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 그 요령만을 간추려 말하고자 한다. 일례를 든다면, 하얼빈에서 검찰관이 취조할 때 내 아들에 대해서 조서를 꾸민 사실이 있었다. 이틀 전에 그 심리한 결과를 들으니, 내 사진을 내 아들에게 보이면서, “이게 네 아버지이지” 하고 물으니, “바로 내 아버지다” 하고 그 애가 대답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내가 고향을 떠난 때가 3년 전이니 바로 내 아들이 두 살 때였다. 그 후 전혀 만나본 일이 없으니 그 애가 나를 알아볼 리가 없다. 이 일례를 보더라도 그 심리가 얼마나 거칠고 엉성하며, 또한 착오가 많았는가를 입증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또 재판 자체에 관해서 한 가지를 말하겠는데, 대체로 나의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의 자격으로 한 것이 아님을 재삼 말하였으니 양해해 주었을 줄로 믿는다. 또 국제관계를 심리함에 있어 재판관을 비롯하여 통역,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본인으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한국의 변호사도 와 있고, 나의 동생도 와 있는데 왜 그들에게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는가. 변호사의 변론이나 검찰관의 논고는 모두 통역을 통해서 다만 요지만을 들려주었으나, 그 점도 나의 견해로서는 매우 미심쩍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편벽된 취급이라는 인상을 면치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에서 검찰관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론을 들으니, 모두들 이등(伊藤)의 시정방침은 완전무결한데, 내가 그것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 내용을 잘 알지 못하고 하는 말들이다. 이등의 시정방침은 결코 완비된 것이 아닐진대 어찌 오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등의 시정방침이라는 것들을 잘 알고 있으나, 이등이 한국에 주재하며 대한 정책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자세히 말할 시간이 없으므로 그 줄거리만을 말하고자 한다.

1905년에 5개 조약이 체결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보호조약인데, 그때 한국의 황제를 비롯해서 한국의 국민은 누구나 모두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등은 마치 한국 측에서 희망하여 조약을 체결한 것처럼 말했었다. 그것은 이등이 일진회를 사주하여 금전을 제공하여 그 운동을 벌이게 하고, 황제의 옥새도 없고 총리대신의 승낙도 받지 않았으며, 다만 권세로써 기만하여 5개 조약을 체결케 한 것이지, 결코 한국이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등의 대한 정책에 대하여 한국의 뜻있는 유지들은 분개한 나머지 여러 차례 황제께 상주하여 이등의 정책의 개선을 꾀한 바가 있다. 러일 전쟁 때 일본 황제의 선전 조칙에는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라고 했으므로, 한국인도 이를 매우 신뢰하여 일본과 함께 동양에 진출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그러나 이등의 정책은 정당하지가 않았던 까닭에 전국에서 폭동이 자주 일어나 하루라도 백성들이 안도의 숨을 쉴 날이 없었다. 오늘날 한국의 비참한 운명은 모두가 이등의 정책 때문이었으므로, 최익현(崔益鉉)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잡혔고, 그 후에도 방침이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으므로 한국의 선비들은 때때로 헌책(獻策)을 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런 상태 아래서 전 황제께옵서는 2명의 밀사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하시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5개조의 보호 조약이 일본 측의 폭력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서 왕의 옥새가 찍힌 것도 아니며 총리대신이 보증한 것도 아니므로 그 경위를 널리 알리자는 뜻으로 평화 회의에 참석시켰으나, 어떤 사정 때문인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이등이 다시 한국에 와서 궁중에 참내(參內)하고 있을 때, 칼로 황제를 협박하고 7개조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왕위를 폐하고 일본에 사죄하는 사신을 파견할 것이 그 7개조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국민은 상하를 막론하고 분개한 나머지 뜻을 가진 자는 배를 갈라 순국하고, 일본과 항전하기 위해서 일반 민중은 총칼을 들고 일본군에 저항하는 병란이 일어났다.

그 후 수십만의 의병이 조선 8도 도처에서 봉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황제께옵서는 일본이 한국을 정복하려는, 참으로 국가의 운명이 위급한 순간에 가만히 앉아서 굼뜨고 어리석게 방관하는 자는 백성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자라는 조칙을 내시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국 국민은 더욱더 분개하여 오늘날까지 항전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까지 역살(逆殺)당한 한국인은 10만 이상을 헤아릴 줄로 안다. 10여만 명의 한국인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으니, 이것은 본래의 소망이겠으나 사실은 이등 때문에 역살당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머리에 쇠사슬을 씌워 생살(生殺)하고 사회를 위협하기 위해 양민들에게 그 광경을 보이는 등 참역무도(慘逆無道)한 짓을 공공연히 자행하여 10여만 명을 죽인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 의병의 장교도 적지 않게 전사하였다. 이등의 정책이 그러하므로 한 사람을 죽이면 열 사람이 일어나고 열 사람을 죽이면 백 사람이 더욱 연이어 일어나기만 하였다.

따라서 이익은커녕 오히려 해독만 날로 더해 갈 뿐이니, 결국 한국에 대한 이등의 시정방침을 개선하지 않는 한 한국의 독립은 요원하며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등이란 놈은 스스로 영웅인 체하지만 사실은 간웅(奸雄)이다. 그놈은 간지(奸智)가 많아 한국의 보호가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날로 발전하는 양 신문에 떠들고 일본 천황과 그 정부에 대하여 갖은 거짓말로 속이고 있었으니, 한국 국민은 오래 전부터 이등을 증오하고 그 놈을 없애 버리고 말겠다는 적개심을 품어 왔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을 즐기려고 할지언정 죽기를 원할 자 있겠는가. 그러나 한국 국민은 하루 24시간을 도탄에 빠져 고생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아마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마음은 일본보다 훨씬 심각하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이제까지 여러 계급의 일본인과 때때로 만나서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해 본 적이 많다.

……(중략)……

이와 같이 오늘 내가 말한 여러 계급의 인사들에게 다시 물어 봐도 모두 동양의 평화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대개는 알 수 있을 줄 안다. 그와 동시에 간신 이등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한국인으로서는 자기의 친척과 지기(知己)의 죽임을 당하는 마당에 어찌 증오해 마지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내가 이등을 죽인 것도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한 것이지 결코 자객으로서 한 것은 아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친선을 저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은 바로 이등이므로, 나는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서 그를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나의 희망은 일본 천황의 취지와 같이, 동양 평화를 이루고 5대 주에도 모범을 보이고자 한 것이 그 목적한 바다. 내가 잘못하여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님을 주장하는 바이다.

재판장 : 그만하면 되지 않았는가?

안중근 : 아니 좀 더 할 말이 남아 있다. 내가 지금 말한 것처럼 이번 사건은 결코 잘못한 일이 아니므로, 오늘날 만일 일본의 천황이 한국에 대한 이등의 시정방침이 실패했음을 알게 된다면, 오히려 나를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칭찬하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나를 단지 이등을 죽인 자객으로 대우하지 않을 줄로 확신하는 바이다. 나는 아무쪼록 한국에 대한 일본의 방침이 개선되어 일본 천황이 의도한 바 있는 동양의 평화가 한일 양국 간에 영원히 유지되기를 희망해 마지않는다.

이 자리에서 한 마디 더 말해 둘 것은, 앞에서 두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광무3년(1899) 한청 통상 조약에 의해 한국인은 청나라에서 치외법권을 가지며 또한 청나라는 한국에 대하여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한국인이 해외에서 범죄를 저지를 때 아무런 명문(明文)이 없어 무죄라고 한 것은 매우 부당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사람은 모두 법률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다. 살인을 해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결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병으로서 한 것이며, 따라서 나는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라 믿고 있으므로, 생각건대 나를 국제 공법에 의해 처벌해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재판장 : 더 이상 할 말은 없는가?

안중근 : 모두 말했으니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재판장 : 그러면 오늘은 이것으로써 본 건의 심문을 끝맺기로 한다. 본 건의 판결은 다음 14일 오전 10시에 언도하기로 한다.

『나라사랑』34집, 1979

재판장 : 피고들에게 말하노니, 이번 재판도 거의 진행되어 최후의 진술만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앞에서 두 변호인에게서 상세한, 그리고 피고들에게 유익한 변론도 들었는데 이제 피고들도 할 말이 있다면 그 진술할 기회를 주겠다.

안중근 : 아직까지 나는 할 말이 많다.

재판장 : 피고는 이제까지 중복된 것을 잘 말하는데, 중복되지 않도록 순서 있게 말해 보라.

안중근 : 이틀 전 검찰관의 논고를 대강 들어 봤으나, 그중에는 검찰관이 오해한 부분이 아주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 그 요령만을 간추려 말하고자 한다. 일례를 든다면, 하얼빈에서 검찰관이 취조할 때 내 아들에 대해서 조서를 꾸민 사실이 있었다. 이틀 전에 그 심리한 결과를 들으니, 내 사진을 내 아들에게 보이면서, “이게 네 아버지이지” 하고 물으니, “바로 내 아버지다” 하고 그 애가 대답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내가 고향을 떠난 때가 3년 전이니 바로 내 아들이 두 살 때였다. 그 후 전혀 만나본 일이 없으니 그 애가 나를 알아볼 리가 없다. 이 일례를 보더라도 그 심리가 얼마나 거칠고 엉성하며, 또한 착오가 많았는가를 입증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또 재판 자체에 관해서 한 가지를 말하겠는데, 대체로 나의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의 자격으로 한 것이 아님을 재삼 말하였으니 양해해 주었을 줄로 믿는다. 또 국제관계를 심리함에 있어 재판관을 비롯하여 통역,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본인으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한국의 변호사도 와 있고, 나의 동생도 와 있는데 왜 그들에게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는가. 변호사의 변론이나 검찰관의 논고는 모두 통역을 통해서 다만 요지만을 들려주었으나, 그 점도 나의 견해로서는 매우 미심쩍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편벽된 취급이라는 인상을 면치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에서 검찰관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론을 들으니, 모두들 이등(伊藤)의 시정방침은 완전무결한데, 내가 그것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 내용을 잘 알지 못하고 하는 말들이다. 이등의 시정방침은 결코 완비된 것이 아닐진대 어찌 오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등의 시정방침이라는 것들을 잘 알고 있으나, 이등이 한국에 주재하며 대한 정책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자세히 말할 시간이 없으므로 그 줄거리만을 말하고자 한다.

1905년에 5개 조약이 체결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보호조약인데, 그때 한국의 황제를 비롯해서 한국의 국민은 누구나 모두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등은 마치 한국 측에서 희망하여 조약을 체결한 것처럼 말했었다. 그것은 이등일진회를 사주하여 금전을 제공하여 그 운동을 벌이게 하고, 황제의 옥새도 없고 총리대신의 승낙도 받지 않았으며, 다만 권세로써 기만하여 5개 조약을 체결케 한 것이지, 결코 한국이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등의 대한 정책에 대하여 한국의 뜻있는 유지들은 분개한 나머지 여러 차례 황제께 상주하여 이등의 정책의 개선을 꾀한 바가 있다. 러일 전쟁 때 일본 황제의 선전 조칙에는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라고 했으므로, 한국인도 이를 매우 신뢰하여 일본과 함께 동양에 진출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그러나 이등의 정책은 정당하지가 않았던 까닭에 전국에서 폭동이 자주 일어나 하루라도 백성들이 안도의 숨을 쉴 날이 없었다. 오늘날 한국의 비참한 운명은 모두가 이등의 정책 때문이었으므로, 최익현(崔益鉉)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잡혔고, 그 후에도 방침이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으므로 한국의 선비들은 때때로 헌책(獻策)을 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런 상태 아래서 전 황제께옵서는 2명의 밀사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하시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5개조의 보호조약이 일본 측의 폭력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서 왕의 옥새가 찍힌 것도 아니며 총리대신이 보증한 것도 아니므로 그 경위를 널리 알리자는 뜻으로 평화 회의에 참석시켰으나, 어떤 사정 때문인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이등이 다시 한국에 와서 궁중에 참내(參內)하고 있을 때, 칼로 황제를 협박하고 7개조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왕위를 폐하고 일본에 사죄하는 사신을 파견할 것이 그 7개조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국민은 상하를 막론하고 분개한 나머지 뜻을 가진 자는 배를 갈라 순국하고, 일본과 항전하기 위해서 일반 민중은 총칼을 들고 일본군에 저항하는 병란이 일어났다.

그 후 수십만의 의병이 조선 8도 도처에서 봉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황제께옵서는 일본이 한국을 정복하려는, 참으로 국가의 운명이 위급한 순간에 가만히 앉아서 굼뜨고 어리석게 방관하는 자는 백성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자라는 조칙을 내시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국 국민은 더욱더 분개하여 오늘날까지 항전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까지 역살(逆殺)당한 한국인은 10만 이상을 헤아릴 줄로 안다. 10여만 명의 한국인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으니, 이것은 본래의 소망이겠으나 사실은 이등 때문에 역살당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머리에 쇠사슬을 씌워 생살(生殺)하고 사회를 위협하기 위해 양민들에게 그 광경을 보이는 등 참역무도(慘逆無道)한 짓을 공공연히 자행하여 10여만 명을 죽인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 의병의 장교도 적지 않게 전사하였다. 이등의 정책이 그러하므로 한 사람을 죽이면 열 사람이 일어나고 열 사람을 죽이면 백 사람이 더욱 연이어 일어나기만 하였다.

따라서 이익은커녕 오히려 해독만 날로 더해 갈 뿐이니, 결국 한국에 대한 이등의 시정방침을 개선하지 않는 한 한국의 독립은 요원하며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등이란 놈은 스스로 영웅인 체하지만 사실은 간웅(奸雄)이다. 그놈은 간지(奸智)가 많아 한국의 보호가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날로 발전하는 양 신문에 떠들고 일본 천황과 그 정부에 대하여 갖은 거짓말로 속이고 있었으니, 한국 국민은 오래 전부터 이등을 증오하고 그 놈을 없애 버리고 말겠다는 적개심을 품어 왔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을 즐기려고 할지언정 죽기를 원할 자 있겠는가. 그러나 한국 국민은 하루 24시간을 도탄에 빠져 고생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아마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마음은 일본보다 훨씬 심각하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이제까지 여러 계급의 일본인과 때때로 만나서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해 본 적이 많다.

……(중략)……

이와 같이 오늘 내가 말한 여러 계급의 인사들에게 다시 물어 봐도 모두 동양의 평화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대개는 알 수 있을 줄 안다. 그와 동시에 간신 이등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한국인으로서는 자기의 친척과 지기(知己)의 죽임을 당하는 마당에 어찌 증오해 마지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내가 이등을 죽인 것도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한 것이지 결코 자객으로서 한 것은 아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친선을 저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은 바로 이등이므로, 나는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서 그를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나의 희망은 일본 천황의 취지와 같이, 동양 평화를 이루고 5대 주에도 모범을 보이고자 한 것이 그 목적한 바다. 내가 잘못하여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님을 주장하는 바이다.

재판장 : 그만하면 되지 않았는가?

안중근 : 아니 좀 더 할 말이 남아 있다. 내가 지금 말한 것처럼 이번 사건은 결코 잘못한 일이 아니므로, 오늘날 만일 일본의 천황이 한국에 대한 이등의 시정방침이 실패했음을 알게 된다면, 오히려 나를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칭찬하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나를 단지 이등을 죽인 자객으로 대우하지 않을 줄로 확신하는 바이다. 나는 아무쪼록 한국에 대한 일본의 방침이 개선되어 일본 천황이 의도한 바 있는 동양의 평화가 한일 양국 간에 영원히 유지되기를 희망해 마지않는다.

이 자리에서 한 마디 더 말해 둘 것은, 앞에서 두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광무3년(1899) 한청 통상 조약에 의해 한국인은 청나라에서 치외법권을 가지며 또한 청나라는 한국에 대하여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한국인이 해외에서 범죄를 저지를 때 아무런 명문(明文)이 없어 무죄라고 한 것은 매우 부당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사람은 모두 법률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다. 살인을 해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결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병으로서 한 것이며, 따라서 나는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라 믿고 있으므로, 생각건대 나를 국제공법에 의해 처벌해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재판장 : 더 이상 할 말은 없는가?

안중근 : 모두 말했으니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재판장 : 그러면 오늘은 이것으로써 본 건의 심문을 끝맺기로 한다. 본 건의 판결은 다음 14일 오전 10시에 언도하기로 한다.

『나라사랑』34집, 1979

이 사료는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사건에 대한 1910년(대한제국 융희 4년) 2월 12일 제5차 공판에서 이루어진 안중근의 최후 진술이다. 안중근은 자신의 저격이 정당한 행동임을 역설하였다. 다음의 세 가지가 핵심이다. 첫째, 재판 자체가 공정하지 않다는 것, 둘째, 이토를 오해하여 죽였다는 설에 대한 강한 반박, 셋째, 한국의 의병 중장으로 이토를 죽였으므로 국제 공법에 따라 자신을 처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비중을 두어 설명한 것은 두 번째 ‘오해에 의한 이토 저격설’에 대한 반박이었다.

그는 이토가 체결한 을사조약과 정미 7조약(丁未七條約)이 무력을 동원해 한국 황제를 강박한 결과임을 강조하고, 이에 따라 많은 한국인이 저항하여 그 과정에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으며, 결국 이토의 시정 방침을 시정하지 않는 한 한국의 독립은 요원하고 전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곧 안중근은 최후 진술에서 자신의 의거는 오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토의 정책을 간파하고 행한 정치적 사건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1909년(융희 3년)에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그는 아버지를 따라 동학군 진압에 참가하고,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석탄회사를 경영하고, 학교를 인수하여 이른바 애국 계몽 운동에 참여하는 등, 한말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고 적극적으로 반응한 청년이었다.

안중근은 1907년(융희 1년) 7월 북간도로 망명하였다가 곧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 간도 시찰사 이범윤(李範允, 1856~1940) 등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때 전제덕(全齊德)이 300명 규모의 의병 부대를 조직하자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안중근은 엄인섭과 함께 1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하였지만, 회령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기도 하였다.

안중근은 1909년 3월, 노브키에프스크 카리에서 엄인섭⋅황병길(黃丙吉) 등 11명의 동지와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구국 투쟁을 벌일 것을 맹세하였다. 마침 안중근 일행은 블라디보스토크 언론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프체프(Kokovsev)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과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河)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 동안 열차 회담을 마치고 9시 30분경 열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일본인으로 가장한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 이토를 사살하고 그 외 하얼빈 일본 총영사 등 일본인 3명에게도 중상을 입혔다.

저격 직후 안중근은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된 후 곧바로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일본의 관동도독부 휘하의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다. 일본은 안중근에 대한 조사를 강도 높게 진행하였다. 관동도독부 지방 법원 검찰관이 11회에 걸친 신문하였고, 조선에서 파견된 통감부 소속 경찰관이 12회에 걸친 신문을 진행하였다. 일본 외무성에서 파견된 정무국장 구라치 데츠키치(倉知鐵吉)는 전체 재판을 조율하기 위해 여순으로 왔다. 당시 일본 정부는 만주 문제를 두고 러시아와 타협을 통해 미국과의 갈등에 대처하였다. 특히 한국 병합을 앞두고 안중근 의거를 계기로 항일 의병 투쟁이 고양되거나 일본 내에서 강경 여론이 격화될 것을 우려해 한국 병합 실무 기획자였던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치를 파견해서 재판을 조율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구라치가 여순에 온 이후부터는 안중근이토를 오해하여 개인적인 감정에서 살해한 반인도적 범죄라는 시각에서 신문하였다.

관동도독부 지방 법원은 1910년 2월 7일부터 2월 14일까지 6회의 형식적인 공판을 한 후 2월 14일 사형을 판결하고 3월 26일 형을 집행하였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한⋅중⋅일 3국의 평화 유지를 위해 공동 군항과 평화 회의, 공동 화폐 제작과 은행 설립 등을 주장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또 자서전 격인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를 집필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안중근의 사상과 의병운동」,『한국사학』2,신용하,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0.
「한중근 사상연구-의병론과 동양평화론을 중심으로」,『민족문화』3,윤경로,민족문화추진회,1986.
「한중근의거에 대한 각국의 동향과 신문논조」,『한국민족운동사연구』30,이상일,한국독립운동사연구회,2002.
「안중근의 하얼빈거사와 공판투쟁(2)-외무성관리 통감부 파견원의 신문과 불공정한 재판 진행에 대한 투쟁을 중심으로」,『덕성여대논문집』33,한상권,덕성여자대학교,2004.
「안중근의 하얼빈거사와 공판투쟁(1)-검찰관과의 논쟁을 중심으로」,『역사와현실』54,한상권,한국역사연구회,2004.
「일본정부의 안중근 재판 개입과 그 불법성」,『사학연구』96,한성민,한국사학회,2009.
저서
『안중근의 민족운동 연구』, 신운용,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한중근의 생애와 구국운동』, 장석흥,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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