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근대다양하게 전개된 민족 운동

근우회 강령

여성에 대한 일체 차별 폐지

조혼 폐지와 결혼의 자유

근우회(槿友會) 행동 강령

시내 근우회 본부에서는 지난 23일 위원회를 열고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각지의 지회(支會)는 시급히 대의원 명부 및 조사표를 송부할 것.

본부 제출 의안

- 회원 교양에 관한 건

- 회관 건축에 관한 건

- 기관지 속간(續刊)에 관한 건

- 회기(會旗) 및 마크에 관한 건

- 행동 강령 제정에 관한 건

행동 강령

1.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인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다.

2. 일체의 봉건적인 인습과 미신을 타파한다.

3. 조혼을 폐지하고 결혼의 자유를 확립한다.

4. 인신매매 및 공창(公娼)을 폐지한다.

5. 농민 부인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한다.

6. 부인 노동의 임금 차별을 철폐하고 산전 및 산후 임금을 지불하도록 한다.

7. 부인 및 소년공(少年工)의 위험 노동 및 야근을 폐지한다.

〈동아일보〉, 1929년 7월 25일

女性에對한一切差別撤廢

조혼폐지와결혼의자유

槿友會行動綱領

시내근우회(槿友會)본부에서는지난이십삼일위원회를열고다음과가튼결의를하얏다더라

一. 各地支會는時急히代議員名簿及調査表를附送할 것

本部提出議案

▲會員敎養에關한件▲會舘建築에關한件▲機關紙續刊에關한件▲會旗及막크에關한件▲行動綱領制定에關한件

行動綱領

一. 女性에對한社會的法律的一切差別撤廢

二. 一切封建的因習과迷信打破

三. 早婚廢止及結婚의自由

四. 人身賣買及公娼廢止

五. 農民婦人의經濟的利益擁護

六. 婦人勞働의賃金差別撤廢及産前産後賃支拂

七. 婦人及少年工의危險勞働及夜業廢止

〈東亞日報〉, 1929年 7月 25日

1919년 3⋅1 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간 후 한국의 여성 운동은 교육 운동, 민족경제 진흥 운동, 종교계 여성 단체를 통한 신앙 운동이나 생활 향상 계몽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여성 운동은 1924년에 사회주의적 성향이었던 조선여성동우회가 조직된 뒤부터 민족주의적 방향과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여성운동 외에 다른 사회운동 전반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한편 분열된 국내외의 항일 민족 운동을 통합해 보다 강력한 민족 운동으로 추진하기 위해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으며, 여성계에서도 여성 운동 통합론이 일어나 마침내 1927년 5월에 근우회가 조직되었다. 창립 취지는 “과거의 여성 운동은 분산적이었으므로 통일된 조직도 없고, 통일된 목표나 지도 정신도 없어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므로, 여성 전체의 역량을 견고히 단결하여 새로운 여성 운동을 전개하려는 것”이었다. 신간회와 마찬가지로 여성 운동 분야에서 좌우합작을 이뤄냄으로써 보다 통일적이고 전체적인 여성 운동을 이뤄 내자는 취지였다. 강령은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 향상이었다. 운동 목표로는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나는 여성 자신의 해방과 일제 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양대 방향이 제시되었다.

근우회 조직은 본부와 지회로 나뉘며 본부에는 서무부⋅재무부⋅선전조직부⋅교양부⋅조사부⋅정치연구부 등을 두어 중추부로서의 기능을 하게 했다. 지회에도 본부와 비슷한 부서를 두고 활동하되 각 지회의 특수성에 따라 학생부⋅출판부 등이 추가되는 곳도 있었다. 지회의 활동은 근우회의 강령과 목적의 범위 안에서 그 지역 사회에 알맞도록 자치적으로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활동은 매년 1회씩 개최되는 전국 대회에 보고하여 평가되었다.

근우회의 활동 및 주요 사업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선전 및 조직 강화를 위한 활동으로, 매월 15일을 선전일로 정해 회원의 가정 방문, 여성 문제 토론회 및 각종 강연회 개최 등을 통해 조직을 강화하였다. 둘째는 교양부 중심의 여성 계몽 운동으로, 부인 강좌와 순회 강연, 각 지회에서의 야학 운동 등으로 여성들의 문맹을 퇴치하고, 여성으로 하여금 남녀평등의 사회 의식과 자주적 민족 의식을 깨우치도록 했다. 셋째는 사회 운동의 실태 조사와 참가로, 1927년 6월 숙명 여자고등보통학교의 동맹 휴학 사건과 그해 11월 중앙 고등보통학교의 동맹 휴학 사건, 12월 제일 고등보통학교의 동맹 휴학 사건 등을 조사하였다. 넷째는 해외 동포의 구호를 위한 각종 모금 운동 및 회원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일로서, 관북 지방의 수재민 구호 모금 운동, 경상도 일대 한재민 구호 대책 등이 그것이다.

한편 1929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된 제2회 전국 대회에서는 기존의 운동을 정리하며 구체적인 행동 강령이 새롭게 채택되었다. 이 전국 대회에 제출하기 위해 미리 작성된 의안을 보도한 것이 바로 본 사료이다. 여기에는 교육의 성별 차별 철폐 및 여자의 보통교육 확장, 여성에 대한 봉건적⋅사회적⋅법률적 일체 차별의 철폐,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조혼 폐지 및 혼인⋅이혼의 자유, 인신매매 및 공창 폐지, 농민 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부인 노동자의 임금 차별 철폐 및 산전⋅산후 2주 간의 휴양과 임금 지불, 부인 및 소년 노동자의 위험 노동 및 야간작업 폐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강령은 근대적 ‘현모양처’를 강조했던 식민지 여성 정책에 대한 도전이었다. 특히 남성 중심적 가족 구조 안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제고하는 것 외에 노동하는 주체로서 여성의 노동권을 확립하려는 것은 일제의 식민 정책에 실제적인 위협이 되었으며,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강력하게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 이유는 1928년부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등을 중심으로 기독교 여성 운동을 추진했던 인물들이 근우회에서 퇴진하여 근우회가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독무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 등 사회주의에 입각한 여성 운동이 활발해져서 운동의 노선에 대한 갈등이 일어났으며, 여성 노동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이러한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러한 경향이 지속되자 1930년부터 근우회 운동에 대한 자체 비판이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각 지회 간의 연계가 점차 무너져 갔다. 1931년 2월 주을지회(朱乙支會)에서 처음으로 해체론이 제기된 이래 부산⋅북청⋅신의주 등지에서도 논의가 거듭되어, 끝내 정식 해산 발표도 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920年代 여성운동에서의 협동전선론과 근우회」,『한국사론』25,남화숙,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91.
「한국 기독교 여성들의 근우회 탈퇴 배경에 관한 연구」,『한국기독교와 역사』8,윤정란,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1998.
「근우회를 통해 본 일제시기 사회주의 여성의 여성운동론」,,장인모,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07.
저서
『(근⋅현대사 속의 여성 30인의 삶을 통해 보는) 인물여성사 1 한국편』, 박석분, 새날, 1994.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 :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넘어서』, 신기욱, 삼인, 2006.
『한국여성정치사회사 1 개화기-1945년』, 전경옥,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소, 2004.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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