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구국선언
오늘로 3·1절 쉰일곱 돌을 맞으면서 우리는 1919년 3월 1일 전 세계에 울려 퍼지던 이 민족의 함성, 자주독립을 부르짖던 그 아우성이 쟁쟁히 울려와서 이대로 앉아있는 것은 구국선열들의 피를 땅에 묻어버리는 죄가 되는 것 같아 우리의 뜻을 모아 ‘민주구국선언’을 국내외에 선포하고자 한다.
8·15해방의 부푼 희망을 부수어 버린 국토 분단의 비극은 이 민족에게 거듭되는 시련을 안겨 주었지만 이 민족은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6·25동란의 피해를 딛고 일어섰고, 4·19학생의거로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가슴 가슴에 희생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 민족은 또다시 독재정권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다. 삼권분립은 허울만 남고 말았다. 국가안보라는 구실 아래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날로 위축되어 가고 언론의 자유와 학원의 자주성은 압살당하고 말았다.
현 정권 아래서 체결된 한일협정은 이 나라의 경제를 일본경제에 완전히 예속시켜 모든 산업과 노동력을 일본경제침략의 희생제물로 만들어 버렸다.
……(중략)……
이리하여 이 민족은 목적의식과 방향감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고 총파국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여·야의 정치적인 전략이나 이해를 넘어 이 나라의 먼 앞길을 내다보면서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1.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민주주의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구실로도 민주주의가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이북 공산주의 정권과 치열한 경쟁에 뛰어든 이 마당에 우리가 길러야 할 힘은 민주 역량이다. 국방력도 경제력도 길러야 하지만 민주 역량의 뒷받침이 없을 때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 ……(중략)……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해서’보다는 ‘국민에게서’가 앞서야 한다. 무엇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좋으냐는 판단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중략)……
첫째로 우리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곧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다가 투옥된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한다. 국민의 의사가 자유로이 표명될 수 있도록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를 국민에게 돌리라고 요구한다.
둘째로 우리는 유신헌법으로 허울만 남은 의회정치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로이 표현되는 민의를 국회는 입법에 반영시켜야 하고 정부는 이를 행정에 반영시켜야 한다. 이것을 꺼리고 막는 정권은 국민을 위한다면서 실은 국민을 위하려는 뜻이 없는 정권이다.
셋째로, 우리는 사법권의 독립을 촉구한다. 사법권의 독립 없이 국민은 강자의 횡포에서 보호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법부를 시녀로 거느리는 정권은 처음부터 국민을 위하려는 뜻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2.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경제발전이 국력배양에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렇다고 경제력이 곧 국력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 정권은 경제력이 곧 국력이라는 좁은 생각을 가지고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경제발전에 전력을 쏟아왔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국민경제의 수탈을 발판으로 한 수출산업은 1974년, 1975년 두 해에 40억불 이라는 엄청난 무역적자를 내었고, 그 적자폭은 앞으로 줄어들 가망이 없다. 1975년 말 현재 우리나라의 외채 총액은 57억 8천만 불에 이르렀다. 차관기업들이 부실기업으로 도산하고 난 다음 이 엄청난 빚은 누구의 어깨에 매어질 것인가?
……(중략)……
사태가 이에 이르고 보면 박정권은 책임을 지고 물러날밖에 다른 길이 없다. 경제파국을 미연에 방지하여 국제사회에서 아주 신임을 잃지 않도록, 차관상환의 유예를 차관 국가들과 은행들에 요청하기 위해서라도 정권교체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중략)……
3.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지상의 과업이다.
국토 분단의 비극은 해방 후 30년 동안 남과 북에 독재의 구실을 마련해 주었고 국가의 번영과 민족의 행복, 창조적 발전을 위해서 동원되어야 할 정신적, 물질적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 외국의 군사원조 없이 백만을 넘는 남북한의 상비군을 현대 무기로 무장하고 이를 유지한다는 것은 한반도의 생산력과 경제력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은 우리의 문화창조에 동원되어야 할 이 겨레의 슬기와 창의가 파괴적으로 낭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민족통일은 지금 이 겨레가 짊어진 지상의 과업이다. 5천만 겨레의 슬기와 힘으로 무너뜨려야 할 장벽이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민족통일을 저희들의 전략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용한다거나 지지한다면 이는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이것이야말로 통일된 민족으로 정의가 실현되고 인권이 보장되는 평화스런 나라와 국민으로 국제사회에서 어깨를 펴고 떳떳이 살게 하는 일이다.
민주주의 만세!
1976년 3월 1일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민주 구국 선언」, 1976년 3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