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삼국 이전여러 나라의 경제 활동

삼한의 농경 생활

마한(馬韓)은 서쪽에 위치해 있다. 그 백성은 토착 생활을 하였고, 곡식을 심었으며, 누에를 치고 뽕나무를 가꿀 줄 알았으며, 면포(綿布)를 생산하였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변진(弁辰)은]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五穀)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였다. 누에를 치고 뽕나무를 가꿀 줄 알아 비단과 베를 제작하였다. 소와 말을 탈 줄 알았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 曉蠶桑, 作縑布. 乘駕牛馬.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이 사료는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의 일부로, 삼한(三韓)의 농경 생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사료에 따르면 마한(馬韓)은 토착(土着), 즉 정착 생활을 하였고, 농사를 지었으며, 면포(綿布)를 생산하였다. 그리고 변진(弁辰), 즉 변한(弁韓)에서는 보리⋅조⋅콩⋅기장⋅쌀⋅삼[麻] 등 오곡(五穀)을 비롯한 각종 곡물을 재배하였고, 특히 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변한과 서로 뒤섞여 살면서 의식주 문화가 같아 서로 구분이 어려웠던 진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삼한의 벼농사는 대부분 논[水田]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역에 따라서 밭벼[陸稻]도 경작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삼한에서 농업이 이루어진 것은 청동기 시대 이후 농경 기술의 발전에 따른 결과였다. 이 지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점차 철기가 보급되어 다양한 종류의 농기구가 생산되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외날 따비⋅판상 철부⋅사다리꼴 주조 괭이⋅단조 철부(갈이 농구)⋅낫 등이 출현하였고, 2세기 후반부터 U자형 따비, 쇠스랑과 같이 경지를 갈고 개간하는 기경구(起耕具)가 사용되었다. 이로써 삼한의 농업 생산력은 크게 증대될 수 있었다.

또한 이 사료를 보면 삼한은 모두 누에를 치고 뽕나무를 가꿀 줄 알아 비단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비단은 고급 옷감으로 삼한의 지배층이 소비하였는데, 그 중의 일부는 한(漢)나라의 군현(郡縣)을 비롯한 주변 지역과 교역하는 데 활용되었다고 추정된다.

이처럼 삼한은 농경을 기반으로 한 사회로, 철기의 보급과 함께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있었다. 농업 생산력의 발전으로 삼한 사회에는 잉여 생산물이 축적되어 사회 분화가 촉진되었고, 이는 결국 정치 권력이 출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농경의 발전과 고대사회」,『한국고대사 연구의 새 동향』,김재홍,서경문화사,2007.
저서
『삼한사회형성과정연구』, 이현혜, 일조각, 1984.
『한국 고대의 생산과 교역』, 이현혜, 일조각, 1998.
편저
「삼한의 정치와 사회」, 이현혜, 국사편찬위원회, 1997.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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