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삼국 시대삼국의 농업생산력 발전

신라의 수전 확대와 농업 생산력의 발전

땅이 매우 비옥하여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을 수 있다. 오곡(五穀)⋅과일⋅채소⋅새⋅짐승 (등의) 물산(物産)은 대략 중국과 같다.

『수서』권81, 「열전」46 동이열전 신라전

기축년(329)에 처음으로 벽골제(碧骨堤)를 쌓았다. 둘레가 △7026보이고, △△가 166보이며 논(水田)은 1만 4070△이다.

삼국유사』권1, 「왕력」1 제십육걸해이질금

(홀해이사금) 21년(330)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를 만들었는데, 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

『삼국사기』권2, 「신라본기」2 흘해이사금 21년

(눌지마립간) 13년(429) 시제(矢堤)를 새로 쌓았는데 둑의 길이가 2170보였다.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13년

(지증마립간) 3년(502) 봄 2월에 명령하여 순장(殉葬)을 금하였다.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금한 것이다. ……(중략)…… 3월에 주주(州主)와 군주(郡主)에게 각각 명하여 농사를 권장케 하였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갈이를 하였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3년

(법흥왕) 18년(531) 봄 3월에 담당 관청[有司]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8년

田甚良沃, 水陸兼種. 其五穀⋅果菜⋅鳥⋅獸物産, 略與華同.

『隋書』卷81, 「列傳」46 東夷列傳 新羅傳

己丑始築碧骨堤. 周□万七千二十六歩, □□百六十六歩, 水田一万四千七十□.

『三國遺事』卷1, 「王曆」1 第十六乞解尼叱今

二十一年,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歩.

『三國史記』卷2, 「新羅本紀」2 訖解尼師今 21年

十三年, 新築矢堤, 岸長二千一百七十歩.

『三國史記』卷3, 「新羅本紀」3 訥祗麻立干 13年

三年春二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中略)…… 三月, 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智證麻立干 3年

十八年春三月, 命有司修理隄防.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法興王 18年

이 사료는 4세기경 신라의 저수지와 제방의 축조와 관련한 기사로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었음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전근대 국가에서 농업은 매우 중요하여, 국가별로 농업 생산력을 증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수서(隋書)』 신라전(新羅傳)에 의하면 신라는 땅이 매우 비옥하여 논농사를 지을 수도 있었고 밭농사를 지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 중기 단계에 이르러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논농사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밭농사와 더불어 논농사를 병행하면서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었다. 삼국시대 초기만 하더라도 밭농사가 크게 우세한 가운데 논농사가 점차 확대되고 보급되는 추세였다. 다만 논의 입지 조건은 배수와 관개시설의 축조 및 토목 기술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시기가 올라갈수록 토목 기술 수준은 미약할 수밖에 없어서, 물을 대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저습지 주변에서 주로 논농사가 이뤄졌다.

하지만 4세기에 접어들어 삽과 가래 등의 철제 공구가 보급되고 저수지가 축조되었다. 이전만 하더라도 저수지나 제방의 축조와 관련한 기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삼국유사』 걸해이사금(乞解尼叱今)조를 살펴보면 기축년인 329년(홀해왕 20년) 처음으로 벽골제(碧骨堤)를 쌓았는데, 둘레가 △7026보고 논[水田]은 1만 4070△라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21년(330)조에는 이와 달리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를 만들었고 둑의 길이는 1800보에 이르렀다고 한다. 양자 사이에는 1년이라는 시간차도 있지만 무엇보다 저수지의 둘레, 다시 말해 둑의 길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고려 시대의 상황을 전하는 것이라 이해하기도 하는데, 여하튼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처럼 4세기 전반 벽골제의 축조를 통해 상당량의 논을 확보했던 점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밖에도 눌지마립간 13년(429)에 길이 2170보의 시제(矢堤)를 쌓았다는 기록과 법흥왕 18년(531)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토록 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단지 저수지를 만들었다거나 제방을 쌓았다는 등의 지극히 단편적인 내용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저수지나 제방 등을 축조하게 되면 주변의 경작지를 논으로 개간하는 데 보다 유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뭄에도 안정적으로 농업용수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저수지 축조 기사는 단순히 저수지를 만드는 데 국한된 것이 아니라 논의 확대와 더불어 배수나 관개시설의 확충까지도 그 이면에 담고 있는 셈이다.

기왕의 연구에 의하면 밭[旱田]에 볍씨를 뿌리는 경우에는 뿌리가 깊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가뭄이 들면 곧 벼가 말라 버리는 반면, 볍씨를 논[水田]에 뿌리면 상대적으로 뿌리가 깊이 들어가기 때문에 가뭄이 들더라도 그 피해는 덜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논의 확대는 단위 면적당 수확량의 증대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나아가 저수지나 제방의 축조는 곧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직결되었다고 하겠다.

농업 생산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또 다른 방편은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3년(502)조에 실려 있다. 당시 지증왕이 명을 내려 순장을 금지시키는 한편 농사를 권장케 하고, 동시에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갈이를 하였다는 것 역시 농사의 효율성 제고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논의 확대 등을 통해 경작지를 늘리는 한편, 늘어난 경작지를 집약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노동력 확보와 가축의 동원이라는 방안까지 고안하여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농업 생산력을 극대화시켰던 것이다.

신라는 농업 생산력을 증대하기 위해 저수지와 제방의 축조 등을 통해 안정적으로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561년(진흥왕 22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국보 제33호)」에 중국에는 없고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는 논을 의미하는 ‘답(沓)’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4세기 이래 논의 확대를 위해 노력한 것이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두었음을 의미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신라의 ‘수륙겸종’ 농업에 대한 고찰-‘회환농법’과 관련하여-」,『한국사연구』94,김기흥,한국사연구회,1996.
「선사⋅고대 논의 관개시설에 대한 검토」,『호남고고학보』18,김도헌,호남고고학회,2003.
저서
『한국 고대 농업기술사 연구-철제 농구의 고고학-』, 김재홍, 도서출판 고고, 2011.
『한국 고대의 생산과 교역』, 이현혜, 일조각, 1998.
『한국고대사회경제사』, 전덕재, 태학사, 2006.
편저
「한국 고대 국가의 형성과 관개 수리의 역할」, 강봉원, 대구사학회 외 편, 주류성, 2009.
「김제 벽골제의 성격과 축조시기 재론」, 성정용, 계명사학회 편, 계명대학교 출판부, 2007.
「경제」, 전덕재, 국사편찬위원회, 2003.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