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삼국 시대삼국의 수취제도와 역역

식읍과 녹읍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禮)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4 법흥왕 19년

[法興王] 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法興王 19年

이 사료는 금관가야(金官伽倻)가 신라로 투항한 사실과 함께 신라에서 투항 세력을 어떻게 대우하였는지를 보여 주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이다.

금관가야는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 지역에 있었는데,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하였다. 금관가야는 가야 연맹(加耶聯盟)의 중심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지만, 신라와의 경쟁에서 밀리며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대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이 사료에서 보이는 것처럼 금관가야의 국주(國主), 즉 국왕이었던 김구해(金仇亥)는 왕실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는데, 이에 신라는 금관가야의 왕실을 신라의 진골 귀족에 편입시켰다. 그리하여 이후 김무력(金武力)⋅김유신(金庾信, 595~673)으로 대표되는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은 무열왕계(武烈王系)와 결합하여 삼국 통일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편입된 이후 금관가야 왕실의 경제적 기반과 관련해서는 식읍(食邑)이 주목된다. 식읍은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사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변으로부터 새롭게 확보한 지역을 본래 그곳을 지배하던 지배층에게 경제적 기반으로 제공해 준 것이었다. 삼국 시대 식읍은 투항한 세력의 지배층뿐만 아니라 왕족과 공신(功臣), 그리고 봉작자(封爵者)에게도 지급되었다. 따라서 식읍은 삼국 시대 귀족 세력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 가운데 하나였다.

신라 귀족의 또 다른 주요 경제적 기반은 녹읍(祿邑)이었다. 녹읍은 관직 복무의 대가인 녹(祿)을 지급하는 데 있어 일정한 지역인 읍(邑)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현재 식읍과 녹읍의 차이점과 내용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하지만 대체로 ‘수조지(收租地)’ 혹은 ‘수조호(收租戶)’에 대한 조세 수취권을 국가에서 인정해 준 것이었다고 보고 있다. 즉 일정한 지역 혹은 일정한 민호(民戶)가 국가에 납부한 조세 수취권을 귀족에게 양도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 시대의 귀족 세력은 식읍지 내지 녹읍지에서 수조권 내지 수조호만 관리한 것은 아니었다. 이를 매개로 식읍지 내지 녹읍지에서 사적(私的)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689년 신문왕(神文王)은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녹읍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인해 757년 경덕왕(景德王) 대에 녹읍제는 다시 부활하였다. 이는 귀족의 토지 지배를 견제하려던 시책이 실패한 것으로, 국가 권력이 귀족 세력을 압도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이로 인하여 이후 신라 사회에서는 대규모 농장(農莊)이 발전하였고, 국가 재정은 위축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한국 고대 중세초기 토지제도사』, 이경식,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
『한국고대사회경제사』, 전덕재, 태학사, 2006.
편저
「경제」, 전덕재, 국사편찬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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