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삼국 시대삼국의 수취제도와 역역

신라 중고기의 역역 동원 체제

신해년 2월 26일 남산신성(南山新城)을 쌓을 때, 만약 (성을 쌓는) 법도에 따라 만든 지 3년 이내에 무너져 파괴되면 죄(罪)로 다스릴 것임을 듣고 교령(敎令)에 따라 (그렇게 하기로) 맹세하였다.

아량나두(阿良邏頭)인 사훼(부)의 음내고(音乃古) 대사(大舍).

노함도사(奴含道使)인 사훼(부)의 합친(合親) 대사(大舍).

영고도사(營沽道使)인 사훼(부)의 요▨▨지(夭▨▨知) 대사(大舍).

군상촌주(郡上村主)인 아량촌(阿良村)의 금지(今知) 찬간(撰干)(과) 칠토▨▨지이리(柒吐▨▨知尒利) 상간(上干).

장척(匠尺)인 아량촌(阿良村)의 말정차(末丁次) 간(干)(과) 노함촌(奴含村)의 차▨▨(次▨▨) 간(干).

문척(文尺)인 ▨문지(▨文知) 아척(阿尺).

성작상(城作上)인 아량(阿良)의 몰내생(沒㚓生) 상간(上干).

장척(匠尺)인 아▨▨차(阿▨▨次) 간(干).

문척(文尺)인 죽생차(竹生次) 일벌(一伐).

면착상(面捉上)인 진▨▨(珎▨▨) ▨(▨).

▨착상(▨捉上)인 지▨차(知▨次) ▨(▨).

▨착상(▨捉上)인 수이차(首尒次) 간(干).

석착상(石捉上)인 욕▨차(辱▨次) ▨▨(▨▨).

11보(步) 3척(尺) 8촌(寸)을 받았다.

경주 남산신성비 제1비」

辛亥年二月卄六日, 南山新城作節, 如法以作後三年崩破者, 罪敎事为聞敎令誓事之.

阿良邏頭, 沙喙, 音乃古大舍.

奴含道使, 沙喙, 合親大舍.

營沽道使, 沙喙, 夭□□知大舍.

郡上村主, 阿良村, 今知撰干, 柒吐□, □知尒利上干.

匠尺, 阿良村, 末丁次干, 奴含村, 次□□干.

文尺, □文知阿尺.

城作上, 阿良, 沒㚓生上干.

匠尺, 阿□□次干.

文尺, 竹生次一伐.

面捉上, 珎□□□.

□捉上, 知□次□.

□捉上, 首尒次干.

石捉上, 辱□次□□.

受十一步三尺八寸.

「慶州南山新城碑 第一碑」

이 사료는 591년(진평왕 13년) 경주 남산에 신성(新城)을 쌓는 데 관여한 지방관 및 지방민들에 대해 기록한 「경주 남산신성비(慶州南山新城碑)」 가운데 제1비의 내용이다. 당시 신라의 지방 통치 체제와 역역(力役) 동원 체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1934년에 처음으로 발견된 이래 현재까지 모두 10기의 비가 발견되었다. 그 중 제1비는 1934년 경주시 탑동 식혜골에 위치한 김호(金虎) 장군 고택(중요민속자료 제34호) 앞에서 발견되었는데, 원래는 경주 남산 중턱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비석의 높이는 91.0cm이고 최대 폭은 44.0cm에 이르며, 장란형(長卵形)의 자연석을 거의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몇몇 글자가 판독하기 어려운 점을 제외하면 손상된 부분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비문은 크게 3단락으로 나뉜다. 먼저 “신해년(辛亥年)~맹세하였다[誓事之]”는 첫 번째 단락에 해당한다. 10개의 남산신성비 가운데 파편 상태로 발견된 제6비와 제8비를 제외하면 대개 제1비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신해년 2월 26일 남산신성을 쌓을 때, 만약 (성을 쌓는) 법도에 따라 만든 지 3년 이내에 무너져 파괴되면 죄(罪)로 다스릴 것임을 듣고 교령(敎令)에 따라 (그렇게 하기로) 맹세하였다.”라는 문장으로 비문이 시작된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이를 통해 성 쌓기에 앞서 일종의 서약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비문의 첫 구절에 ‘신해년’이란 간지가 보이는데, 『삼국사기』권4의 진평왕조에 따르면 591년(진평왕 13년) 7월 둘레 2850보의 남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591년은 바로 신해년이므로, 남산신성비에 보이는 ‘신해년’은 바로 591년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7월에 남산성을 쌓았다고 한 반면, 비문에서는 2월 26일에 남산신성을 쌓았다고 하므로 조금 차이가 있다. 본격적인 작업은 성을 쌓은 뒤 3년 이내에 무너지면 처벌받겠다는 맹세를 한 다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아마도 현재로서는 2월 26일은 성을 쌓는 작업의 착공일로, 7월은 작업의 완료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축성 작업은 약 5개월가량 소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단락은 “아량나두(阿良邏頭)~욕▨차(辱▨次) ▨▨(▨▨)”까지다. 이 단락은 성을 쌓는 작업에 관여한 사람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는데, 군상촌주(郡上村主)를 기준으로 다시 앞뒤로 나뉜다. 아량나두 이하의 전반부는 대체로 중앙에서 해당 지역으로 파견되어 상주하던 지방관이, 군상촌주 이하는 지방의 유력자들이 각각 열거되어 있다. 아량(阿良), 노함(奴含), 영고(營沽) 등은 경남 의령과 함안 일대로 비정되며, 아량을 아량촌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이들 지명에는 각각 ‘촌(村)’이 생략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나두(邏頭)와 도사(道使)는 중앙에서 행정(성)촌 단위로 파견된 지방관인데, 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은 것은 그보다 상위의 행정 단위가 역역 동원과 관련되어 있었음을 알려 준다. 군상촌주 등의 존재로 미루어 보면 그것은 아마도 군(郡)이 아닐까 추정된다. 즉 지방에서 역역 동원을 책임진 가장 큰 행정 단위는 군이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군상촌주 이하를 살펴보면 이들은 군상촌주, 장척(匠尺), 문척(文尺), 성작상(城作上), 면착상(面捉上), ▨착상(▨捉上), 석착상(石捉上) 등으로 그 역할이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군상촌주는 군 단위에서 가장 유력한 토착 세력으로 판단되며, 명칭으로 보아 장척은 기술을, 문척은 기록과 관련한 행정 서무를 각각 담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군상촌주 이하의 인물이 평상시에도 그러한 직명을 가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이들은 지방관을 보좌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세 번째 단락은 “11보(步) 3척(尺) 8촌(寸)을 받았다.”고 하는 짧은 문장으로, 이는 아량촌 등이 할당 받은 작업량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길이의 가장 하위 단위인 촌(寸)까지 표기하였다는 점으로, 이는 남산신성을 쌓는 작업이 매우 치밀한 계획 아래 진행되었음을 말해 준다. 물론 이러한 작업 구간은 구간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었겠지만, 591년에 쌓은 남산성의 둘레가 2850보라는 『삼국사기진평왕조의 기록과 남산신성 제1비의 축성 담당자들이 할당 받은 구간이 11보 3척 8촌이라는 점을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축성 작업은 모두 200여 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던 셈이다.

이렇듯 남산신성비는 대체로 ‘작업에 대한 서약-작업에 관여한 사람들의 명단-할당 받은 작업량’ 등 총 3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일부 비의 경우 할당 받은 작업량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작업에 참여한 사람의 명단이 나오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비문의 구성은 큰 차이가 없다. 제1비를 기준으로 남산신성의 축성 과정을 복원해 보면, 우선 591년 2월 26일 어떠한 모임이 있었고, 이때 성실히 축성 작업에 임하며 3년 이내에 각 집단이 담당한 구간에서 문제가 생기면 법도에 따라 처벌받을 것을 맹세하였다. 이후 각 집단별로 작업량을 할당 받아 축성 작업을 진행하였고, 작업이 끝난 다음 작업 집단별로 비문을 작성해 작업 구간 내에 세웠을 것이다.

남산신성비에는 경주에 위치한 산성을 쌓는 작업에 경남 함안⋅의령 일대의 지방민 등을 동원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두, 도사, 촌주 등 신라의 지방 통치와 관련한 관직과 찬간(撰干), 상간(上干) 등의 외위(外位) 등도 확인되어, 신라의 역역 동원 체제는 물론이고 지방 통치 체제와 외위제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경주 남산신성의 연구」,『고고역사학지』10,박방룡,동아대학교 박물관,1994.
「남산신성비를 통하여 본 신라의 지방통치체제」,『역사학보』64,이종욱,역사학회,1974.
「남산신성비의 종합적 고찰」,『역사학보』26,진홍섭,역사학회,1965.
「신발견 남산신성비소고」,『역사학보』13,진홍섭,역사학회,1960.
「6세기 말 신라의 역역 동원체계-남산신성비의 기재양식에 대한 재검토-」,『역사와 현실』10,하일식,한국역사연구회,1993.
저서
『금석문과 신라사』, 주보돈, 지식산업사, 2002.
편저
『문자로 본 신라 –신라인의 기록과 필적-』, 국립경주박물관 편, 예맥출판사, 2002.
「경주 남산신성비」, 이명식,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남산신성비문의 구조와 그 의미」, 주보돈, 심정보 외 공저, 경주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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