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들 혜공 대왕(惠恭大王, 재위 765~780) 건운(乾運)이 대력(大曆) 경술(庚戌, 770) 12월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공인들을 모아 이에 그것을 완성하여 봉덕사(奉徳寺)에 안치하였다. ……(중략)…… 그러므로 종명(鍾銘)에 이르기를, “성덕 대왕 신종지명(聖德大王神鍾之銘)”이라고 하였다.
[소성]대왕([昭成]大王, 재위 799~800)의 비 계화왕후(桂花王后)는 대왕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에 근심스럽고 마음이 어지러웠으며 슬픔이 극에 달하였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이 상하였다. ……(중략)…… 이에 6의(六衣)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9부(九府)에 쌓아 두었던 재물을 다 내어 이름난 장인을 불러 미타상(弥陁像) 1구를 만들게 하고, 아울러 신중(神衆)을 만들어 봉안하게 하였다.
『삼국유사
'삼국유사' 관련자료
제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 때 흥륜사(興輪寺) 남문과 좌우 낭무(廊廡)가 불에 탄 채 아직 수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화(靖和)⋅홍계(弘繼) 두 스님이 시주를 모아 장차 수리하고자 하였다. 정명(貞明) 7년(920) 신사(辛巳) 5월 15일에 ……(중략)……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보고 전에 없던 일이라고 탄식하면서 옥과 비단과 곡식을 시주하여 산더미처럼 쌓였다. 장인(工匠)이 스스로 와서 며칠 안 되어 그것을 완성하였다.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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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 20명을 보내 여러 곳(國)에 배치하였다. ……(중략)……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윤청(潤淸) 등을 여러 곳(國)에 보내는 것은 그들이 공물로 바치는 면(綿)을 약탈한 혐의가 있기 때문이다. ……(중략)…… ”라고 하였다. 윤청(潤淸)⋅장언(長焉)⋅진평(眞平) 등은 기와를 만드는 데 재주가 뛰어나므로, 무츠노쿠니[陸奧國] 수리부(修理府)의 기와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여 그 일에 뛰어난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좇아 전하여 익히도록 하였다.
『일본삼대실록』권18, 청화천황 정관 12년 9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