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통일 신라와 발해통일 신라의 경제 체제

동시⋅서시⋅남시의 개설

동시전(東市典)은 지증왕(智證王, 재위 437~514) 9년(508)에 설치하였다. 감(監)은 2명이었는데, 관등(官等)이 나마(奈麻)에서 대나마(大奈麻)까지인 자로 임용하였다. 대사(大舍)는 2명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이 주사(主事)로 고쳤으나 후에 다시 대사로 일컬었으며, 관등은 사지(舍知)에서 나마까지인 자로 임용하였다. 서생(書生)은 2명이었는데, 경덕왕이 사직(司直)으로 고쳤으나 후에 다시 서생으로 칭하였다. 관등은 조부(調府)의 사(史)와 같았다. 사는 4명이었다.

서시전(西市典)은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 4년(695)에 설치하였다. 감(監)은 2명이었다. 대사(大舍)는 2명이었는데, 경덕왕이 주사(主事)로 고쳤으나 후에 다시 대사로 칭하였다. 서생(書生)은 2명이었는데, 경덕왕이 사직(司直)으로 고쳤으나 후에 다시 서생으로 칭하였다. 사(史)는 4명이었다.

남시전(南市典)은 역시 효소왕 4년에 설치하였다. 감은 2명이었다. 대사는 2명이었는데, 경덕왕이 주사로 고쳤으나 후에 다시 대사로 칭하였다. 서생은 2명이었는데, 경덕왕이 사직으로 고쳤으나 후에 다시 서생으로 칭하였다. 사는 4명이었다.

삼국사기』권38, 「잡지」7, 직관 상

東市典, 智證王九年置. 監二人, 位自奈麻至大奈麻爲之. 大舎二人, 景徳王攺爲主事, 後復稱大舎, 位自舎知至奈麻爲之. 書生二人, 景徳王攺爲司直, 後復稱書生, 位與調府史同. 史四人.

西市典, 孝昭王四年置. 監二人. 大舎二人, 景徳王攺爲主事, 後復稱大舎. 書生二人, 景徳王攺爲司直, 後復稱書生. 史四人.

南市典, 亦孝昭王四年置. 監二人. 大舎二人, 景徳王攺爲主事, 後復稱大舎. 書生二人, 景徳王攺爲司直, 後復稱書生. 史四人.

『三國史記』卷38, 「雜志」7, 職官 上

이 사료는 동시전(東市典), 서시전(西市典), 남시전(南市典) 등 시전(市典)의 설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신라의 상업 경제의 양상을 확인하게 해 주는 기록이다.

신라에는 물물 교환과 매매의 기능을 담당한 시장이 있었고, 또 이들 시장을 관장하는 관부도 설치되었다. 490년(소지왕 12년) 사방에 재화를 유통하기 위하여 왕경(王京, 경주)에 시장을 개설하고, 이로부터 19년 뒤인 509년(지증왕 10년) 동시(東市)를 설치하고 동시전을 두어 시전(市廛) 및 장시의 감독을 맡아 보게 하였다. 또한 통일 후 왕경의 인구가 증가하여 물화의 유통이 늘어나자 효소왕 4년(695)에 다시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설치하고 아울러 서시전과 남시전을 두어 시장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러한 시전의 설치는 왕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는데,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때에 9주 5소경을 설치하면서 각 소경과 지방의 주요 거점 도시에도 시전을 개설하였다.

신라가 시전을 설치한 것은 이를 통하여 재화의 수급을 조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왕경이나 지방의 거점 도시에 설치된 시전에서는 일반 민간인의 일용품 외에도 철이나 기름, 그리고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 교서(834)에 보이는 것과 같이 서역 물품 및 노비들까지도 매매되었다. 또한 한 가지 물품만을 판매하는 전문 시전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물품의 매매는 주로 민간 수공업자와 부녀자들에 의한 행상, 그리고 육상 운송과 해운 등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신라에서는 일찍부터 행상이 발생하여 물자를 판매하였는데 이러한 행상에는 부녀자들도 있었다. 이는 『신당서(新唐書)』 「신라전(新羅傳)」에 부녀자들에 의한 상품 교역 사실이 기술되어 있으며, 『계림잡사(雞林雜事)』에는 부녀자들이 하루에 아침⋅저녁으로 열리는 저자에 항아리를 가지고 와서 각기 물자를 매매하였다는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매매의 교환 수단은 포(布)와 미곡(米穀) 등이 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해상을 통한 국제무역이 성행하여 왕경에서는 당나라와 서역의 물품 등 호화롭고 값비싼 사치품 매매도 성행하였다. 지금의 타슈켄트 지역에서 나는 슬슬(瑟瑟), 캄보디아에서 생산되는 비취모(翡翠毛),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나는 공작새 꼬리털,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일대가 원산지인 대모(玳瑁), 답등(털자리), 호피 등 여러 종류의 수입 물품이 유통되었다.

한편, 시전에는 관리가 배치되었는데, 동⋅서⋅남시전에 각각 ‘감(監, 2명)-대사(大舍, 2명)-서생(書生, 2명)-사(史, 4명)’를 두었다. 이들은 시전의 교역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고, 나아가 도량형의 제정 등에도 관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시전의 개설은 도시의 발전과 흐름을 같이하는 것으로, 신라 전성기 경주에는 초가집이 없고 거리 모퉁이마다 담장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당시의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시대에 상업 활동이 매우 발달하고 융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전의 구역이 왕경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남으로 확대된 것은 결국 인구가 증가하면서 왕경의 확대에 따른 조치로, 당시 신라 상업의 융성과 왕경의 번성을 시사해 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한국 고대의 시와 정에 대한 연구-시장의 기원과 관련하여-」,『원우논총』2,강영경,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1984.
「왕경인의 소비생활과 교역」,『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28,김창석,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7.
「한국 고대 시의 원형과 그 성격변화」,『한국사연구』99⋅100,김창석,한국사연구회,1997.
「고대한국의 시장발달 개관」,『목포대학교 논문집』7,임병택,목포대학교,1971.
저서
『삼국과 통일신라의 유통체계 연구』, 김창석, 일조각, 2004.
『한국고대사회경제사』, 전덕재, 태학사, 2006.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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