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통일 신라와 발해통일 신라의 활발한 국제 교류

장보고의 해상 활동

장보고(張保皐)【「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궁복(弓福)으로 되어 있다】와 정년(鄭年)【연(年)은 연(連)으로도 되어 있다.】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 그들의 고향과 아버지⋅할아버지는 알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싸움을 잘하였는데, 정년은 특히 바닷속에서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조금 뒤졌으나 정년이 장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技藝)로 항상 서로 맞서 서로 아래에 들지 않으려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당나라에 가서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말을 타고 창을 쓰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이후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대왕을 뵙고 아뢰기를,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청해(淸海)에 진영(鎭營)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을 붙잡아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청해는 신라 해로(海路)의 요충지로서 지금의 완도(莞島)라 부르는 곳이다.

대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었다. 그 후 해상에서 우리나라 사람[鄕人]을 파는 자가 없었다. ……(중략)……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이 시해되어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의 자리가 비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장보고가 군사 5000명을 정년에게 주며, 정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환난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정년이 왕경에 들어가 반역자를 죽이고 왕을 세웠다. 왕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대신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이것은 신라의 전기(傳記)와는 자못 다르나, 두목(杜牧)이 전(傳)을 지었으므로 둘 다 남겨 둔다】.

삼국사기』권44, 「열전」4 장보고⋅정년

문성왕(文聖王) 8년(846) 봄에 청해진(淸海鎭)의 궁복(弓福)이, 왕이 자기의 딸을 맞아들이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장차 그를 토벌하자니 뜻하지 않을 우환이 있을까 두렵고, 그냥 방치해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었으므로 근심하고 염려하여 어떻게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때) 무주(武州) 사람 염장(閻長)은 용감하고 굳세기로 동시에 소문이 나 있었는데, (그가) 와서 아뢰기를 “조정에서 다행히 저의 말을 들어준다면 저는 한 명의 병졸도 수고롭게 하지 않고 맨주먹을 가지고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의 말을 따랐다.

염장은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것처럼 꾸며 청해진에 투항했는데, 궁복은 장사(壯士)를 아꼈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불러들여 귀한 손님으로 삼고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매우 즐거워하였다. (궁복이) 술에 취하자 (염장이)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후 그 무리를 불러 달래니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11 문성왕 8년 춘

張保臯【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郷邑父祖. 皆善闘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噎. 角其勇壯, 保臯差不及也, 年以兄呼保臯. 保臯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後保臯還國, 謁大王曰, 遍中國, 以吾人爲奴婢. 願得鎮清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清海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大王與保臯萬人, 此後海上無鬻郷人者. ……(中略)……

飮未卒, 聞王弑國亂無主. 保臯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入國誅叛者立王, 王召保臯爲相, 以年代守清海【此與新羅傳記頗異, 以杜牧立傳, 故兩存之.】

『三國史記』卷44, 「列傳」4 張保皐⋅鄭年

[文聖王] 八年春, 清海弓福怨王不納女, 㩀鎮叛. 朝廷將討之則恐有不測之患, 將置之則罪不可赦, 憂慮不知所圖. 武州人閻長者, 以勇壯聞於時, 來告曰, 朝廷幸聽臣, 臣不煩一卒, 持空拳以斬弓福以獻. 王從之.

閻長佯叛國投清海, 弓福愛壯士, 無所猜疑, 引爲上客, 與之飮極歡. 及其醉, 奪弓福劒斬訖, 召其衆說之, 伏不敢動.

『三國史記』卷11, 「新羅本紀」11 文聖王 8年 春

이 사료는 해상왕(海上王)으로도 불리는 장보고(張保皐, ?~846)의 출신과 성장, 중국에서의 활동, 청해진(淸海鎭) 설치, 그리고 반란을 일으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을 전하는 기록이다.

장보고는 미천한 가문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라고 하였다. 장보고라는 성과 이름은 중국에 건너가 성공한 이후 붙인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장보고는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 그가 당나라로 들어간 시기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9세기 초 신라에서 흉년과 기근이 극심했던 814년(헌덕왕 6)부터 817년(헌덕왕 9) 사이로 추정된다.

그는 무령군에 들어가 이사도(李師道, ?~819) 토벌에 참여하여 소장으로 승진하여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전란이 끝나자 당시 신라인이 집성촌을 이루던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적산(赤山)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세력을 넓혔다. 오래지 않아 장보고는 그곳에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재력가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들여서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을 창건하고, 이곳을 기반으로 재당 신라인의 단결을 도모하였으며, 양주⋅초주 등지에 거주하는 신라인과도 폭넓은 교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828년(흥덕왕 3년) 장보고는 돌연 당나라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산둥반도를 둘러싼 황해 일대의 해상 교역은 중국 동해안이나 한반도 서남해안 지역에 근거를 둔 해적들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해적들은 교역선에 대한 재물 약탈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을 납치하여 노비로 팔아넘기기도 하였다. 특히 많은 신라인이 그 대상이 되었다. 장보고는 바로 이들 해적 소탕에 대한 뜻을 품고 귀국하였던 것이다.

귀국 후 장보고는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을 찾아가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여 신라인이 노비로 잡혀 가는 것을 막고 해적을 소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흥덕왕은 장보고에게 대사(大使)의 직함과 함께 군사 1만 명을 주어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장보고는 남서해안에 출몰하던 해적을 소탕한 것은 물론, 신라⋅당⋅일본을 연결하는 국제무역을 독점하여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해상 무역 거점을 건설하였다.

청해진을 설치한 완도는 서쪽으로는 중국과 연결되고, 동남쪽으로는 일본의 북규슈[北九州]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의 길목으로서, 장보고는 이 청해진을 거점으로 해상무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내에는 적산포를 중심으로 초주⋅양주 등지에 분산되어 있는 신라 무역상을 하나의 교역망으로 편제하여 자신의 영향 아래 두고, 중국 서남해 지방까지 세력을 뻗쳐 신라와 당 사이의 무역권을 독점하였다. 또한 일본과도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837년(희강왕 2년) 왕위 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김우징(金祐徵)이 청해진에 피신해 오자 장보고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듬해 김우징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신라 경주로 쳐들어가, 839년에 민애왕(閔哀王, 재위 838~839)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신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이 즉위하자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고자 했으나 중앙 귀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841년(문성왕 3년) 장보고 세력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 의해 살해되었다.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적 부를 보유한 장보고의 세력 확대를 우려한 중앙 귀족이 장보고를 제거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장보고는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해상 세력은 이후 신라 하대 호족 세력의 등장에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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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 청해진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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