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통일 신라와 발해통일 신라의 활발한 국제 교류

재당 신라인의 교역 활동

신라 사람 왕청(王請)이 왔으므로 만나 보았다. 이 사람은 본국[일본]의 홍인(弘仁) 10년(819)에 바다에 표류하다가 데슈쿠니[出州國]에 닿은 당(唐)나라 사람 장각제(張覺濟) 등과 같이 배를 탔던 사람이다. 표류하게 된 까닭을 물으니, “여러 가지 물건을 교역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 바다를 건너는데 갑자기 풍랑을 만나 3개월 동안 남쪽으로 떠내려가다가 데슈쿠니에 닿았습니다 ……(중략)…….”라고 말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권1, 개성 4년 정월 8일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던 천태종(天台宗) 승려 원재(圓載, ?~877)의 제자 인호(仁好)와 순창(順昌)이 신라 사람 장공정(張公靖) 등 26명과 함께 나가토쿠니[長門國]에 도착하였다

『속일본후기』권13, 인명천황 10년 12월(계해)

등주십장압아(登州十將押衙) 장영(張詠)이 산원(山院)에 와서 말하기를, “제가 옛날 저 나라[일본]에 갔을 때 은혜를 크게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와서 삼가 문안을 드립니다. 만일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모두 말씀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엔닌[圓仁]이 대답하기를, “달리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만, 나라[중국] 안으로 들어가 성인의 발자취를 순례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일본삼대실록』권8, 청화 천황 6년 정월 14일

산에는 절이 있어 그 이름을 적산법화원(赤山法花院)이라 하는데, 본래 장보고(張保皐, ?~846)가 처음으로 세운 곳이다. 오랫동안 사유지를 갖고 있어, 그것으로 절의 식량을 충당하였다. ……(중략)…… 지금 신라 통사 압아(新羅通事押衙) 장영(張詠)과 임대사(林大使), 그리고 왕훈(王訓) 등이 전적으로 맡아 관리하고 있다.

『입당구법순례행기』권2, 개성 4년 6월 7일

新羅人王請, 來相看. 是本國弘仁十年, 流著出州國之唐人張覺濟等, 同舩之人也. 問漂流之由, 申云, “爲交易諸物離此過海, 忽遇惡風南流三月, 流著出州國. ……(中略)…… ”

『入唐求法巡禮行記』卷1, 開成 4年 正月 8日

入唐留學天台宗僧圓載之弟子仁好⋅順昌, 與新羅人張公靖等廿六人, 來着於長門國.

『續日本後紀』卷13, 仁明天皇 10年 12月(癸亥)

登州十將押衙張詠來到山院, 語云, “詠昔到那國, 甚蒙國恩. 故來奉問. 若有所要, 冀莫形迹” 圓仁答云, “無他所要, 但意樂欲得入國內巡禮聖跡”

『日本三代實錄』卷8, 淸和天皇 6年 正月 14日

山裏有寺, 名赤山法花院, 本張寶高初所建也. 長有㽵田, 以宛粥飰. ……(中略)…… 今新羅通事押衙 張詠及林大使⋅王訓等専勾當.

『入唐求法巡禮行記』卷2, 開成 4年 6月 7日

이 사료는 당(唐)나라에 거주하면서 대외 교역에 종사하였던 재당 신라인과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삼국사기』 등에는 재당 신라인에 대한 자료가 거의 수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당나라에 유학하였던 일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같은 자료가 매우 중요하다. 재당 신라인은 생업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해상 무역이었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여러 명의 재당 신라인이 등장하는데, 그 중 왕청(王請)이란 인물이 눈에 띈다. 839년 정월 8일 왕청이 엔닌과 만나 나눈 이야기가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왕청은 “여러 가지 물건을 교역하기 위해” 당나라를 떠나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 지금의 일본 혼슈 북단인 데슈쿠니[出州國]에 닿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기사를 통해 왕청은 재당 신라인으로 대외 교역에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인명 천황 10년(843) 12월 계해조에는 당나라에 유학을 갔던 일본 승려 인호(仁好)와 순창(順昌)이 신라인 장공정(張公靖) 등과 함께 오늘날 일본 야마구치현인 나가토쿠니[長門國]에 도착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도당(渡唐) 유학승과 함께 일본에 도착하였음을 고려해 보면 장공정(張公靖) 역시 재당 신라인으로서 교역에 종사하였던 인물로 추정된다.

재당 신라인들은 장보고(張保皐, ?~846)가 세운 적산 법화원(赤山法花院)을 활동 거점으로 삼았는데,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839년(일본 청화 천황 개성 4) 무렵에는 신라 통사 압아(新羅通事押衙)였던 장영(張詠)이 임대사(林大使)⋅왕훈(王訓) 등과 함께 적산 법화원을 전적으로 관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 삼대 실록(日本三代實錄)』을 살펴보면 장영은 자신이 일본에 갔을 때 은혜를 크게 입은 일이 있었고, 그 때문에 굳이 엔닌에게 와서 문안을 하면서 혹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장영 또한 본래 교역에 종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흥미로운 점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나와 있듯이, 그가 839년에 신라 통사 압아를 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라 통사 압아’란 재당 신라인이 거주하던 신라방(新羅坊)에 설치한 자치적 행정 기관인 신라소(新羅所)의 사무를 관장하던 직책으로, 신라소의 운영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대외 교역에 종사하다가 후일 신라소의 운영자라는 지위에 오른 것으로 보이는데, 이 같은 사례는 교역을 담당하던 재당 신라인 가운데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교역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낼 경우에는 재당 신라인 사회의 운영자로 진출할 수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렇듯 교역에 종사한 재당 신라인은 대체로 양쯔강 유역의 강회(江淮)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해안과 운하 주변에 거주하였는데, 그들은 중국 연해안의 교역뿐만 아니라 신라 및 일본과의 원거리 교역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8~9세기 동아시아 무역을 이끌었다. 재당 신라인들이 대외 교역에 활발하게 나섰음은 당나라에 유학하였던 신라 승려나 일본 승려의 상당수가 재당 신라인의 무역선을 타고 귀국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재당 신라인들은 적극적인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고, 이를 토대로 재당 신라인 사회를 이끌어갈 유력 인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재당 신라인 사회가 장기간에 걸쳐 안정을 이룩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재당 신라인사회의 형성과 발전」,『한국사연구』 140,고경석,한국사연구회,2008.
「신라인의 해외활동과 신라방」,『한국사 시민강좌』 28,김문경,일조각,2001.
「고대 일본열도의 신라상인에 대한 고찰 -장보고 사후를 중심으로-」,『일본학』 15,이병로,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1996.
「입당구법순례행기 에 나타난 한국고대사상」,『일본어문학』 13,이병로,일본어문학회,2000.
「9세기 재당 한국인에 대한 고찰 -입당구법순례행기 를 중심으로-」,『중국사연구』 13,이유진,중국사학회,2001.
저서
『재당 신라인사회 연구』, 권덕영, 일조각, 2005.
『한국 고대의 동아시아 교역사』, 박남수, 주류성, 2011.
『한국 고대무역사 연구』, 윤재운, 경인문화사, 2006.
편저
「해상활동」, 김문경, 국사편찬위원회, 2003.
「엔닌의 여행기에 나타난 한⋅중⋅일 삼국인의 만남」, 이기동, 백산자료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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