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통일 신라와 발해통일 신라의 활발한 국제 교류

일본과의 교역 활동

신라가 아찬(阿湌) 김항나(金項那)와 사찬(沙湌) 살류생(薩虆生)을 보내 조공하였다. 특산품[調]으로 바친 물건은 금⋅은⋅철⋅솥⋅비단⋅명주⋅베⋅가죽⋅말⋅개⋅노새⋅낙타 따위의 10여 종이었다. 또한 따로 바친 물건이 있었다. 천황(天皇)⋅황후(皇后)⋅태자(太子)에게 금⋅은⋅칼⋅깃발 따위를 바쳤는데, 각각 그 수가 많았다.

『일본서기』권29, 천무 천황 8년 10월(갑자)

대재(大宰)가 신라의 공물을 바쳤는데, 금⋅은⋅비단⋅베⋅가죽⋅구리⋅철 따위의 10여 가지였다. 아울러 별도로 불상⋅여러 가지 채색 비단⋅새⋅말 따위 10여 가지를 바쳤다. 그리고 [김]상림([金]霜林)이 금⋅은⋅채색(彩色) 등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을 바치니, 모두 80여 가지였다.

『일본서기』권30, 지통 천황 2년 2월(신묘)

신라 왕자 김태렴(金泰廉) 등이 조정에 배알하고 아울러 특산물을 바쳤다. 그리고 아뢰기를 “……(중략)…… 왕을 대신하여 왕자 한아찬(韓阿湌) 태렴(泰廉)을 우두머리로 삼아 37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입조(入朝)하게 하고, 겸하여 여러 가지 특산물을 바치고 삼가 아뢰게 합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태렴이 또 아뢰기를 “……(중략)…… 제가 몸소 준비해 온 국토의 미미한 물건을 삼가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속일본기』권18, 효겸 천황 4년 6월(기축)

좌우 대신(左右大臣)에게 대재(大宰)의 면 각 2만 둔(屯), 대납언(大納言) 휘(諱)와 궁삭어정조신청인(弓削御淨朝臣淸人)에게 각각 1만 둔, 종2위(位) 문실진인정삼(文室眞人淨三)에게 6,000둔, 중무경(中務卿) 종3위 문실진인대시(文室眞人大市)⋅식부경(式部卿) 종3위 석상조신택사(石上朝臣宅嗣)에게 4,000둔, 정4위하(下) 이복부녀왕(伊福部女王)에게 1,000둔을 주어 신라의 교역물을 사게 하였다.

『속일본기』권29, 칭덕 천황 2년 10월(갑자)

新羅遣阿湌金項那⋅沙湌薩虆生朝貢也. 調物, 金⋅銀⋅鐵⋅鼎⋅錦⋅絹⋅布⋅皮⋅馬⋅狗⋅騾⋅駱駝之類十餘種. 亦別獻物. 天皇⋅皇后⋅太子, 貢金⋅銀⋅刀⋅旗之類, 各有數.

『日本書紀』卷29, 天武天皇 8年 10月(甲子)

大宰獻新羅調賦, 金銀絹布皮銅鐵之類十餘物. 幷別所獻佛像⋅種種彩絹⋅鳥馬之類十餘種, 及[金]霜林所獻金銀彩色⋅種種珍異之物, 幷八十餘物.

『日本書紀』卷30, 持統天皇 2年 2月(辛卯)

新羅王子金泰廉等拜朝, 幷貢調. 因奏曰, “……(中略)…… 遣王子韓阿湌泰廉, 代王爲首, 率使下三百七十餘人入朝, 兼令貢種種御調, 謹以申聞” ……(中略)…… 泰廉又奏言, “……(中略)…… 私自所備, 國土微物, 謹以奉進”

『續日本紀』卷18, 孝謙天皇 4年 6月(己丑)

賜左右大臣大宰綿各二萬屯 大納言諱⋅弓削御淨朝臣淸人各一萬屯, 從二位文室眞人淨三六千屯, 中務卿從三位文室眞人大市⋅式部卿從三位石上朝臣宅嗣四千屯, 正四位下伊福部女王一千屯, 爲買新羅交關物也.

『續日本紀』卷29, 稱德天皇 2年 10月(甲子)

이 사료는 신라와 일본 사이의 교역과 관련한 기사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만을 뽑은 것으로, 양국 간의 교역품과 교역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잘 드러나고 있다. 한국 고대사에 비해 일본 고대사의 경우 관련 문헌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기 때문에, 양국 간의 교역 기사도 대체로 일본 측의 사료에 상세하게 실려 있는 경향이 강하다. 양국 간의 교역 기사를 추리면서 일본 측의 사료만 제시한 것도 바로 그러한 사정 때문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권29의 천무 천황 8년(680) 18월 갑자조, 권30의 지통 천황 2년(688) 2월 신묘조에는 특산물, 즉 조공품의 명목으로 신라에서 일본에 보낸 물품이 등장한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것처럼 신라에서 보낸 물품이 통상적인 의미의 조공품으로 볼 수 있는지는 조금 더 검토가 필요하나, 다양한 종류의 물품이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 온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에는 금과 은을 비롯한 금속류와 비단 등의 직물류, 말과 개 등의 동물이 주종을 이루며, 심지어 불상까지 포함되어 있다. 여러 물품 가운데는 낙타도 포함되어 있어 흥미로운데, 이는 아마도 서역이나 남방에서 수입한 다음 신라를 거쳐 일본에 전해졌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신라와 일본 간의 교역이 활발하였음을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신라와 일본 간의 교역은 상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진골 귀족이 전면에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18의 효겸 천황 4년 6월 기축조에 따르면 752년 신라 왕자 김태렴(金泰廉)이 370여 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그는 몸소 신라에서 생산된 물건을 가져와 바쳤다고 한다. 김태렴의 신분이 정말 왕자였는지, 그가 공식적인 사절로 온 것인지 아니면 상인을 이끌고 통상 교역의 차원에서 일본에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다소 논란이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왕자를 칭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신분이었음은 틀림 없다.

당시 김태렴 일행이 일본에 가져갔던 물품의 목록은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매신라물해」는 752년에 일본의 관료들이 신라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작성한 일종의 신청서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까지 모두 30건이 확인되었다. 「매신라물해」를 분석해 본 결과 김태렴 일행은 각종 직물류와 금⋅은⋅동⋅철 등의 금속류, 향약(香藥)류, 생활 용품, 벽사(辟邪) 용품 등 다양한 물품을 일본에 가져갔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신라에서 건너간 물품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속일본기』권29의 칭덕 천황 2년(768) 10월 갑자조에 실린 기사가 그것을 잘 보여 준다. 이에 의하면 신라의 교역물을 구매하기 위해 조정의 고위 관료는 물론이고 왕녀에게까지 물품의 구입 대금용으로 대재부(大宰府)의 면 총 7만여 둔(屯)을 하사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신라 물품이 큰 인기를 끌자 신라의 진골 귀족이 나서서 대일본 외교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속일본기』 권9의 성무 천황 3년(726) 7월 무자조와 권33의 광인 천황 5년(774) 3월 계묘조에는 신라의 상재(上宰) 김순정(金順貞, ?~725)이 죽자 일본의 천황이 신라 사신에게 옥새가 찍힌 문서인 새서(璽書)를 내려 김순정에 대한 애도를 표하면서 양국 간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일조한 그의 공을 치하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와 같은 김순정의 사례는 신라 진골 귀족이 대일본 교역에 있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는지 짐작케 한다.

요컨대 신라와 일본의 교역은 시기에 따라 진골 귀족이 주도하기도 하고 상인이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828년 청해진(淸海鎭)이 설치되면서, 청해진이 대일본 교역 상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고, 자연스레 진골 귀족 중심의 교역 체계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846년 장보고(張保皐, ?~846)가 피살되면서 그러한 중심축은 붕괴되었고, 이후부터 신라와 일본의 교역은 재당 신라 상인이 주도하는 양상으로 변화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779년 신라의 견일본사 파견과 ‘피국 상재’에 관한 검토」,『일본역사연구』34,강은영,일본사학회,2011.
「신라 중대 대일외교사연구」,,김선숙,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2006.
「신라 중대 대일관계에 관한 연구」,『백산학보』52,심경미,백산학회,1999.
「752년 신라의 대일교역과 바이시라기모쯔케(매실라물해)」,『역사와 현실』24,윤선태,한국역사연구회,1997.
「신라 중대 대일외교의 추이와 진골귀족의 동향 –성덕왕~혜공왕대를 중심으로-」,『한국사론』37,전덕재,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97.
저서
『한국 고대의 동아시아 교역사』, 박남수, 주류성, 2011.
『한국 고대무역사 연구』, 윤재운, 경인문화사, 2006.
편저
「해상활동」, 김문경, 국사편찬위원회, 1998.
「일본과의 관계」, 김은숙, 국사편찬위원회, 1998.
「통일기 신라와 일본관계」, 연민수,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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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 청해진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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