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고려 시대경제생활

농민의 경제 생활

나라의 강토가 동해에 닿아 있는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아 험준하고 평지가 적다. 이 때문에 농토가 산간에 많이 있는데, 그 지형의 높고 낮음으로 인하여 경작하기가 매우 힘들며 멀리서 보면 사다리나 계단과도 같다. ……(중략)…… 백성이 8세가 되면 관에 문서를 내어 밭을 분배받되 결 수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국관(國官) 이하 병리(兵吏)⋅구사(驅使)⋅진사(進士)⋅공기(工技)에 이르기까지 일이 없으면 밭에서 일하게 하고, 변방을 지키는 수자리에게는 쌀을 대어 준다. 그 땅에는 메조[黃粱]⋅옻기장[黑黍]⋅조[寒粟]⋅참깨[胡麻]⋅보리⋅밀 등이 있다. 쌀은 멥쌀이 있으나 찹쌀은 없고, 쌀알이 특히 크고 맛이 달다. 소에 매다는 쟁기나 농기구는 중국과 많이 비슷하여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생략하고 싣지 않는다.

선화봉사고려도경』권23, 잡속2 종예

살겠노라 살겠노라. 청산에서 살겠노라

머루랑 다래를 먹고 청산에서 살겠노라

얄리얄리 얄랴셩 얄라리 얄라

우는구나 우는구나 새야

자고 일어나 우는구나 새야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 울고 있노라

날아가던 새 날아가던 새를 본다

믈 아래쪽 들판으로 날아가던 새를 본다

이끼 묻은 쟁기를 가지고 들판으로 날아가던 새를 본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중략)……

살겠노라 살겠노라. 바다에서 살겠노라

나문재와 굴 조개를 먹으며 바다에서 살겠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가 가다가 듣노라. 외딴 부엌을 지나다가 듣노라

사슴이 장대에 올라가서 해금을 켜는 것을 듣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더니 배 불룩한 독에다 도간 술을 빚는구나

조롱박꽃 누룩이 매워서 나를 붙잡으니 내 어찌하리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악장가사』「청산별곡

○ 왕이 몰래 금신굴(金身窟)에 이르러 복을 구하고 재난이나 질병이 없기를 기원하는 의식인 나한재(羅漢齋)를 베풀었다.현화사(玄化寺)로 돌아와 이공승(李公升)⋅허홍재(許洪材)⋅각예(覺倪) 등과 더불어 중미정(衆美亭) 남쪽 못에 배를 띄워 술을 마시며 매우 즐겼다. 이보다 앞서, 청녕재(淸寧齋) 남쪽 기슭에 정자각(丁字閣)을 세우고, ‘중미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정자 남쪽 시내[澗]에 흙과 돌을 쌓아 물을 저장하고, 언덕 위에 초가(草家) 정자를 지었는데, 오리가 놀고 갈대가 우거진 것이 완연히 강호(江湖)의 경치와 같았다. 그 가운데에 배를 띄우고 어린아이에게 뱃노래와 어부 노래를 부르게 하며, 놀이를 마음껏 즐겼다. 처음 이 정자를 지을 때에 일꾼들에게 자신들의 식량을 싸 오게 하였다. 그런데 한 일꾼이 매우 가난해서 마련하지 못하여 일꾼들이 밥 한 숟가락씩을 나누어 주며 먹게 하였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음식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남편에게 먹이고 말하기를, “친한 사람을 불러서 함께 먹으시오.”라고 하였다. 일꾼이 말하기를, “집이 가난한데 어떻게 장만했는가. 다른 남자와 관계하고 얻어 왔는가, 아니면 남의 것을 훔쳐 왔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내가 말하기를 “얼굴이 추하니 누가 가까이하며, 성질이 옹졸하니 어찌 도둑질을 하겠소. 다만 머리를 잘라 팔아서 사 가지고 왔소.”라고 하고, 이내 그 머리를 보였다. 그 일꾼은 목이 메어 먹지 못하고, 듣는 자도 슬퍼하였다.

『고려사절요』권11, 의종장효대왕 21년 3월

비 맞으며 논바닥에 엎드려 김매니 / 帶雨鋤禾伏畝中

흙투성이 험한 꼴이 어찌 사람 모습이랴만 / 形容醜黑豈人容

왕손 공자들아 나를 멸시 말라 / 王孫公子休輕侮

그대들의 부귀영화 농부로부터 나오나니 / 富貴豪奢出自儂

햇곡식은 푸릇푸릇 논밭에서 자라는데 / 新穀靑靑猶在畝

아전들 벌써부터 조세 거둔다고 성화네 / 縣胥官吏已徵租

힘써 농사지어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이는 우리들 농부거늘 / 力耕富國關吾輩

어째서 이리도 극성스레 침탈하는가 / 何苦相侵剝及膚

동국이상국집』후집 권1, 「고율시」 농부를 대신하여

國封地瀕東海, 多大山深谷, 崎嶇崒, 而少平地, 故治田, 多於山閒, 因其高下, 耕墾甚力, 遠望如梯磴然. ……(中略)…… 民年八歲, 投狀射田, 結數有差. 而國官以下, 兵吏驅使進士工技, 無事則服田, 唯戍邊則給米. 其地宜黃粱黑黍寒粟胡麻二麥. 其米有秔而無稬, 粒持大而味甘. 牛工農具, 大同小異, 略而不載.

『宣和奉使高麗圖經』卷23, 雜俗2 種蓺

○ 살어리 살어리랏다. 靑山(쳥산)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靑山(쳥산)애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로 니러 우니로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잉 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中略)……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 살어리랏다.

나마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사사미 짐대예 올아셔 헤금(奚琴)을 혀거를 드로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니 배브른 도긔 설진 강수를 비조라.

조롱곳 누로기 메와 잡서와니 내 엇디 허리잇고.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樂章歌詞』「靑山別曲」

○ 王微行, 至金身窟, 設羅漢齋. 還玄化寺, 與李公升許洪材覺倪等, 泛舟衆美亭南池, 酣飮極歡. 先是, 淸寧齋南麓, 構丁字閣, 扁曰衆美亭. 亭之南澗, 築土石貯水, 岸上作茅亭, 鳧鴈蘆葦, 宛如江湖之狀. 泛舟其中, 令小僮棹歌漁唱, 以恣遊觀. 初作亭, 役卒私賫糧. 一卒貧甚不能自給,役徒共分飯一匙食之. 一日,其妻具食來餉, 且曰, 宜召所親共之. 卒曰, 家貧, 何以備辦. 將私於人而得之乎,豈竊人所有乎. 妻曰, 貌醜誰與私, 性拙安能盜. 但翦髮買來耳, 因示其首. 卒嗚咽不能食, 聞者悲之.

『高麗史節要』卷11, 毅宗莊孝大王 21年 3月

帶雨鋤禾伏畝中, 形容醜黑豈人容, 王孫公子休輕侮. 富貴豪奢出自儂.

新穀靑靑猶在畝, 縣胥官吏已徵租. 力耕富國關吾輩, 何苦相侵剝及膚.

『東國李相國集』後集 卷1, 「古律詩」 代農夫吟

이 사료들은 고려 시대 농민의 경제적 기반과 함께 생산 활동 및 조세 수취 등의 경제 생활을 보여 주고 있다. 이를 통해 고려 시대 농민의 삶과 애환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시대 농민들은 고단한 삶을 살았다. 물론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가족 친지와 그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농사를 열심히 짓는다고 농민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뭄이나 홍수, 전쟁 등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위 또한 경제적 약자로서 불안정하였다. 고려 시대 농민들은 대체로 4~5인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소농 경영을 하였는데, 토지 소유 규모의 경우 고려 전기에는 대략 중등전(中等田) 3~4결(후기 결 면적으로는 2결 정도에 해당) 정도였으며, 후기에는 최저 1결 정도였다. 이처럼 농민들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먼저 사료 1은 송나라에서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이 정리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실린 글이다. 이 글에는 백성이 8세가 되면 관에 문서를 내어 밭을 분배받되 결 수에 차이가 있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는 신라 성덕왕(聖德王, ?~737, 재위 702~737) 때 백성이 정(丁)이 될 때 나눠 주었다고 하는 백성 정전(百姓丁田) 혹은 연수유 전답(烟受有田畓)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고려가 서긍의 말처럼 백성들에게 토지를 차등적으로 지급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고려가 백성들의 사적 소유지인 민전(民田)을 국가와 관료의 수조지(收租地)로 설정했던 사실을 서긍이 잘못 이해한 데서 빚어진 오류이다.

고려의 농민들은 민전을 소유하면서도 토지의 사적 소유권을 완전하게 가질 수는 없었다. 조세 수취나 고리대, 개인에게 소작료를 주고 토지를 경작하는 전객(佃客) 등의 문제로 농업 생산이 불안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농민들은 산을 밭으로 개간하는 일을 많이 하였다. 사료 1에서 서긍이 고려의 산전에 대해 사닥다리나 계단처럼 보인다고 한 것은 이를 의미하였다.

이러한 농민의 삶은 사료 2에 보이는 현실에 체념하면서도 삶을 꾸리고자 한 고단한 농민의 모습과도 연결된다. 사료 2는 대표적 고려 가요의 하나인 「청산별곡(靑山別曲)」의 일부분이다. 이 가요에는 청산(靑山)에 가서 토지를 개간하고 산열매를 따먹으면서 생활해야 했던 가난한 농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는 바닷가에 살면서 조개나 굴을 캐 생활하고자 했던 농민의 모습도 있다. 그렇지만 마지막 부분에 보이듯이 술을 빚어서 마시며 시름을 잊고 기쁨을 나누려고 한 농민도 있었다.

사료 3에서는 이러한 농민의 모습 가운데서도 특히 농민의 애환이 그대로 느껴진다. 사료 3에는 의종(毅宗, 1127~1173) 대 국왕과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모습을 풍자하는 가운데 그에 따라 여러 가지 힘든 노동을 감당해야만 했던 농민 부부의 모습이 담겨 있다. 가난한 한 일꾼이 중미정(衆美亭)을 지을 때 식량을 마련하지 못한 채 동원되자, 같이 온 일꾼들이 각기 음식을 나누어 주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부인은 이렇게 도움을 준 일꾼들을 위해 음식을 싸왔는데, 남편이 이를 크게 오해하였다. 가난하여 음식을 장만할 형편이 아닌데 이를 준비해 온 것은 부인이 다른 남자와의 관계, 즉 매춘(賣春)을 하였던지 그렇지 않으면 절도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의심을 하였던 것이다. 오해를 받던 일꾼의 부인은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그 비용을 마련하였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 사료를 보면 결국 가난한 농민의 경우 성(性)을 매매하거나 도둑질, 혹은 머리를 잘라 팔거나 하여 생활을 유지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료 4는 고려 중기 대표적 문신인 이규보(李奎報)가 쓴 『동국이상국후집(東國李相國後集)』에 실린 글이다. 제목은 ‘농부를 대신하여’로, 힘써 농사짓는 농부의 삶을 담고 있다. 이를 보면 비를 맞으면서 논바닥에 엎드려 열심히 김을 매는 농부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는 그만큼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동시에 다른 면으로는 그만큼 열심히 농사를 지어 부를 이룰 수 있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결국 이들 사료를 통해서 고려 시대 농민들의 고단한 삶을 이해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민들의 경제 활동에 대한 일면도 알 수 있다. 또한 여성의 경우 길쌈을 하거나 머리를 잘라 팔거나 심하면 매춘을 하는 경우도 있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위에 소개된 사료들은 농민들이 생계를 꾸리기 위해 노력한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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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기 민전의 경영」,『한국 고대⋅중세의 지배체제와 농민』,안병우,지식산업사,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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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교과서의 서술」,『역사교육』44,이병희,역사교육연구회,1988.
「12, 13세기 향촌사회의 변동과 ‘민’의 대응」,『역사와 현실』3,채웅석,한국역사연구회,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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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한국중세농업사연구』, 김용섭, 지식산업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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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농업경제연구』, 위은숙, 혜안, 1998.
『고려 전기 사전 연구』, 윤한택,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5.
『고려시대의 농업생산과 권농정책』, 이정호, 경인문화사, 2009.
『한국 중세 유교정치사상과 농업』, 한정수, 혜안, 2007.
편저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국사편찬위원회 편, 두산동아, 2009.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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