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고려 시대농장의 확대와 상업

통도사 사령과 장생표

통도사의 사방 산천 비보(裨補)

또 절의 사방 산천을 돕고 보충하였는데, 터는 사방 둘레 4만 7000보쯤이며 각각에는 장생표(長生標)1)를 세우니 도합 12개이다. ……(중략)……

사방 장생표 직간(直干)2)의 위전답(位田畓)은 동남동(東南洞) 안과 북다촌(北茶村) 교외에 나뉘어 있는데 바로 거화군(居火郡)의 경계이다. 또 동서원(東西院) 많은 대덕(大德)은 항상 동서로 나누어져 있으면서 대천(大川)에 돌을 쌓게 하였다. ……(중략)……

비보 장생표 12개가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문전동구(門前洞)에 검은 나무로 장생표 둘을 세웠고, 동쪽 흑석봉(黑石峯)에 돌을 쌓아 두고 장생표를 한 것이 둘이며, 가운데 성잉천(省仍川)과 궤천(机川)에 각각 돌비석 장생표 둘을 세웠다. 남쪽 사천(沙川) 및 포천봉(布川峯)에는 돌로 쌓아 장생표를 둘 두었고, 서쪽으로는 대령현(大嶺峴)에 비석으로 장생표를 하나 세웠으며, 남쪽 대천에는 비석을 세워 장생표 한 것이 하나이다. 사방 경계에 장생표를 설치하고 각기 간(干) 10명을 배치하였다. 이들에게 각기 위전⋅위답⋅집⋅대전(代田)을 지급하였는데 모두 사방 장생표 내 전답 토지이다. 위의 석비⋅석적⋅탑배⋅장생표 내에는 일찍이 공⋅사전 등 다른 소유지는 없으며 의춘군(宜春郡)의 경계에 해당한다.

『통도사지(한국사지총서 제5집)』(아세아문화사, 1979), 「사지사방산천비보」

1)신라⋅고려 시대에 사령(寺領)을 표시하기 위해 사찰 주변에 세웠던 표지물.
2)국가의 특수한 기관에 소속 거주하면서 건조물(建造物)을 관리 보호 수리하는 사람.

寺之四方山川裨補

又寺之四方山川裨補也者, 基地四方周四萬七千步許, 各塔長生標, 合十二. ……(中略)……

四方長生標直干之位田畓, 分伏於東南洞內, 北茶村坪郊, 乃居火郡之境也. 又東西院三千大德, 常分部於東西, 築石大川. ……(中略)……

裨補長生標十二者. 門前洞口, 立黑木榜長生標二, 東黑石峯, 置石磧長生標二, 中省仍川机川, 各立石碑長生標二. 南沙川布川峯, 置石磧長生標二, 西大嶺峴, 立石碑長生標一, 南大川, 立石碑長生標一. 分塔排於四境, 各置干十. 每給位田畓及家代田, 幷四方長生標內田畓土地也. 右石碑石磧塔排長生標內, 曾無公私他土也, 乃宜春郡之境也.

『通度寺誌(韓國寺志叢書 第5輯)』(아세아문화사, 1979), 「寺之四方山川裨補」

이 사료는 『통도사지(通度寺誌)』 가운데 고려 시대 통도사 주변 사방의 산천을 보호하고, 사찰이 소유하였거나 조세를 거두는 권한을 행사한 토지 등을 구별하기 위해 세운 장생표(長生標) 및 사찰 영지를 관리하는 직간(直干), 간(干)에게 토지를 분급해 준 것을 기록한 글이다. 고려 시대 사원 경제의 규모와 운영 방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통도사는 경상북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에 세워진 사찰이다. 646년(신라 선덕여왕 15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불사리 계단이 있어 불보 사찰의 칭호를 얻었다. 1085년(선종 2년) 상서호부에서 절에서 올린 대로 사령(寺領)을 정해 주는 조치를 내린 바 있다.

통도사 사방의 산천 비보를 위한 경계 표지석인 장생표는 모두 12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통도사가 지배하는 땅의 넓이, 즉 사령(寺領)은 둘레 4만 7000보에 이르렀다. 통도사가 국가 또는 왕명에 따라 세워진 곳이기 때문에 장생표를 특별히 국장생(國長生)이라 하였다. 이 국장생은 1085년에 통도사 측이 요청하자 당시 호부가 첩문(帖文)을 내려 건립한 것이다. 사찰 입구에는 2개의 목장생표, 사방에 6개의 석비형과 4개의 석적형 장생 등이 위치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두 개가 현전한다. 하나는 하북면 답곡리 솔래천(孫仍川)에 있는 양산 통도사 국장생표이다. 높이 166㎝, 너비가 60㎝인 화강석 석주(石柱)에 2~3.5촌(寸) 크기의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이를 세우게 된 경위에 대해, “절에서 (보고한 바 상서호부)의 을축년(선종 2, 1085) 5월 일 첩(牒)에서 앞서의 판(判)과 같이 (고쳐 세우도록) 하였으므로, 이에 세운다. 을축년 12월 일에 기록한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있다. 무안리 장생표 역시 1085년 호부에서 공문을 내려 건립하게 한 통도사의 12개 장생표 가운데 하나로, 일제 강점기 파괴된 것으로 전한다. 그 내용은 양산 통도사 국장생표와 같다.

그런데 위의 사료는 이들 국장생표와 함께 직간(直干)을 두고 위전답을 통도사에서 지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따르면 동남동 내와 북다촌 교외에 나누어져 있는데, 사방 경계에 장생표를 설치하고 각기 간(干) 10명을 배치하여 관리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아가 그들에게는 각기 위전(位田)⋅위답(位畓)⋅집⋅대전(代田)을 지급하였다. 호부에서는 이들이 모두 사방 장생표 내 전답 토지였으며, 장생표 내에 일찍이 공⋅사전 등 다른 소유지는 없고 그 경계는 의춘군의 경계에 해당한다고 확인해 준다.

이처럼 사원에는 기진(寄進)시납(施納) 등에 의한 사유지가 많았다. 또한 국가가 공식적으로 분급해 준 토지도 있었다. 왕실 궁원에 장처전(庄處田)을 지급한 것처럼 사원에도 장처전을 준 것이다. 그런데 기진과 시납 등에 의해 형성된 토지는 사원의 사유지가 되었다. 장생표를 세우고 직간과 간을 두어 이들에게 토지를 분급하거나 이들로 하여금 사원 경계 내의 토지 등을 관리했던 것이다. 다만 그 경계를 이름 하여 통도사의 사방 산천 비보라고 하였다. 이 경우는 풍수지리에 의한 산천 비보라기보다는 통도사가 지배할 수 있는 토지의 규모와 그 위에 세워진 장생표를 말하는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장생표의 성격과 기능 검토」,『생활문물연구』10,박호원,국립민속박물관,2003.
「고려시대 통도사의 사령지배에 대한 일고­「사적기」중의 「사지사방산천비보」를 중심으로­」,『부산대학교 교양과정부논문집』3,안일환,부산대학교 교양과정부,1972.
「사원장생에 대한 소고」,『정신문화』14,용운,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2.
「《통도사지)》 〈사지사방산천비보편〉의 분석-신라통일기⋅고려시대 사원경제의 한 사례-」,『역사와현실』8,이인재,한국역사연구회,1992.
저서
『한국 중세 영남불교의 이해』, 김윤곤,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1.

관련 이미지

통도사 국장생 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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