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고려 시대농장의 확대와 상업

권문 세족의 횡포

(충혜왕 복위 4년) 9월에 첨의평리(僉議評理) 강윤충(康允忠, ?~1359)을 양광⋅전라⋅경상 3도 문민질고사(問民疾苦使)로, 찬성사 윤환(尹桓, ?~1387)을 강릉교주도도순문사(江陵交州道都巡問使)로, 우상시(右常侍) 전윤장(全允藏)을 서해평양도 순위사(西海平壤道巡慰使)로 삼았다. 이때 민환(閔渙, ?~1362)은 불량배를 각 도에 나누어 파견해서 역마를 타고 다니며 가혹하게 거두어들여, 산해세(山海稅)를 징수하거나 무당과 장인에게 공포(貢布)를 징수하기도 하니,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였다. 강윤충이 불량배들을 잡아서 서울로 올려 보내 순군옥에 가두니, 왕이 노하여 민환을 내쫓았으나 얼마 안 가서 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총애를 받았다.

『고려사절요』권25, 충혜왕 후 계미 4년 9월

우(왕)이 화원(花園)에서 말을 조련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물푸레나무[水靑木] 공문(公文)을 가져오라. 내가 장차 이 말을 길들이겠다” 하였다. 당시 이인임⋅임견미⋅염흥방이 그 악한 종을 풀어놓아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모두 물푸레나무로 때리고 빼앗았다. 그 주인이 비록 관아에서 발급한 문권이 있더라도 감히 항변하지 못하니, 이때 사람들이 이것을 수정목공문이라 하였다. 우(왕)이이를 듣고 미워하였기 때문에 말할 때마다 그것을 언급하였다.

『고려사절요』권32, 신우3 을축 11년 11월

九月, 以僉議評理康允忠爲楊廣全羅慶尙三道問民疾苦使, 贊成事尹桓爲江陵交州道都巡問使, 右常侍全允臧爲西海平壤道巡慰使. 時閔渙分遣惡小諸道, 馳驛誅求, 或收山海稅, 或徵巫匠業中貢布, 民不堪苦. 允忠執送惡小, 囚巡軍, 王怒黜渙, 未幾, 召之復得幸焉.

『高麗史節要』卷25, 忠惠王 後 癸未 4年 9月

禑調馬于花園, 顧左右曰, 將水靑木公文來. 予將制此馬. 時李仁任⋅林堅味⋅廉興邦縱其惡奴, 人有良田, 率以水靑木, 杖而奪之. 其主雖有公家文券, 莫敢與辦, 時人謂之水靑木公文. 禑聞而惡之, 故每言及之.

『高麗史節要』卷32, 辛禑 3 乙丑 11年 11月

이 사료는 고려 말 권문세족의 권력 남용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권문세족은 남의 땅을 약탈⋅강점하거나 기진⋅모사수패⋅투탁⋅고리대⋅개간 등을 통해 토지를 늘렸다. 사패(賜牌)는 국가에서 토지와 노비의 합법적인 소유를 인정하면서 발행한 문서이다. 정부는 몽골과의 전쟁으로 농토가 황폐해져 관리들에게 수조권을 지급하기 어려워지자, 대신 사패와 더불어 황폐해진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 토지는 개간한 사람이 소유자 겸 수조권자가 되었다. 권문세족은 사패를 위조하거나 받은 것처럼 속여 사유지를 늘리는 한편, 고리대 빚을 갚지 못하는 농민의 토지를 빼앗았다. 또한 자신의 소유지를 받아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고 농장을 운영하였으며,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을 협박하여 노비로 만들거나 불법적으로 관노를 이용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지윤(池奫, ?~1377)이었다. 그는 미천한 출신이면서도 군공을 쌓아 출세하여 이인임(李仁任, ?~1388)의 일파가 되어, 뇌물을 받아 인사를 처리하고 토지를 약탈하는 등 권력 남용과 부정⋅불법을 저질렀다.

임견미(林堅味, ?~1388)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는 물푸레나무 채찍을 휘두르며 남의 땅을 마구 빼앗아 당시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수정목공문(水精木公文)’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또한 염흥방(廉興邦, ?~1388)은 노비를 시켜 선비인 조반(趙胖, 1341~1401)의 토지를 빼앗았으며항거하는 조반을 가두고 심하게 국문하기도 하였다. 조반은 염흥방의 가노인 이광과의 토지 분쟁 끝에 그를 죽였는데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누명을 썼다. 그러한 사실을 염흥방은 모두 알고 있음에도 그의 가노들이 저지른 토지 점탈로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조반에게 역모를 꾸몄다고 죄를 뒤집어씌웠던 것이다. 사실 가노들을 이용하여 토지를 빼앗는 일은 당시 권세가의 토지 집적 수단이었고, 이를 수행한 가노나 그들에게 연줄이 닿은 이들은 주인의 세력을 믿고 전직 고위 관료나 현직 지방관조차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 ‘조반 역모 사건’이었다.

이러한 일도 있었다. 염흥방의 가노들이 부평에 거주하면서 주인의 세력을 믿고 횡포를 부리자, 부사 주언방(周彦邦)이 아전과 병정을 시켜 그들을 잡게 하였는데, 오히려 가노들이 주민 40여 명을 데리고 아전을 구타하여 거의 죽을 지경으로 만들었다. 주언방이 직접 가자 가노들이 이번에는 주언방마저 구타하고 데려간 두 명의 하인까지 마구 때려 이를 부러뜨렸다. 우왕(禑王, 재위 1374~1388)이 관리를 파견하여 가노들을 체포해 처벌하였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왕이 직접 나설 정도로 당시 권세가의 힘은 대단하였다.

결국 최영(崔瑩, 1316~1388)은 1388년(우왕 14년) 이성계(李成桂, 1335~1408)와 함께 임견미⋅염흥방 일당을 숙청하고 이인임을 축출하였다.

조반 사건을 계기로 고려 정부에서는 사전 개혁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이 과정에서 권문세족 일당이 몰락하고 신진 개혁 세력이 권력을 차지하였다. 이들의 주도로 과전법이 수립되면서, 고려 왕조는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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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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