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전기과전법의 시행과 변화

과전법의 시행

3년 5월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왕에게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과전법을 제정할 것을 요청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문종 때에 정한 바에 의하여 경기 주군(京畿州郡)으로 결정된 고을들을 좌우도(左右道)로 나누어 설치한다. 1품으로부터 9품과 산직(散職) 관원에 이르기까지를 나누어서 18과(科)로 한다. 경기와 6도(六道)의 토지를 모두 답험타량(踏驗打量)하여 경기에서는 실전(實田) 13만 1755결, 황원전(荒遠田) 8387결을, 그리고 6도에서는 실전 49만 1342결, 황원전 16만 6643결을 얻어 내었다. 이것들을 일정한 수량에 따라 작정(作丁)하되 정(丁)마다 각각 글자 번호를 붙여 토지 대장[籍]에 기재하나 공사(公私)의 지난 시기의 토지 대장들은 회수하여 철저히 검토하며 그 진실과 거짓을 규명하고 옛 토지에서 가감된 바에 따라 능침(陵寢), 창고(倉庫), 궁사(宮司), 군자시(軍資寺) 및 사원(寺院), 외관직전(外官職田, 외록전), 늠급전(廩給田), 향(鄕), 진(津), 역리(驛吏), 군(軍), 장(匠), 잡색(雜色)의 전을 결정한다. 경기는 전국의 근본으로 되는 땅이니 마땅히 여기에다 과전(科田)을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한다. 대체로 경성(즉, 개성)에 살면서 왕실을 보위하는 자는 시산(時散)을 따지지 않고 저마다 등급에 따라 토지를 받는다.

제1과 재내대군(在內大君)으로부터 문하시중에 이르기까지 150결.

제2과 재내부원군(在內府院君)으로부터 검교 시중(檢校侍中)에 이르기까지 130결.

제3과 찬성사(贊成事) 125결.

제4과 재내 여러 군[諸君]으로부터 지문하(知門下)에 이르기까지 115결.

제5과 판밀직(判密直)으로부터 동지밀직(同知密直)에 이르기까지 105결.

제6과 밀직부사(副使)로부터 제학(提學)에 이르기까지 97결.

제7과 재내 원윤(元尹, 왕의 친척에게 주는 정2품 관직)으로부터 좌우 상시(常侍)에 이르기까지 89결.

제8과 판통례문(判通禮門)으로부터 제시판사(諸寺判事)에 이르기까지 81결.

제9과 좌우 사의(司議)로부터 전의정(典醫正)에 이르기까지 73결.

제10과 6조(六曹) 총랑(摠郞)으로부터 제부소윤(諸府少尹)에 이르기까지 65결.

제11과 문하사인(門下舍人)으로부터 제시, 부정(副正)에 이르기까지 57결.

제12과 6조 정랑(正郞)으로부터 화녕판관(和寧判官)에 이르기까지 50결.

제13과 전의시승(典醫寺丞)으로부터 중랑장(中郞將)에 이르기까지 43결.

제14과 6조 좌랑(佐郞)으로부터 낭장(郞將)에 이르기까지 35결.

제15과 동서(東西, 동반 문반, 서반 무반) 7품 25결.

제16과 동서 8품 20결.

제17과 동서 9품 15결.

제18과 권무(權務, 임시적인 직무를 맡은 관직), 산직(散職) 10결.

외방(外方)은 왕실을 수호하는 지방이니 마땅히 군전(軍田)을 두어서 군사를 길러야 한다. 동서 양계는 이전대로 그 토지의 조세를 받아 군수 물자에 충당케 한다. 6도(六道)의 한량과 관리(官吏)들은 그 자품(資品)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그 본전(本田)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각각 군전 10결 또는 5결을 준다.

금년 즉 신미년에 토지를 받았으되 규정된 과(科)의 면적[結數]에 부족한 자, 신미년 이후에 새로 와서 벼슬살이 하는 자로서 토지를 받지 못한 자에게는 할아버지나 아버지 때의 문계(文契)가 있고 없는 것을 논하지 않고 혹 죄를 범한 자, 혹 후계자가 없는 자, 혹은 과외(科外)의 여전(餘田)을 받은 자는 그 토지들을 과(科)에 따라서 교체하여 받는다. 일정한 직무가 없는 한량관(閑良官)은 이 조항의 적용에서 제외된다. 경기의 황원전, 개간전은 일정한 직무가 있어 벼슬살이를 하는 자가 관청에 신고하고 작정(作丁)하여 과(科)에 따라 받는다.

대체로 땅을 받은 자가 죽은 후에 그 아내에게 자식이 있고 수신(守信)을 한다면 남편의 과전 전부를 전해 받으며 자식이 없이 수절하는 자는 절반을 전해 받는다. 본래부터 수절한 자가 아니라면 이 조항에서 제외된다. 부모가 다 죽고 자손이 어리거나 20세 미만인 자라면 도리상 응당히 가엾게 여겨 부양해 주어야 할 것이므로 그 아버지의 과전 전부를 전해 받게 하되 나이 20세가 되기를 기다려 각각 해당한 과에 따라서 토지를 지급한다. 여자는 남편이 결정되면 과에 따라서 받게 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 토지는 다른 사람들이 교체하여 받게 된다.

군전을 받은 자가 서울에 올라가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면 경기의 토지를 과에 따라서 받는 것을 허용한다. 군(軍), 향리(鄕吏) 및 온갖 역(役)을 진 자 중에 만일 늙어 병으로 죽었는데 그 후계자가 없는 자, 본래의 을 도피한 자, 서울에 가서 벼슬살이 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을 대신하여 맡은 자가 그의 토지를 교체하여 받는다.

경오년(1390, 공양왕 2)에 받은 공신전(功臣田)은 과외(科外)로 쳐서 자손들에게 상속하는 것을 허락한다. 과가 올라서 밭을 더 받음에 따라 새로 공문을 만들게 되는 자는 원래의 문서〔原券〕에다 실로 꿰매어 합쳐서 1통(通)으로 만들 것이며 따로 문서를 작성하지 못한다. 부모의 토지를 나누어 받는 경우에는 그 원래의 문서를 관청에다 바치면 관청에서는 붉은 글씨로 그 위에다가 “아무 정(丁)은 아무 아들, 아무 손자가 받는 것이다”라고 표식을 달고 붉은 글씨로 지워 버린 원래의 문서는 큰아들에게 돌려준다. 비록 토지는 적고 아들은 많다고 하더라도 정(丁)을 쪼개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감하여 자손 및 타인에게 주는 경우로는 아버지가 죽고 그 아들이 받을 과전 이외의 남는 토지, 남편이 죽고 자식이 없어서 남편이 받던 과전의 절반을 감하는 경우가 있는데 본래의 문서에다 표식을 달고 위의 경우와 같이 붉은 글씨로 지우고 그 본래의 문서는 그 주인(즉, 본래 받았던 자 및 그 후계자)에게 돌려준다. 토지를 모조리 타인에게 줄 경우에는 관청에 말하여 교체하여 지급하게 하고 본래의 문서는 관청에 반납한다. 대체로 족과수전(足科受田) 자가 부모가 죽은 이후 자기의 과전을 부모의 과전과 바꾸려고 원하는 경우에는 이를 허용한다. 죄를 범한 자 및 후계자 없이 죽은 자의 공문(公文)을 그 집안사람이 감추어 두고 관청에 바치지 아니 할 경우에는 그 죄를 엄격히 다스린다. 평민은 사원이나 신사(神祠)에 토지를 시주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한 자는 그 죄를 다스린다.

이미 경오년 이전의 공사(公私) 토지 문서는 모두 불태워 없애 버렸는데 감히 사사로이 간직하는 자가 있으면 국법(國法)을 파괴한 죄로 논하여 그 재산을 몰수한다. 금후부터는 일체 사전(私田)이라는 명칭이 붙은 토지는 그 주인이 비록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몰수하여 공전(公田)으로 만들지 못한다. 죄를 범한 경우에는 그 토지를 응당 받을 만한 자가 각각 자기의 과에 따라서 교체하여 받게 한다. 장형(杖刑) 이상의 형벌을 받을 죄를 범하고 사첩(謝貼)을 회수당한 자, 기공(期功) 이상의 친척에게 시집 간 자, 한량관이 부모의 초상 장사, 자기의 질병 이 외에 변고 없이 3군 총제부(三軍摠制府)에 가서 숙위(宿衛)하지 않은 지가 만 100일 된 자, 동성(同姓)간에 결혼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난 뒤에 그렇게 한 자, 수신전(守信田)을 받은 후에 다시 시집 간 자, 전지를 가지고도 공문을 작성하지 않은 자, 본인이 죽고 처자가 없는 자, 이러한 자들의 토지는 모두 다른 사람이 관청에 신고〔陳告〕하고 과에 따라서 받는 것을 허용한다. 공사(公私)의 천구(賤口), 공(工), 상(商), 돈 받고 점을 치는 맹인(盲人), 무격(巫覡), 창기(倡妓), 중[僧尼]들은 자기 자신 및 자손이 모두 토지 받은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공사의 전조(田租)는 매 논 1결에 조미(糙米) 30말, 밭 1결에 잡곡 30말로 한다. 이 밖에 비법적으로 징수한 자는 장물[贓]로 취급하여 처벌한다. 능침(陵寢), 창고(倉庫), 궁사(宮司), 공해(公廨), 공신전(功臣田)을 제외하고 무릇 토지를 가진 자는 모두 세(稅)를 바친다. 세는 논 1결에 백미(白米) 두 말, 밭 1결에 콩(黃豆) 두 말로 한다. 구경기(舊京畿)의 토지에서 나오는 세는 요물고(料物庫)에 바치고 신(新) 경기및 지방의 토지에서 나오는 세는 풍저창(豊儲倉)과 광흥창(廣興倉)에 나누어 바친다. 경기의 공전 및 사전의 4표(四標) 안에 개간하지 않은 땅이 있으면 백성들이 땔나무를 하거나 가축을 먹이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을 하거나 하는 것을 허용하고 이를 금지한 자는 그 죄를 다스린다. 밭주인〔田主〕으로서 작인이 경작하는 있는 땅 1~5부(負)를 빼앗는 자는 태형(볼기 치는 벌) 20대에 처하고 5부가 많아질 때마다 죄를 한 등급씩 높여서 장형(杖) 80에 이르기까지의 처벌을 적용하지만 밭주인의 직첩(職牒)은 회수하지 않는다. 밭주인이 경작자의 경지 1결 이상을 빼앗았을 때에는 그 정(丁)을 다른 사람이 교체하여 받는 것을 허용한다. 경작자는 그가 경작하고 있는 토지를 별호(別戶)의 사람에게 자기 마음대로 판다거나 마음대로 줄 수 없다. 만일 사망하거나 이사하거나 호가 없어진 자나 남은 땅을 많이 차지하여 고의로 황무지를 만들어 버린 자가 있으면 그 토지를 밭주인이 임의로 처분하는 것을 허용한다.

기사년(공양왕 원년, 1389)에 밭을 잴 때 미처 측량하지 못하였던 바닷가 및 바다 섬의 토지, 측량할 때 누락된 토지, 측량이 정해진 법과 같이 되지 못하여 남게 된 토지〔餘剩田〕, 새로 개간한 토지는 각 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가 매년 그런 토지가 있다는 것을 안 즉시 관원을 파견하여 실제 조사하게 하고 작정(作丁)하여 토지 대장에 계속하여 올리고 주장관(主掌官)에 보고하여 군수에 충당하게 하며, 여러 사람이 제멋대로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반한 자는 그 죄를 다스린다.

신미년에 토지를 받은 이후 자기 과 이 외에 비법적으로 더 받은 자 및 공전 또는 사전을 침범하여 빼앗은 자는 법률에 따라서 그 죄를 결정하고, 그가 받았던 토지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교체하여 받게 한다. 만일 도적질을 하였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증거도 없이 허망하게 고발하거나 벼락, 맹수, 수재, 화재, 도적 등으로 손해가 난 것을 그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라고 죄명을 만들어 타인의 토지를 빼앗으려고 시도하는 자는 엄격히 금지하며 죄를 다스린다. 만일 많은 군대를 출동시켜 그 군량이 부족할 때는 공전이나 사전을 불문하고 비용의 다소에 따라 그때에 수량을 결정하여 국가에서 전조를 회수하여 군량 용도에 지출하며 사변이 없어지면 이것을 중지한다.

『고려사』권78, 「지」32 [식화1] 전제 녹과전

三年五月, 都評議使司上書, 請定給科田法, 從之. 依文宗所定, 京畿州郡, 置左右道, 自一品, 至九品散職, 分爲十八科. 其京畿六道之田, 一皆踏驗打量, 得京畿實田十三萬一千七百五十五結, 荒遠田八千三百八十七結, 六道實田四十九萬一千三百四十二結, 荒遠田十六萬六千六百四十三結. 計數作丁, 丁各有字號, 載之于籍, 拘收公私往年田籍, 盡行檢覆, 覈其眞僞, 因舊損益, 以定陵寢⋅倉庫⋅宮司⋅軍資寺, 及寺院⋅外官職田⋅廩給田, 鄕⋅津⋅驛吏⋅軍⋅匠⋅雜色之田. 京畿, 四方之本, 宜置科田, 以優士大夫. 凡居京城衛王室者, 不論時散, 各以科受.

第一科, 自在內大君, 至門下侍中, 一百五十結. 第二科, 自在內府院君, 至檢校侍中, 一百三十結. 第三科, 贊成事, 一百二十五結. 第四科, 自在內諸君, 至知門下, 一百十五結. 第五科, 自判密直, 至同知密直, 一百五結. 第六科, 自密直副使, 至提學, 九十七結. 第七科, 自在內元尹, 至左右常侍, 八十九結. 第八科, 自判通禮門, 至諸寺判事, 八十一結. 第九科, 自左右司議, 至典醫正, 七十三結. 第十科, 自六曹摠郞, 至諸府少尹, 六十五結. 第十一科, 自門下舍人, 至諸寺副正, 五十七結. 第十二科, 自六曹正郞, 至和寧判官, 五十結. 第十三科, 自典醫寺丞, 至中郞將, 四十三結. 第十四科, 自六曹佐郞, 至郞將, 三十五結. 第十五科, 東西七品, 二十五結. 第十六科, 東西八品, 二十結. 第十七科, 東西九品, 十五結. 第十八科, 權務⋅散職, 十結.

外方, 王室之藩, 宜置軍田, 以養軍士, 東西兩界, 依舊充軍需. 六道閑良⋅官吏, 不論資品高下, 隨其本田多少, 各給軍田十結, 或五結.

今辛未年, 受田科不足者, 辛未年以後, 新來從仕, 未受田者, 不論祖父文契有無, 將其或犯罪, 或無後, 或科外餘田, 隨科遞受. 無所任閑良官, 不在此限. 京畿荒遠之田, 開墾之田, 有職事從仕者告官, 作丁科受.

凡受田者, 身死後, 其妻有子息守信者, 全科傳受. 無子息守信者, 减半傳受, 本非守信者, 不在此限. 父母俱亡, 子孫幼弱者, 理合恤養, 其父田全科傳受, 待年二十歲, 各以科受. 女子則夫定科受, 其餘田, 許人遞受. 受軍田者, 赴京從仕, 則許以科受京畿之田. 軍鄕吏, 及諸有役人, 如有老病死亡無後者, 逃避本役者, 赴京從仕者, 則代其役者, 遞受其田.

庚午年受賜功臣之田, 許於科外, 子孫相傳. 凡加科受田, 新作公文者, 繳連原卷, 合爲一通, 毋得另作文卷. 分父母田者, 原卷納官, 朱筆標注其上曰, ‘某丁某子某孫所受’, 仍勾銷之原卷, 還長子. 雖田少子多, 不許破丁. 减自己田, 與子孫及他人者, 父沒, 其子科外餘田, 夫沒無子, 减半田, 於原卷, 標注勾銷如上, 原卷還其主. 盡以其田, 與他人者, 告官遞給, 原卷還官. 凡足科受田者, 父母沒後, 願以其田, 易父母田者, 聽. 犯罪及無後者之公文, 其家人隱匿不納官者, 痛行理罪. 凡人毋得施田於寺院神祠, 違者理罪.

已將庚午年已前公私田籍, 盡行燒毁, 敢有私藏者, 以毁國法論, 籍沒財産. 今後, 凡稱私田, 其主雖有罪犯, 不許沒爲公田. 犯應受者, 各以科遞受. 其犯杖以上罪, 謝貼收取者, 犯嫁期功以上親者, 閑良官, 除父母喪葬疾病外, 無故, 不赴三軍摠制府宿衛, 百日已滿者, 判禁已後, 同姓爲婚者, 受守信田, 再嫁者, 有田地, 不作公文者, 身死無妻子者, 其田幷許人陳告科受. 公私賤口⋅工⋅商⋅賣卜盲人⋅巫覡⋅倡妓⋅僧尼等人, 身及子孫, 不許受田.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穀三十斗, 此外有橫歛者, 以贓論. 除陵寢⋅倉庫⋅宮司⋅公廨⋅功臣田外, 凡有田者, 皆納稅, 水田一結, 白米二斗, 旱田一結, 黃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豐儲⋅廣興倉. 京畿公私田, 四標內, 有荒閑地, 聽民樵牧漁獵, 禁者理罪. 田主奪佃客所耕田, 一負至五負, 笞二十, 每五負, 加一等, 罪至杖八十, 職牒不收. 一結以上, 其丁, 許人遞受. 佃客毋得將所耕田, 擅賣擅與, 別戶之人. 如有死亡⋅移徙⋅戶絶者, 多占餘田, 故令荒蕪者, 其田, 聽從田主任意區處.

己巳年, 不及打量海濱海島田, 打量時脫漏田, 打量不如法, 餘剩田, 新開墾田, 各道都觀察使, 每年, 隨卽差官, 踏驗作丁, 續書于籍, 申報主掌官, 以充軍需, 不許諸人擅占, 違者理罪.

辛未年, 受田後, 科外冒受, 及侵奪公私田者, 依律決罪, 所受科田, 許人遞受. 如有妄告他人無證奸盜等事, 又以雷電猛獸水火盜賊所害, 指爲罪名, 規奪人田者, 痛行禁理. 如有調發大軍, 糧餉不足, 不問公私田, 隨費多少, 臨時定數, 公收支用, 無事則止.

『高麗史』卷78, 「志」32 [食貨1] 田制 祿科田

이 자료는 1391년(공양왕 3년)에 제정된 과전법에 관한 내용으로, 『고려사』식화지에 수록되어 있다. 식화지는 역대 정사(正史) 속에 있는 각 왕조의 재정 관계 기록 편을 지칭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역사서에서는 유일하게 『고려사』 권78⋅79⋅80에 식화지 1⋅2⋅3이 편제되어 있다.

과전법은 조선 초기 양반 사회의 경제 기반을 이루던 토지 제도로, 고려 말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농민들에게 무리한 부담을 안겨 주었던 사전(私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토지 개혁으로 실시되었다. 이러한 토지 개혁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의 개창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조준(趙浚, 1346~1405) 등 급진 개혁파들이 ‘백성의 숫자를 세어서 적당한 크기의 토지를 나누어 주려는 계민수전(計民授田)’의 원칙은 대토지 소유자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1388년(우왕 14년) 토지 조사를 실시한 다음 새로운 전적(田籍)을 나누어 주고 옛날의 공사 전적을 소각하는 조치를 취하였으며, 1391년(공양 3년) 5월에는 그동안 추진한 토지 제도 개혁의 내용을 ‘과전법’이라는 이름으로 공포하였다.

제정된 과전법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사전을 경기 지역에 한정하여 수조권을 나누어 주는 원칙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경기 지역을 확장하여 관인층의 사전을 이 지역에 한하여 나누어줌으로써 사전의 불법적 확대를 방지함은 물론, 외방에서 호강(豪强 ) 세력이 발호하는 것을 억제하여 사회 경제적으로 중앙 집권화를 한층 더 실현하고자 하였다.

과전법에서 과전(科田)은 문무 관료에게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해 시(時)⋅산(散), 즉 현직자와 퇴직자 또는 대기 발령자를 막론하고 18과(科)로 나누어 10결(結)부터 150결의 전지(田地)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또 6도의 한량(閑良) 관리들에게 5~10결의 토지를 군전(軍田)으로 분급하도록 했는데, 이는 보편적으로 군인에게 군역의 반대급부로 절급한 것이 아니라 각 지방의 유력 관인층에게 절급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국가 직역인 군역(軍役)을 국가가 절급하는 토지의 지배와는 무관하게 부과하고 수취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또 자기 과등보다 부족하게 수전한 자나 새로 관직에 종사하게 된 관인의 경우에도 수조지(收租地)를 절급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과전은 본래 1대에 한해 분급했으나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에 관한 규정을 두어 세습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과전법이 관인층의 관직 자체를 세습적으로 지켜 가게 할 수는 없어도 관인으로서의 신분 자체는 보전해 가도록 설정해 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수신전휼양전의 규정은 한 번 절급된 과전은 회수하기 어려운 세전적(世傳的) 성격을 띠었으며, 그와 같은 세전성은 사전의 만성적 부족 현상을 초래하였다. 공신전의 경우에도 자손에게 상속하는 것을 허락하는 규정을 두었다.

고려 말 전제 개혁 과정에서 1390년(공양왕 2년)에 이미 공사의 전적을 모두 불태워 그 동안의 사전을 혁파하였고, 과전법에 따라 수조지로서의 사전을 분급하였으므로 그 이전의 사전은 전혀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것은 형식적으로는 고려 말의 전제 개혁이 개인 수조지의 사전을 혁파하고 억제한다는 원칙을 견지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농업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토지 소유권의 성장이란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토지 소유 관계가 그 수조 관계보다 현실적 의미를 더 크게 가지는 것으로, 이러한 사전 개혁은 불법적으로 범람하던 사전을 혁파한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성장해 온 토지의 소유 관계까지 변형시킬 수는 없었으며, 이로 인해 토지 국유(國有)의 관념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과전법 시행 당시 사전으로 설정된 토지는 이후 그 절수자(折收者)가 죄를 범하여 당해 전지를 몰수하게 되더라도 공전으로 편입하지 못하며, 또한 가벼운 죄의 경우 자기 과에 따라 응당 수전하도록 하는 규정도 두고 있다. 또 사전을 절수할 관인의 수에 비해 사전의 절대 액수가 항상 부족하던 상황에서 국가로서는 환수해야 할 사전의 구체적인 실상을 자세히 알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례가 생겼을 때 그것을 먼저 발각하여 신고하는 자에게 우선 절급하는 법을 만들기도 하였다.

산림⋅초지⋅천택⋅수렵장 등의 묵힌 땅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공동체적 이용을 개방한다는 규정도 두고 있다. 이는 소농민 경영의 재생산 지반 유지에 필요불가결한 조건이었다. 또 왜구의 침해로 서남해안 지역에서는 양전(量田) 사업을 하지 못해 과전법이라는 전국적 법제를 시행하기 위해 전국의 전지를 모두 파악하여 운용하고자 하였으며, 새로 확보한 토지는 국가 수조지로 편성하여 군수에 충당하고자 하였다.

조세 규정은 공⋅사전을 막론하고 수조권자에게 바치는 조(租)는 매 1결당 10분의 1조인 30두였으며, 전주(田主)가 국가에 바치는 세(稅)는 매 1결당 2두였다. 이것은 조세의 근원적 수취권은 언제나 국가가 보유한다는 원칙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조의 부과는 경차관(敬差官)이나 사전의 전주가 매년 농사 작황을 실제로 답사해 정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으로 정하였다.

과전법은 수조권적 토지 지배의 인습을 반영하였다. 이것은 토지 소유자를 단순한 경작자인 전객(佃客)으로, 소유 및 경작지를 소경전으로, 수조권자를 전주라고 규정한 점에서 잘 나타난다. 이것은 토지 국유 사상에서 비롯된 전통적 의제적 관념이 전제 개혁이라는 변동기에 지배층의 의사에 따라 다시 법제적 개념으로 확인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지 지배 관계는 현실적으로 국유가 아닌 개인의 소유를 기축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었으며, 전객이 법에 따른 전주의 수조권 행사를 침해하지 않는 한 토지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와 관리는 기본적으로 그것의 소유자 겸 경작자인 전객 개인의 소관이었다.

분급수조지로 설정된 토지를 그 소유⋅경작자가 임의로 매매하거나 증여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토지 지배 관행으로 매우 특이한 상황이었으며, 경작자가 함부로 변동되는 것을 방지하여 전주의 수조권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규정이었다. 그러나 개인 소유의 매매⋅증여는 법으로 금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1424년(세종 6년)에 가서는 그 규정이 철폐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과전법의 성립과 그 성격」,『한국사연구』37,김태영,한국사연구회,1982.
「고려말의 사전구폐책과 과전법」,『동방학지』42,이경식,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1984.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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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농업경제사』, 이호철, 한길사, 1986.
『근세조선사연구』, 천관우, 일조각, 1979.
편저
「토지제도」, 김태영, 국사편찬위원회, 2003.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 한국농업사학회 편, 국학자료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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