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전기과전법의 시행과 변화

관수관급제

(대왕대비가) 전지하기를, “사람들이 직전(職田)이 폐단이 있다고 많이 말하기에 대신에게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대부봉록(俸祿)이 박하여 직전을 갑자기 혁파할 수 없다’ 하므로, 나도 또한 그렇게 여겼는데, 지금 들으니 조정 관원이 그 세(稅)를 지나치게 거두어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긴다 한다. ……(중략)……” 하였다.

한명회 등이 아뢰기를, “직전의 세(稅)는 관에서 거두어 관에서 주면(官收官給) 이런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중략)……” 하였다. 전지하기를, “직전의 세는 소재지의 관리로 하여금 감독하여 거두어 주게 하고, 나쁜 쌀을 금하지 말며, 제향 아문(祭享衙門)의 관리는 금후로는 가려서 정하라” 하였다.

성종실록』권4, 1년 4월 20일(무진)

傳曰, 人多言職田有弊, 故議諸大臣, 皆曰, 我國士大夫俸祿微薄, 職田未可遽革. 予亦以爲然. 今聞朝士家, 濫收其稅, 民甚病之. ……(中略)…… 明澮等啓曰, 職田稅, 官收官給, 則無此弊矣. ……(中略)…… 傳曰, 職田稅, 令所在官監收給之. 惡米勿禁. 祭享衙門官吏, 今後擇差.

『成宗實錄』卷4, 1年 4月 20日(戊辰)

이 사료는 1470년(성종 1년) 그동안의 조세 수취에 대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시행한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에 관한 내용이다. 조선 전기 과전법의 시행 과정에서 수조권자의 과도한 전조(田租) 수취와 이에 저항하는 농민층의 항거가 뒤따랐는데, 정부는 이에 대해 국초부터 여러 규정과 대책을 마련하여 양자의 대립을 완화, 조정해 왔다. 대책은 소유권자에게도 취해졌지만 대부분 과전 전주(佃主)수조권 행사에 대한 제약으로 나타났다. 수조권자의 전조남징(田租濫徵)은 직전법(職田法)이 시행된 이후 한층 도가 심해졌다. 수조권이 재직 기간에만 허용된 까닭이기도 하였다. 직전의 시행을 강행한 정부가 이 문제를 방치하면서 직전 시행의 성과마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1469년(예종 1년) 2월 전조를 지나치게 받는 자에 대해서는 직전 몰수까지 불사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10월에는 종래 수조 증서인 직전관문(職田關文)을 전주가 각기 보관하며 수조해 오던 방식을 이후부터는 수조 후 2월 말까지 본인이 소속한 관청에 반납했다가 10월에 가서 환급받아 수조하도록 하였다. 이때에도 반드시 호조를 거쳐 확인을 받은 뒤에 수조해야 했다. 수조 증서를 사유할 권리마저 빼앗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규정이 가진 구속력은 사전 전주의 직접 수조를 전제로 한 범위 내에서 작용하는 것이어서 전조 수취의 자의성이 근절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전조를 지나치게 징수하는 것은 여전하였고, 농민의 반발과 항거 또한 증대하였다. 그만큼 과전으로의 복귀를 요구하는 주장도 거세게 대두하였다.

직전 설치 5년이 지난 1470년(성종 1년) 4월 정부는 직전의 수조권를 관에서 직접 수취하여 전주에게 지급하는 정책을 확정하였다. 이른바 관수관급제였다. 전조 전조는 전객이 직접 경창(京倉)에 납부하고 정부는 녹봉 지급 때 수조권자에게 수납한 전조를 지급하였다. 이렇게 하면 전객들이 전조를 전주에게 직접 납부하는 데 따르는 여러 가지 고역을 면하고, 전조를 지나치게 많이 거두는 폐해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 제도는 전조의 수취뿐 아니라 곡초(穀草)의 가격 징수에서도 시행되었다. 초가는 수조권 행사의 주요한 부분으로서 그 액수가 거의 전조와 필적할 정도로 전객 농민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이 제도가 전객 농민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자 연이어 공신전⋅별사전⋅사사전에도 확대 시행됨으로써, 모든 수조지에서의 수취는 관수관급제에 의해 시행되었다. 이와 같은 전주의 직접 수취를 폐지한 것은 직접 답험하던 제도의 폐기와 함께 토지에 대한 전조의 직접적인 권리 행사가 차단된 것이다. 수조권은 토지 점유권의 또 하나의 근거를 잃어버린 것이다.

전객 농민이 직접 납부하는 방식의 시행으로 곧바로 농민 부담이 감소된 것은 아니었다. 전객 가운데는 운반에 3~4일이 소요되고 경창에 수납 시 수납 비용이 전조보다 많이 들어가 전주에게 수납하고자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수조권과 소유권의 대립, 양반 관료층과 경작 농민층과의 상쟁을 기반으로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어 오던 전조와 곡초의 가격 징수는 관수, 즉 전객이 직접 납부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농민층의 성장이며 소유권의 안정화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약화되어 가던 수조권마저 지급이 중단되어 가고 있었다.

직전의 부족 현상은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초부터 큰 문제였으며, 직전 분급이나 추가 분급의 곤란, 전조 지급의 간헐적 중단 등의 사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직전제의 존속을 어렵게 하는 사태는 경기 내 직전 총량의 감소로 나타났다. 또 1555년(명종 10년)에는 극심한 재정 부족으로 인해 분급액 자체를 다시 감축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이듬해 6월에는 직전 자체를 폐지하였다. 직전 분급의 중지는 을묘왜변을 비롯한 외적의 침입으로 인한 재정의 난국 때문이었지만 관료에게도 직전은 이미 경제적 비중이 크지 않았다. 관료의 경제 기반이 소유권의 집적을 통한 대토지 사유에 있었던 것이다. 직전 폐지는 과전 제도, 나아가서는 삼국 시대 이래 장구한 세월 동안 지속되어 온 토지 분급제의 사실상 소멸을 의미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전기 직전제의 운영과 그 변동」,『한국사연구』28,이경식,한국사연구회,1980.
「조선초기 사패전의 확대와 전제의 변화」,『한국사학보』11,이숙경,고려사학회,2001.
저서
『조선전기 토지제도사연구』, 김태영, 지식산업사, 1983.
『한국중세 토지제도사』, 이경식,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고려 말 조선 초 사패전 연구』, 이숙경, 일조각, 2007.
『조선전기농업경제사』, 이호철, 한길사, 1986.
편저
「토지제도」, 김태영, 국사편찬위원회, 2003.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 한국농업사학회 편, 국학자료원, 2003.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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