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제(摠制) 정초(鄭招) 등에게 명하여 『농사직설』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 서문에,
“농사는 천하와 국가의 으뜸가는 근본이다. 예로부터 여기에 힘쓰지 않은 성왕(聖王)은 없었다. 순(舜) 임금이 9관(官)1)
과 12목(牧)에게 명하실 적에 가장 먼저 ‘먹는 것은 (농사를 짓는) 시기에 달렸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나라의 큰 제사에 쓸 제수를 갖춘다든지 생계를 위한 먹거리를 마련한다든지 하는 것은 이를 떠나서는 어찌해 볼 길이 없는 것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태종 공정대왕(恭靖大王)
께서 일찍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시어 옛날 농서(農書)에서 적절히 쓰이는 말들을 뽑아서 향언(鄕言)
에게 명하여 주현의 노농(老農)들을 찾아가 묻고 농토의 이미 시험한 경험을 갖추어 아뢰게 하셨다. 또 신(臣) 정초에게 순서에 따라 정리하게 종부소윤(宗簿少尹) 변효문(卞孝文)과 더불어 교열하고 참고하여 그 중복된 것을 버리고 그 절실하고 중요한 것만 뽑아서 찬집하여 한 편(編)을 만들게 하고 제목을 『농사직설』이라고 하였다. 농사 외에는 다른 설(說)은 섞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하는데 신경을 써서, 산과 들의 백성도 환히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미 전하께 바치고 주자소(鑄字所)에 내려서 몇 개의 본을 인쇄하였으니 장차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여 백성을 인도하여 살림을 넉넉하게 해서,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해질 것이다. 신이 『주시(周詩)』2)
를 보건대, 주나라[周家]에서도 농사로써 나라를 다스려 800여 년의 오랜 세월에 이르렀는데, 지금 우리 전하께서도 이 나라 백성을 은혜로 보살피시니 나라를 위한 염려가 어찌 후직(后稷)·성왕(成王)이 헤아린 수준과 동일하지 않겠는가. 이 책이 비록 작더라도 그 이익이 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
9관(官) : 순제(舜帝)는 중국 상고시대의 순(舜)임금을 말하며, 그는 사공(司空)·후직(后稷)·사도(司徒)·사(士)·공공(共工)·우(虞)·질종(秩宗)·전악(典樂)·납언(納言)의 아홉 관직을 두었다고 전한다.
'태종 공정대왕(恭靖大王)' 관련자료
이두
으로 주(註)를 붙여 판각(板刻)해 반포해서 백성을 가르쳐 농사를 힘쓰게 하셨다.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명석한 임금을 계승하여 정사에 힘을 써 더욱 민사(民事)에 마음을 두셨다. 각 지방의 풍토가 같지 않아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이 각각 마땅함이 따로 있으니 옛 글과 다 같을 수 없다 하여, 여러 도의 감사
'감사' 관련자료
2)
『주시(周詩)』 : 『시경(詩經)』의 별칭으로 주나라의 시 모음집이라는 뜻이다. 『시경(詩經)』은 논어에서 ‘시(詩)’ 또는 ‘시삼백(詩三百)’ 등으로 언급되는데, 현재는 글만 남아 있으나 본래 노래의 가사였다. 구전되던 시문들은 전한(前漢) 때 학자들에 의해 편집되어 네 종류의 책이 출현하였는데, 이것이 제시(齊詩), 노시(魯詩), 한시(韓詩), 모시(毛詩)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하여 전한 초기 유교 문헌들은 학자들이 구술하여 예서(隷書)로 채록하여 전수되었는데, 이를 당대의 문자로 기록했다는 의미에서 금문경(今文經)이라 한다. 전한은 5대 황제 문제(文帝, 재위 BC 180~157) 때 박사 제도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관학으로서 유학이 번성하게 되었는데, 네 종류의 시경 중 앞의 세 종류는 시경 박사를 지낸 학자들이 전수한 금문경이었다. 7대 무제(武帝, 재위 BC 141~87) 때 하간(河間) 헌왕(獻王)은 각지에서 고서를 수집하여 조정에 바쳤으며, 노(盧) 공왕(恭王)은 공자의 옛집터 벽을 허물다가 옛 서책을 발견하였는데 이들은 진(秦)의 고문(古文), 곧 전서(篆書)로 쓰여 있어 고문경으로 칭한다. 이에 따라 전한 말부터 금고문 논쟁이 여러 차례 벌어졌으며, 체제 옹호적인 경향의 금문경학과 민간 학자들이 주도하여 훈고적 학풍을 띠는 고문경학이 갈라졌다. 이후 고문경학이 점차 융성하고 후한의 멸망에 따라 관학화된 금문경학이 끊기면서 세 종류의 금문경 시경은 사라지고 고문경인 모시만이 남게 되었다. 따라서 모시 또한 현재 전하는 『시경』의 별칭인데 이는 조(趙)나라의 모공(毛公)이 전한 시라는 뜻이다. 금문경 『시경』 세 종류의 전수자들과 달리 모공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당나라 때 과거 제도와 수험 과목이 확립되면서 『시』를 포함한 유교의 아홉 가지 주요 문헌, 곧 구경(九經)의 개념이 생겨났다. 그러나 높임의 의미로 『시』, 『서(書)』, 『역(易)』 등의 서명 뒤에 ‘經(경)’ 자를 붙여서 부르기 시작한 관습은 남송 초엽부터 시작되어 명대에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권44, 11년 5월 16일(신유)
- 9관(官) : 순제(舜帝)는 중국 상고시대의 순(舜)임금을 말하며, 그는 사공(司空)·후직(后稷)·사도(司徒)·사(士)·공공(共工)·우(虞)·질종(秩宗)·전악(典樂)·납언(納言)의 아홉 관직을 두었다고 전한다.
- 『주시(周詩)』 : 『시경(詩經)』의 별칭으로 주나라의 시 모음집이라는 뜻이다. 『시경(詩經)』은 논어에서 ‘시(詩)’ 또는 ‘시삼백(詩三百)’ 등으로 언급되는데, 현재는 글만 남아 있으나 본래 노래의 가사였다. 구전되던 시문들은 전한(前漢) 때 학자들에 의해 편집되어 네 종류의 책이 출현하였는데, 이것이 제시(齊詩), 노시(魯詩), 한시(韓詩), 모시(毛詩)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하여 전한 초기 유교 문헌들은 학자들이 구술하여 예서(隷書)로 채록하여 전수되었는데, 이를 당대의 문자로 기록했다는 의미에서 금문경(今文經)이라 한다. 전한은 5대 황제 문제(文帝, 재위 BC 180~157) 때 박사 제도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관학으로서 유학이 번성하게 되었는데, 네 종류의 시경 중 앞의 세 종류는 시경 박사를 지낸 학자들이 전수한 금문경이었다. 7대 무제(武帝, 재위 BC 141~87) 때 하간(河間) 헌왕(獻王)은 각지에서 고서를 수집하여 조정에 바쳤으며, 노(盧) 공왕(恭王)은 공자의 옛집터 벽을 허물다가 옛 서책을 발견하였는데 이들은 진(秦)의 고문(古文), 곧 전서(篆書)로 쓰여 있어 고문경으로 칭한다. 이에 따라 전한 말부터 금고문 논쟁이 여러 차례 벌어졌으며, 체제 옹호적인 경향의 금문경학과 민간 학자들이 주도하여 훈고적 학풍을 띠는 고문경학이 갈라졌다. 이후 고문경학이 점차 융성하고 후한의 멸망에 따라 관학화된 금문경학이 끊기면서 세 종류의 금문경 시경은 사라지고 고문경인 모시만이 남게 되었다. 따라서 모시 또한 현재 전하는 『시경』의 별칭인데 이는 조(趙)나라의 모공(毛公)이 전한 시라는 뜻이다. 금문경 『시경』 세 종류의 전수자들과 달리 모공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당나라 때 과거 제도와 수험 과목이 확립되면서 『시』를 포함한 유교의 아홉 가지 주요 문헌, 곧 구경(九經)의 개념이 생겨났다. 그러나 높임의 의미로 『시』, 『서(書)』, 『역(易)』 등의 서명 뒤에 ‘經(경)’ 자를 붙여서 부르기 시작한 관습은 남송 초엽부터 시작되어 명대에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