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전기농업 중심의 경제 정책

농민의 토지 소유

강원도 감사가 아뢰기를,

“이제 여러 도(道)의 호적(戶籍)을 정하되 50결 이상은 대호(大戶)로, 20결 이상은 중호(中戶)로, 10결 이상은 소호(小戶)로, 6결 이상은 잔호(殘戶)로, 5결 이하는 잔잔호(殘殘戶)로 삼아, 이를 정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도는 26고을의 민호(民戶)의 합계가 11,538호인데, 그 중에서 대호가 10호, 중호가 71호, 소호가 1,641호, 잔호가 2,043호, 잔잔호가 7,773호로, 땅이 좁아서 전지(田地)는 적은데, 영서지방은 산전(山田)에서 생산물이 정전(正田)보다 배나 되고, 영외(嶺外)에는 또 어업과 소금의 이익이 있사온즉, 만약 다른 도의 작성한 호적의 기준에 의거하여 호역(戶役)을 나누어 배정한다면 다만 역(役)을 배정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노고와 안일(安逸)도 균등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도내의 호적을 정하되, 20결 이하와 10결 이상으로써 중호(中戶)로 삼고, 6결 이상으로써 소호(小戶)로 삼고, 4결 이상으로써 잔호(殘戶)로 삼고, 3결 이하로써 잔잔호(殘殘戶)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권74, 18년 7월 9일(임인)

江原道監司啓, 今定諸道戶籍, 五十結以上爲大戶, 二十結以上爲中戶, 十結以上爲小戶, 六結以上爲殘戶, 五結以下爲殘殘戶, 以爲定式. 然此道二十六官民戶, 總一萬一千五百三十有八, 其中大戶十⋅中戶七十一⋅小戶一千六百四十一⋅殘戶二千四十三⋅殘殘戶七千七百七十三, 地狹田少, 而嶺西則山田所出, 倍於正田, 嶺外則又有魚鹽之利, 若依他道成籍, 分定差役 則非唯定役爲難, 勞逸不均. 今後道內戶籍, 以二十結以下十結以上爲中戶, 六結以上爲小戶, 四結以上爲殘戶, 三結以下爲殘殘戶. 從之.

『世宗實錄』卷74, 18年 7月 9日(壬寅)

이 사료는 『세종실록』권74, 18년 7월 9일(임인)의 기록이다. 조선 전기 경작 규모에 따른 호등 분화 상황에 관한 거의 유일한 자료로서, 조선 초기 경제구조를 확인하는 데 중요한 사료이다.

고려 말 조선 초 과전법이 실시되었는데, 그 성과로는 과전을 통해 신진 관료의 경제적 기반이 조성되고 이들이 조선 건국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였다는 점, 권문세가의 농장 경영을 제한하고 수조권(收租權)이 공공 기관에 귀속되는 공전(公田)을 확대함으로써 국가 재정이 확충되었다는 점이 거론된다. 그런데 과전법의 중요한 성과로는 이러한 점 이 외에도 농민의 토지 소유와 관련하여 조선 전기 소농으로서 자영농의 기반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전법은 농민에게는 토지를 분급하지 않았으나, 토지를 폐기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농민의 경작지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하였으며, 고려 말 사전의 문란으로 농민 경작지의 소유권이 침탈되었던 것을 환원시켰다. 따라서 과전법 시행 후에는 토지 소유 농민이 70%에 이를 정도로 늘어났으며, 비록 한 호당 결부 수는 적었지만 토지의 균점이 이루지게 되었다.

이는 사전에 의한 수조권적인 지배, 곧 조세를 받을 권리가 배제되고, 소유권 위주의 토지 지배 관계로 전환됨을 뜻하였다. 그것은 당시에 민전(民田) 자체에서 사유 관념이 심화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유지와 대비되는 의미의 민전은 매매⋅상속 등의 처분을 할 수 있는 토지가 되었으며, 그 경영 형태는 크게 자영형(自營型)⋅농장형⋅병작형으로 자리 잡았다. 자영형은 자영 농민의 경영 형태이며, 농장형은 노비와 전호에 의해, 병작형은 전호에 의해 경영, 경작되었다. 일부 연구에서는 조선 전기의 농지 소유 및 영농 형태의 주류를 지주의 농장 경영으로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세종실록』 1435년(세종 17년) 3월 6일(무인)의 기록을 살펴보면, 지방에서 50결(結)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민호(民戶)와 서울에서 40간(間) 이상의 가옥을 소지하던 민호를 대호(大戶), 지방에서 20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거나 서울에서 30간 이상의 가옥을 소지하던 민호를 중호(中戶), 지방에서 10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거나 서울에서 10간 이상의 가옥을 소지하던 민호를 소호(小戶), 지방에서 6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거나 서울에서 5간 이상의 가옥을 소지하던 민호를 잔호(殘戶), 지방에서 5결 이하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거나 서울에서 4간 이하의 가옥을 소지하던 민호를 잔잔호(殘殘戶)로 분류하는 차등 호적의 시행이 호조에 의해 건의되고 있다.

사료로 제시된 『세종실록』권74 18년 7월 9일(임인)의 기사는 위의 호 분류 기준에 따른 강원도의 민호 수의 통계를 보여 준다. 전체 11,538호 중 5결 이하의 토지를 소유한 잔잔호가 약 67% 정도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잔잔호의 기준 결수를 3결 이하로 내리자는 강원도 감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농지 소출이 적은 대신 산전(山田)이나 어업 등 다른 부문의 이익이 발생하는 강원도의 특성을 고려하여 민호 구분 기준을 차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지만, 실제 당시 잔잔호가 소유한 토지 면적에 대해서도 단서를 제공한다. 1438년(세종 20년) 11월 20일(경자) 기사에서는 “10결 이상을 경작하는 자는 모두 호부(豪富)한 백성이며 3, 4결을 가진 자도 대체로 적다”고 하였고, 1446년(세종 28년) 6월 18일(갑인) 기사에도 “소민(小民)의 전지(田地)는 불과 1, 2결인 자가 많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 볼 때 조선 전기 일반 전세의 수납에서는 소농민이 기본 바탕을 형성하였으며 일반적으로 이들 민호는 3결 이하, 곧 1~2결의 토지를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민호들은 비록 소유한 토지가 적을지라도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갖고 상시로 생산 활동에 종사하였으며, 해당 군현의 호적에 올라 부역을 제공하는 자영농적 존재들이었다. 그것은 호주 부부를 중심으로 그 자식 부부나 딸과 사위 부부 등 3~4명의 장정을 포함한 혈연 가족으로 구성된 가호로서, 자체의 노동력으로 자기 소유지를 경영하는 한 단위의 자영농 형태를 이루었으며, 아버지는 정군(正軍)이 되고 아들과 사위는 봉족(奉足)이 되어 불완전하나마 독자적으로 군역의 기본 단위를 이루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 토지 1결 50부는 장정 3~4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경작 규모였으며, 정군 1호 및 그 아들⋅사위 등 봉족과 이에 딸린 가족까지 부양이 가능한 경제적 지반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잔잔호에 해당하는 자영 농민은 자립도가 취약한 까닭에, 평시에는 각종 부역과 고리대의 상환에 시달리다가 흉년이 들면 토지에서 이탈하여 쉽게 유망민이 되었다. 이러한 농민층의 분화는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대에 이미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이 전체 농민의 10분의 3을 차지할 정도로 빠르게 일어났다. 유망민은 어딘가에 정착할 경우 보통 고공(雇工)1)으로서 그 지역 부민에게 예속되기도 하였다. 또 이들은 지주와 떨어져 협문(挾門)으로 드나들 수 있는 개별 가호에 거주하며 사역한다는 뜻에서 협호(挾戶)로도 불렸다. 토호들은 군역을 호 단위로 부담하는 허점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사역하는 유망민을 협호로 숨겨 놓고, 1호의 군역만을 맡는 피역(避役) 행위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음으로 사료를 통해 3,4결에서 수십 결에 이르는 대토지를 소유한 다양한 규모의 지주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사회적 성격은 왕실, 종친, 훈척(勳戚), 관료, 사족, 향리, 부상(富商)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지만 주류는 사족이었다. 특히 대호, 중호, 소호로 분류된 호등은 대체로 사족 지주이며, 이 중 양민은 극히 일부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까지는 지주지 경영은 기본적으로는 지주의 노비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아직 하나의 농장이 일정 규모를 갖추지 못하여 대지주라 하더라도 3~4결 정도 규모의 농장을 분산하여 경영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잔호로 분류된 이들의 경우 자영농이지만 잔잔호와 달리 부농에 속하는 쪽이었다. 이들 역시 신분이 사족이든 양민이든 간에 노비 노동력이나 고공과 같은 품삯 일꾼을 고용하고, 여지가 있으면 부근의 빈농들에게 병작지로 대여하여 농장제로 경영하는 경우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민전 경영의 마지막 유형인 병작형은 이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잔잔호 중에서도 자립이 어려운 영세농이 병행하거나 소유한 토지가 없는 농민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병작반수(竝作半收)는 이들 소작전호(小作佃戶)와 전주(田主)가 토지의 소출을 절반씩 나누는 영농 관행으로서, 고려 말 사전에서 지대를 수취하던 관행에서 비롯되었다. 전호들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분상 양인이면서도 빈곤, 부채 상환의 어려움, 과중한 국역을 피할 목적 등으로 떠돌다가 지주에게 의탁한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 과부, 홀아비, 자식이 없는 사람들처럼 소유지가 있으되 노동력이 결여된 하층민들이 자신의 땅을 병작지로 대여하거나 서울 근처의 농민들이 도시 상업에 종사하고자 하여 토지를 병작지로 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전법은 고려 말 봉건적 농장의 확대를 막기 위해 실시된 조치였다. 그 조세 규정에 따르면, 공전⋅사전을 막론하고 수조권자에게 바치는 조는 매 1결당 10분의 1조인 30두(斗)였다. 그러나 차경(借耕)을 원천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았으므로 계약이 이루어질 경우 소작료가 증가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또한 토지 국유를 표방한 가운데서도 과전⋅공신전 등은 반납되지 않고 세습 및 사유화가 지속되어 실제로 토지가 권세가에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났으며, 이렇게 늘린 토지의 경영을 위해 노비 노동 이 외에 소작의 필요성 역시 확대되었다. 유망민을 은닉하여 전호로 편입시키는 일은 원칙상 금지됐으나, 병작반수는 필요에 따라 법 외적 현상으로서 공공연하게 존재하였다.

이러한 병작반수의 경작 형태는 조선 전기에는 농장이나 지주지의 외곽에서 부수적으로 존립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나, 생산력의 발전과 함께 점차 그 독자성이 높아지고 범주가 확대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부터 개간이 활성화되고 지주층이 더욱 성장하면서, 병작반수의 소작 관행은 정당화되고 지주 전호 관계는 일반적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전호의 신분 역시 양반평민천민 등으로 다양해져 전근대적 사회구조의 근간인 신분제가 동요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 전기 소농민 경영의 연구」,『경희대학교 논문집』12,김태영,,1982.
「조선 전기 농업과 그 경영」,『경상논집』20,이호철,,1992.
저서
『조선시대농법발달연구』, 염정섭, 태학사, 2002.
『한국중세 토지제도사』, 이경식,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조선전기농업경제사』, 이호철, 한길사, 1986.
편저
「토지제도」, 김태영, 국사편찬위원회, 2003.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 한국농업사학회 편, 국학자료원, 2003.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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