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전기농업 중심의 경제 정책

농장의 발달

사헌부 대사헌 이서장(李恕長) 등과 사간원 대사간 정괄(鄭佸)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송익손(宋益孫)은 본래 한 용렬한 소인으로 욕심이 많아 만족이 없어, 나라의 양민과 공사(公私)의 천예(賤隷)를 불러들여 노비로 삼은 자가 몇이나 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탐학한 정상이 드러나 조야(朝野)에서 지목하나, 송익손은 교활한 꾀가 여러 가지가 있어 엄폐하는 데 교묘하니, 유사(有司)가 비록 적발하려고 하지만 틈새를 얻지 못한 것이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도는 우리를 속이지 않아 그의 간교한 꾀가 이미 드러났으니,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모두 ‘전하께서 반드시 중벌을 가하여서 백성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것이다’라고 일렀는데, 단지 직첩(職牒)만 거두셨으니, 한갓 형벌을 잃었을 뿐 아니라 장차 사림의 풍조를 권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저 여염(閭閻)의 세민(細民) 가운데 오로지 이익만을 좋아한 자도 오히려 도적이라 이르는데, 하물며 송익손은 자신이 재상이 되어 양민천민을 꾀어 자기의 노비로 삼고, 기름진 땅을 점거하여 자기의 전장(田莊)으로 삼았으니, 비단 토호(土豪)의 괴수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국가의 모적(蟊賊)이며, 도둑질하는 신하가운데 으뜸인 자입니다.

이런데도 용서할 만하다면 나라에 법이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공신(功臣)이라 생각하시니, 송익손은 공(功)을 믿고 스스로 방자하여 성상의 은혜를 저 버렸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공신으로 대우하십니까? 전하께서 사면을 거쳤다고 생각하시면, 무릇 양민을 꾀어서 점유하여 자기 것으로 삼는 자가 반드시 쌓이고 번지는 것을 기다릴 것이니, 어찌 일조일석에 경영(經營)한 것이겠습니까? 세월이 오래되면 사면을 받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니, 이로써 용서하면 그 악한 것을 어느 때에 징계하겠습니까? 송익손이 범한 것은 마침 오늘이 아니고, 이미 세조(世祖) 조에 발각되어 세조께서 하문하시던 날에 송익손은 면전에게 거짓말을 하고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으니, 송익손은 비단 전하의 죄인만이 아니고 진실로 선왕의 죄인이니 어찌 마땅히 사면하였다고 하여 법전을 따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어 그 악함을 징계하소서” 하니, 명하여 원상(院相)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성종실록』권51, 6년 1월 18일(무진)

○司憲府大司憲李恕長等, 司諫院大司諫鄭佸等上疏, 略曰, 宋益孫本一庸劣小人, 貪婪無饜, 國之良民公私賤隷, 招納而爲奴婢者, 不知其幾. 貪暴著狀, 朝野以目, 然益孫狡謀萬端, 工於掩覆, 有司雖欲發摘, 不得罅隙者有年. 天道不僭, 姦謀已露, 擧國臣民皆謂 殿下必加重罰, 以快輿望, 而只收職牒, 非徒失刑, 將無以勵士風也. 夫閭閻細民之好專利者, 猶謂之盜, 況益孫身爲宰相, 誘良賤爲己奴婢, 占膏腴爲己田莊, 非獨土豪之魁首, 實乃國家之蟊賊, 而盜臣之尤者也. 此而可寬, 則國無法矣. 殿下以爲功臣, 則益孫恃功自恣, 辜負上恩, 殿下其可以功臣待之乎. 殿下以爲經赦, 則凡誘良民占爲己有者, 必待積漸, 豈一朝一夕之經營也. 歲月久則其不經赦者鮮矣, 以此寬之, 則其惡何時而懲哉. 益孫之所犯, 非適今日, 已覺於世祖之朝, 世祖下問之日, 益孫面謾不首, 益孫非特殿下之罪人, 實先王之罪人也, 豈宜以經赦而從輕典乎. 伏望竄逐遠方, 以懲其惡. 命議院相.

『成宗實錄』卷51, 6年 1月 18日(戊辰)

사료의 내용은 1475년(성종 6년) 송익손(宋益孫, ?~1482)이라는 인물이 양민천민을 꾀어 노비로 삼고, 남의 땅을 무단으로 점거하여 자신의 농장으로 만들었던 일을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이 비판한 내용이다. 송익손은 계유정난 당시 처남인 홍달손(洪達孫, 1415~1472)을 따라 가담, 협력하면서 그 공으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1469년(예종 1년) 가정대부에 승진되고 1472년(성종 3년)에는 부호군에 임명되었다. 사료는 송익손의 사례를 통해 조선 전기 훈구 대신들의 농장 확대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과전법을 통해 주로 타인 소유의 토지에서 전조(田租)를 수취하던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토지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노비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들은 노비와 토지를 결합시켜 농업 경영을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노비와 토지가 결합된 형태를 농장이라 일컬었다. 조선 전기 농장들은 소유자의 정치적 성향과 농업 경영의 내용, 농장 분포 지역과 규모, 생산 관계 등을 고려할 때 크게 2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왕실과 중앙 관료의 농장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의 품관, 향리층의 농장이었다.

조선 전기 훈구파로 대표되는 중앙 관료와 왕실 농장은 그들의 정치적 권력을 기반으로 전국 여기저기에 대규모로 개설되었다. 이들의 농장이 가장 많이 산재한 곳은 경기도였는데, 주로 정치 권력에 편승하여 농장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 관료들은 대부분 부재지주로 여기저기에 산재한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 관리인을 파견하였다. 이와는 달리 재지 사족과 품관, 향리층의 농장은 집안에서 세습되는 토지를 상속받거나 개간, 매득 등의 방법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러한 농장에서의 노동력은 노비 노동에 주로 의존하였지만 몰락한 양인 전호나 국역 부담을 피하기 위한 투탁(投託)한 양인으로 보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농장의 농업 경영은 점차 노동집약적 농업 혁신, 직영지적 부역 노동의 비효율성, 노비의 대규모 도망 등으로 인하여 16세기 말부터 점차 해체되어 갔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 전기 소농민 경영의 연구」,『논문집』12,김태영,경희대학교,1982.
「조선 전기 농업과 그 경영」,『경상논집』20,이호철,경북대학교 경제경영연구소,1992.
저서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 김건태, 역사비평사, 2004.
『조선시대농법발달연구』, 염정섭, 태학사, 2002.
『한국중세 토지제도사』, 이경식,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조선전기농업경제사』, 이호철, 한길사, 1986.
편저
「토지제도」, 김태영, 국사편찬위원회, 2003.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 한국농업사학회 편, 국학자료원, 2003.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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