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전기농업 중심의 경제 정책

양전 사업

모든 토지는 6등급으로 나누며 20년마다 한 번씩 토지를 다시 측량한 뒤에 대장을 만들어 본 조, 본 도, 본 고을에 각각 보관한다. 1등전을 재는 자의 길이는 주척(周尺) 기준으로 4자 7치 7푼 5리에 해당하고 2등전은 5자 1치 7푼 9리, 3등전은 5자 7치 3리, 4등전은 6자 4치 3푼 4리, 5등전은 7자 5치 5푼, 6등전은 9자 5치 5푼에 해당한다. 실제 면적에서 한 자를 줌[把]이라 하고, 10줌을 뭇[束]이라 하고 10뭇을 짐[負]라 하고 100짐을 결(結)이라고 한다. 1등전 1결은 38묘에 해당하고, 2등전은 44묘 7푼, 3등전은 54묘 2푼, 4등전은 69묘, 5등전은 95묘, 6등전은 152묘에 해당한다. ○ 각 토지의 14짐이 중국의 1묘에 해당한다. ○ 늘 경작하는 토지를 정전(正田)이라 하고 경작하기도 하고 묵히기도 하는 토지를 속전(續田)이라고 한다. 정전이라고 하지만 토질이 메말라서 곡식이 잘되지 않는 토지라든가, 속전이라고 하지만 땅이 기름져서 소출이 곱절이나 많이 나는 토지에 대해서는 수령이 장부에 기록하여 두었다가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다음번 식년(式年)에 개정한다.

경국대전』권2, 「호전」, 양전

우리나라의 전제(田制)가 처음에는 매우 소략하였다. 옛 제도의 전품(田品)은 상⋅중⋅하의 3등급만이 있었고, 타량(打量)하는 척수(尺數)가 각각 꼭 같지 않았다. 상등전(上等田)의 척도는 20지(指), 중등전의 척도는 25지, 하등전의 척도는 30지로 등급에 따라서 타량(打量)하였으나, 팔도의 전품은 이 세 등급으로써 다 된다고 할 수 없다. 세종 갑자(1444, 세종 26)에 전제소(田制所)를 설치하고 결법(結法)을 경정(更定)하여, 전(田)을 6등급으로 나누어서, 1등전은 척수를 주척(周尺)으로 4척 7촌 7푼 5리에 준하고, 2등전 이하는 모두 차등이 있게 하여 6등전에 이르러서는 9척 5촌 5푼에 준하였는데, 역시 각 등급에 따라 타량하였으므로 비단 번잡하여 서로 혼동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인승(引繩)하는 사람의 간폐(奸弊)가 점차로 심하여져서 전제가 날로 문란하게 되고 부역이 균등하지 못하게 되었다. 효종 계사(1653, 효종 4)에 옛 제도의 등급에 따라 척수를 달리한 법을 혁파하고, 주척의 4척 7촌 7푼 5리를 가지고 양척(量尺)으로 정하고, 등급의 높낮이는 논할 것 없이 통틀어 해부(解負)하여, 전(田)의 1척을 파(把)로, 10파를 속(束)으로, 10속을 부(負)로, 100부를 1결(結)로 하고, 계산하여 1만 척이 되는 전지에 대하여 1등전은 1결, 2등전은 85부, 3등전은 70부, 4등전은 55부, 5등전은 40부, 6등전은 25부로 정하여, 전품(田品)의 차등에 따라서 수세하게 하였다. 그런데 전지의 모양[田形]이 각각 틀리고 명색이 현란하게 되기 쉬우므로 다만 알기 쉬운 ‘방전(方田)’⋅‘직전(直田)’⋅‘제전(梯田)’⋅‘규전(圭田)’⋅‘구고전(勾股田)’의 5가지 명색으로 타량하여 안(案)에 기록하였다. 방전은 한 길이를 제곱하고, 직전은 높이와 길이를 곱해주고, 제전은 큰 변과 작은 변 길이의 합의 절반에 길이로 곱해주고, 규전은 길이와 높이를 서로 곱한 후에 절반으로 나누어주고, 구고전은 두 직각변을 서로 곱한 후에 절반으로 나눈 것을 각각 전의 넓이로 삼아서 등급에 따라 해부(解負)하되, 6파(把) 이상은 속(束)으로 하고 5파 이하는 논하지 않았다.

양전결(量田訣). 1등은 1결, 2등은 85부, 3등은 70부[單七], 4등은 55부, 5등은 40부[單四], 6등은 25부.

전(田)은 자호(字號)를 붙이되 천자문의 순서를 사용하고 다시 1⋅2⋅3으로 차례를 정하였는데, 묵은 밭과 일군 밭을 막론하고 만 5결이면 한 자호(字號)로 표한 다음에 전(田)의 동⋅서⋅남⋅북의 사표(四標)와 주인의 이름을 양안에 현록(懸錄)하되, 늘 경작하는 것은 ‘정전(正田)’이라 일컫고, 경작하다 묵히다 하는 것은 ‘속전(續田)’이라 일컫고 기전(起田)함에 따라 수세함. ○ 북도(北道)에는 산의 중턱 이상이면 모두 속전으로 둔다. 오랜 시간 진폐(陳廢)되어 등급을 낮추어 세를 감하는 것은 ‘강등전(降等田)’이라 한다. (양전할 때에 등급은 높고 진폐된 것은 강등 감세하여 경작하도록 권한다.) 강등한 뒤에 그래도 경작하기를 원치 아니하면 또 강등해서 속전으로 하여 ‘강속전(降續田)’이라 한다. (기전(起田)함에 따라 수세한다.) 장적(帳籍) 외에 새로 일군 것은 ‘가경전(加耕田)’이라 한다. (기전함에 따라 수세하되 해서(海西)에서는 한광전(閑曠田)이라 일컬어 따로 성책(成冊)하고 수보(修報)한다.) 불을 질러서 밭을 일구어 조[粟]를 심는 것은 ‘화전(火田)’이라 한다. (25일경(二十五日耕)을 1결(結)로 하여 따로 성책(成冊)하되 자호를 배정(排定)하지 아니하고, 지명(地名)만을 기록하여 원전(元田)과 혼동되지 않게 하며 기전함에 따라 수세한다.) 묵은밭은 경작하기를 권하여 기간(起墾)한 곳은 일일이 개록(開錄)하여 호조에 보고해서 3년 동안 감세케 하고, 기간하였다가 도로 묵힌 것은 세를 징수하지 않는다.

만기요람』, 재용편2, 전결, 양전법

凡田分六等, 每二十年改量, 成籍藏於本曺⋅本道⋅本邑.【一等田尺長准周尺, 四尺七寸七分五釐, 二等五尺一寸七分九釐, 三等五尺七寸三釐, 四等六尺四寸三分四釐, 五等七尺五寸五分, 六等九尺五寸五分, 實積一尺爲把, 十把爲束, 十束爲負, 百負爲結. 一等田, 一結准三十八畝, 二等田四十四畝七分, 三等田五十四畝二分, 四等田六十九畝, 五等田九十五畝, 六等田一百五十二畝. ○各等田十四負, 准中朝田一畝. ○常耕者稱正田, 或耕或陳者稱續田. 其稱正田, 而地品瘠薄, 禾穀不穟者, 續田而土性肥膏, 所出倍多者, 守令置簿, 報觀察使, 式年改正.】

『經國大典』卷2, 「戶典」, 量田

我國田制, 初甚疎略. 舊制田品. 只有上,中,下三等, 其所量之尺各自不同. 上田尺二十指, 中田尺二十五指, 下田尺三十指, 隨等打量, 而八道田品, 非三等所能盡也. 世宗甲子, 置田制所, 更定結法, 田分六等, 其一等田尺準周尺四尺七寸七分五里, 二等以下皆有差等至六等尺準九尺五寸五分, 亦各隨等打量, 非但煩雜易致相混, 引繩之人奸弊漸滋, 田制由是而日紊, 賦役由是而不均. 孝宗癸巳, 罷舊制隨等異尺之法, 直以周尺四尺七寸七分五里爲量尺, 毋論等之高下通量解負, 田一尺爲把, 十把爲束, 十束爲負, 百負爲一結, 計積萬尺之地, 一等則爲一結, 二等則爲八十五負, 三等則爲七十負, 四等則爲五十五負, 五等則爲四十負, 六等則爲二十五負, 隨其田品差等收稅. 而田形各異, 名色易眩, 故只以人所易知方田⋅直田⋅梯田⋅圭田⋅勾股田五名色打量錄案, 方田, 方自乘, 直田, 長廣相乘, 梯田, 大小頭相倂折半以長乘之, 圭田, 長濶相乘折半, 勾股田, 勾股相乘折半, 各爲田積, 隨等解負, 而六把以上, 收而爲束, 五把以下勿論.

量田訣. 【一等一結, 二等八五 三等單七, 四等五五, 五等單四, 六等二五.】.

田有字號, 用千字文第次, 以一二三爲次, 無論陳⋅起, 滿五結則用一字號標之, 以田之東⋅西⋅南⋅北四標及主名懸錄量案, 常耕者稱正田, 或耕或陳者稱續田, 隨起收稅. ○北道, 山腰以上並置續田. 年久陳廢降等減稅者謂之降等田. 【量田時, 等高而陳廢者, 降等減稅, 使之勸耕】. 降等之後猶不願耕則又降爲續田, 謂之降續田. 【隨起收稅】. 帳外新起者, 謂之加耕田. 【隨起收稅, 而海西則稱以閑曠田, 別件成冊修報】. 燒畬種粟者謂之火田. 【二十五日耕爲一結, 別件成冊, 不排字號, 只書地名, 使不與元田混, 而隨起收稅】. 陳田勸耕起墾處, 一一開錄, 報戶曹, 減三年之稅, 旣墾還陳者勿稅.

『萬機要覽』, 財用篇2, 田結, 量田法

이 사료는 『경국대전』과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수록된 양전(量田)과 관련한 규정이다. 『경국대전』은 조선 통치 규범을 정리한 대표적 법전으로 ‘호전’에는 재정 경제와 그에 관련한 사항이 실려 있다. 이 증 양전 내용은 조선 전기 양전에 대한 기본적인 규정을 담고 있다.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때 제정된 공법(貢法)의 전분 6등법에 따라 토지를 6등급으로 나누고 20년에 한 번씩 양전을 하도록 하였으며, 각 등전에 해당하는 자의 길이를 비롯한 각종 규정을 보여 주고 있다.

만기요람』은 1808년(순조 8년) 서영보(徐榮輔, 1759~1816)⋅심상규(沈象奎, 1766~1838) 등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책으로, 양전에 관한 내용은 과전법 제정 당시의 양전법공법 제정 후 양전법에 대한 간략한 소개 및 그에 따른 번잡함을 피해 효종(孝宗, 재위 1649~1659) 때 전품에 따라 다른 자척을 사용하지 않고 수세하게 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양전과 수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양전 사업은 국가 재정의 기본을 이루는 전세(田稅)를 징수하기 위해 전국의 전결 수를 측량하고 누락된 토지를 적발하여 불법적으로 탈세를 행하는 토지가 없도록 한다는 점과, 수확량에 따라 토지 면적을 표시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결부제(結負制)하에서 전세의 합리적인 징수를 꾀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따라서 양전은 중세 사회의 토지 제도 위에서 그 토지를 운영하기 위한 첫 작업이었으며, 이러한 토지 제도를 전제로 한 전정(田政)의 기초를 만드는 일이었다. 양전을 통하여 전국의 결총이 확정되면 그에 따라 각 지방의 전결 세액이 확정되고 토지마다 그 세액을 배정하여 징수하였다.

이성계(李成桂, 1335~1408)위화도 회군 후 개혁파 사대부과전법 실시를 준비하는 기초 작업으로 양전을 시행하였다. 이것이 1388년(창왕 1년)부터 1389년(창왕 2년)까지 시행된 기사 양전(己巳量田)이었다. 기사 양전은 경기와 남부 6도에 한해 시행했으며, 이에 따르면 수전 1결당 조미 30두로 하며 한전 1결마다 잡곡 30두로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1결은 각기 전품의 비척에 따라 실제 면적을 달리하는 수등이척(隨等異尺)과 동과수조(同科收租)의 각등 전결을 보편적으로 가리킨다. 양전의 척도는 농부의 손가락 척도, 즉 지척(指尺)을 근거로 했으며 이러한 방식은 이후 계속되었다. 전품은 상⋅중⋅하 3등전으로 파악하였는데, 이는 휴한하는 빈도가 아닌 토지의 비옥함과 척박함에 따라서 파악하였다.

사회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새로운 토지가 증가하여 새로운 양전을 필요로 하였다. 이에 1405년(태종 5년) 다시 남부 6도에 대한 양전이 있었으며, 1413년(태종 13년)에는 양계 지역을, 1419년(세종 1년)에는 제주 지방을 양전함으로써 과전법 성립 28년 만에 수등이척의 양전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과전법 성립의 바탕이 된 양전법은 시행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다.

첫째, 지역에 따라 농업 생산력 수준이 많이 달랐는데도 과전법에서는 남부 6도를 통틀어 결당 30두 수조를 규정하고 있어 많은 논란을 낳았다. 당시의 농업 생산력 수준에 맞는 좀 더 세분화된 전품제 도입이 절실한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 3등전 실적이 생산력에 비례한 것도 아니었으며 전품의 분등도 각 도 단위로 난립하여 전국적으로 통일성이 없었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통일된 전품 분등법에 따라 각 등전의 실적을 실제로 생산량 비례로 책정해야 하는 과제가 제기되었다.

과전법 상의 양전은 농부의 손가락 척도를 바탕으로 한 점에서나 지역별로 각기 다른 전품제를 적용한 점이나 그 자체가 조잡하며 관행을 법제화하여 사용한 면이 있었다. 여기에 대한 일대 개혁은 불가피했으며, 이에 대해 공법 전세제(貢法田稅制)를 통해 개선해 나가고자 하였다.

조선 시대 구체적인 양전의 모습은 세종 연간에 시행된 공법을 통해 알 수 있다. 공법과전법의 일률적인 수조액을 재조정하기 위해 전분 6등법과 연분9등법의 조세 징수 기준을 정해 두고 있었다. 전분 6등법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토지를 6등급으로 나누었다. 전품이 한번 정해지더라도 시일이 경과하면 토질이 달라져 전품의 재사정이 필요해지고 또 자연 환경의 변동과 수리 시설, 시비 등 농지 개량에 따라 비옥도가 변동해 수시로 전품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20년마다 양전을 다시 하도록 한 것이다.

양전의 목적이 공정한 수세를 위한 기초 조사에 있었던 만큼 양전할 때의 조사 기준은 수세의 가능 여부, 감세의 필요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정전(正田), 속전(續田), 강등전(降等田), 강속전(降續田), 가경전(加耕田), 화전(火田)의 6가지 기준을 설정하였다.

측량 방법으로는 토지의 형태가 뚜렷하지 못한 곳에서는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만들며, 경사진 토지는 별도로 토지의 형태를 만들도록 하여 양전하였다. 한편 결부제의 특성상 같은 1결이라도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면적이 다른 반면, 1결에 일률적으로 같은 액수의 세를 거두는 만큼 양전에 쓰이는 양전척도 토지의 등급에 따라 여러 종류였다.

양전 사업을 시행한 대표적 사례는 다음과 같다. 앞에서 설명한 기사 양전과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대의 양전을 거쳐 세종 대에는 지속적으로 양전을 시행해 170만여 결을 확보하였다. 이것은 고려 말 50만 결의 3배가 넘는 액수였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토지 사정이 아주 어려워져 전쟁 전 150여만 결이 넘던 토지가 전쟁 후에는 30여 만 결에 불과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끝난 1613년(광해군 5년) 삼남 양전, 1634년(인조 12년) 삼남 양전, 1663년(현종 4년) 경기도 양전, 1665년(현종 6년) 함경도 양전, 1669년(현종 10년) 충청도 20읍과 황해도 4읍 양전, 1701년(숙종 27년) 황해도 3읍 양전과 1709년(숙종 35년) 강원도 16읍 양전, 1719년(숙종 45년)과 그 이듬해 삼남 양전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대 이후 조선 말기의 양전전정의 문란이 심한 지역에서만 수시로 미봉적으로 실시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과전법체제하의 토지생산력과 양전」,『한국사연구』35,김태영,한국사연구회,1981.
「한국 고대의 양전법과 양전척에 관한 연구」,『한불연구』1,박흥수,연세대학교 한불문화연구소,1974.
「조선전기 직전제의 운영과 그 변동」,『한국사연구』28,이경식,한국사연구회,1980.
「조선초기의 손실경차관과 양전경차관」,『국사관논총』12,이장우,국사편찬위원회,1990.
「16세기의 양전과 진전수세」,『손보기박사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이재룡,지식산업사,1988.
저서
『조선전기 토지제도사연구』, 김태영, 지식산업사, 1983.
『한국중세 토지제도사』, 이경식,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조선전기농업경제사』, 이호철, 한길사, 1986.
편저
「토지제도」, 김태영, 국사편찬위원회, 2003.

관련 사이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