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전기상업 활동과 백성의 경제 생활

관장제 수공업

“1. 월과(月課) 군기(軍器)는 국가가 외부로부터 침략을 당했을 때를 대비한 비축으로 진실로 하루도 그 수리와 제조를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자에 조령(條令)에 의하여 군현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비축함이 있는데, 절제영(節制營)계수관(界首官)⋅각진(各鎭)에서 날마다 두들겨 만들어, 야장(冶匠)이 된 자는 밤낮으로 관청에 있게 되면서 그 생계를 잃어 처자들이 굶주려 우는 탄식을 면치 못하니 또한 딱한 일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3월부터 7월까지는 돌아가서 귀농(歸農)케 하였다가,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몰아서 부역하도록 하면, 거의 국가는 비축을 폐하지 않을 것이며 장인(匠人) 또한 생계를 이룰 것입니다” 위의 조항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태종실록』권29, 15년 4월 20일(정해)

一, 月課軍器, 國家禦侮之備, 誠不可一日廢其修造也. 然近因條令, 自郡縣至于庶民, 皆有其備, 而節制營與界首各鎭日常打造, 其爲冶匠者, 日夜在官, 失其生理, 未免妻子啼飢之嘆, 亦可憫也. 願自今三月至七月則放還歸農, 自八月至明年二月, 驅而赴役, 則庶乎國不廢備, 而匠亦遂其生矣.

『太宗實錄』卷29, 15年 4月 20日(丁亥)

이 사료는 1415년(태종 15년) 4월 강원도 관찰사 이안우(李安愚 : ?~1424)가 강원도 지역의 군기 공장(工匠) 업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대책을 건의한 내용으로, 조선 초기 관영 수공업의 정비 과정에서 제기된 논의이다.

고려 후기 이래 소(所)가 해체되면서 국가의 관청 수공업과 소를 통한 수공업 지배가 관청 수공업의 생산 확대와 군현을 통한 공납 지배의 형태로 바뀌어 갔다. 이에 따라 15세기 조선의 수공업은 관영 수공업인 관장제(官匠制)가 주도하였다.

관장제공장(工匠)이라 불리는 기술자들이 관부에 예속되어 물품을 생산하는 형태로, 중앙 관아에는 경공장이, 지방 관아에는 외공장이 배속되었다. 공장의 신분은 양인공천(公賤)으로 구성되며, 그들은 관아의 수요에 따라 각기 책임량을 제작하였다. 공역(公役)에 응함은 무상으로 노동과 기술을 징발당하는 것을 뜻하며, 공역 이 외에 사적으로 생산한 물품에는 납세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이러한 수공업 생산을 통해 왕실이나 관청이 조달한 물품에는 무기와 화약, 활자, 의복, 문방구, 그릇 등이 있었다. 이 외에 민간 수공업도 존재했는데, 독립 수공업자와 농민⋅승려⋅백정 등에 의하여 수공업품이 생산되었다. 독립 수공업자는 관부의 장적(匠籍)에 등록되어 공역을 부담하지만 공역 이 외에 생산된 물품에는 장세(匠稅)가 부과되었다. 농촌 수공업은 농민의 부업으로 생산되었으며, 승려의 수공업으로는 제지⋅신발⋅목공예⋅제면(製麵) 등이, 백정의 수공업으로는 피혁 제품⋅유기(柳器) 제조 등이 있었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관장의 수를 살펴보면, 중앙 관청에 소속된 경공장으로 공장을 둔 곳은 30개소였고 직종은 130종, 인원은 2,814명이었다. 지방의 외공장은 3500명에 달했다.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소속된 장인은 원칙적으로 공장안(工匠案)이라는 명부에 이름이 등록되어 있었다. 이들은 1년 중 일정 기간 동안을 이용하여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만들었다. 이들 관장은 일정 기간 동안의 의무를 끝내면 자유 활동이 허용되어 여러 생활필수품을 제조해 판매할 수 있었으며, 공역 이 외에 사적으로 생산한 물품에는 납세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이러한 조선 초기 관장들 중 두드러지게 많은 수를 차지한 이는 무기를 생산하는 장인들이었다. 이 사료는 철을 다루는 장인들이 어떤 식으로 공역에 동원되었으며, 어떤 계기로 관장제 수공업자가 민간의 야철수공업자로 전환되었는지 보여 준다.

정부는 개국 초부터 명⋅일본⋅여진과의 불화와 외침에 대비하기 위하여 무기 생산에도 주력하였다. 중앙에서는 군기감(軍器監)이 무기 생산을 관장했으며, 공철(貢鐵)로써 무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1398년(태조 7년)에 궁궐, 군자감(軍資監), 풍저창(豊儲倉) 등의 공사가 끝나자 군기감을 확충하자는 논의가 일어났으며, “군기감은 병기를 관장하여 제조하는 양이 매우 많으니 선공감과 각사에 소속된 장인 및 여러 곳의 한역장인(閑役匠人)을 모두 군기감에 소속시켜 군기를 제조하도록 하자”는 내용으로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군기감은 중앙 관서 중에서 가장 많은 공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활⋅창⋅가지창⋅세모진 창⋅갑옷⋅투구⋅화약 등의 무기와 군기(軍旗)⋅북⋅꽹과리⋅징 등 군 보조 장비를 생산하였다.

각 지방의 무기 생산은 지방 제도가 점차 정비되면서 계수관(界首官)과 영(營)⋅진(鎭)에서 생산을 담당하였고, 달마다 정례로 하는 ‘월과군기법(月課軍器法)’이 적용되었다. 월과군기법은 중앙의 군기감과 지방의 각 계수관과 영⋅진에서 거의 동시에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지방의 경우 고려 말 이래 동⋅서북면과 각 도에 철물 생산과 군기제조량을 늘리도록 강요하였으나 성과가 좋지 않아 1392년(태조 1년) 9월 월과제(月課制)를 적용하게 되었다. 월과제 아래 도절제사나 도순문사(都巡問使)는 각기 도내의 철물 생산량과 군기 제조의 월별 실적을 매 계월(季月)마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보고하여야 했다. 이후 월과제 하의 군기 제조 작업은 1398년(정종 즉위년) 9월에 절제사 영(營)이 설치되고 군기를 제작하는 공장 37명을 포함하여 관련 인원 167명을 배정하면서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계수관⋅영⋅진의 월과군기는 군기감의 감독을 받았으며 중앙에서 파견한 군기점고 찰방(軍器點考 察訪)이나 경차관(敬差官)에게 점고(點考)를 받았다.

군기를 제작하는 공장들은 주로 그 지역의 농민들로서 야장(冶匠)의 경우 밤낮으로 부역하였으므로, 사료에 나타난 1415년(태종 15년) 4월 20일의 기록처럼 공역이 과중하여 처자를 부양하기 어렵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에 정부는 4월부터 7월 사이에 장인들이 귀농하도록 조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다시 대사헌 김여지(金汝知)의 상소로 군기감과 함께 계수관⋅영⋅진의 월과군기 공역을 모두 정지하였다. 이후 공역에 동원되는 일수는 차츰 줄어들어 1451년(문종 1년)에 이르면 각 진의 공역 일수를 봄에는 정월에서 2월까지 두 달, 가을에는 8월에서 11월까지 네 달로 하여 총 6개월로 단축시켰고, 이 때 각 도(道) 도회소(都會所)의 공역 일수도 진과 같이 줄어들었다.

월과장인으로 복무하였던 야장들에 대한 이러한 조처는 공장들로 하여금 사적 생산의 여유를 갖게 함으로써 조선 전기 야철 수공업의 성장에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병선(兵船)⋅화포(火砲)⋅궁시(弓矢)⋅창검(槍劍)⋅의갑(衣甲) 등 다양한 무기 제조 기술을 보유한 계수관과 영⋅진의 월과장인들이 사적 생산을 도모하게 됨에 따라, 1415년(태종 15년) 이후에는 점차 민영 수공업으로서 각종의 철물 제조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철장을 제외한 각 장인들은 호조에 정액의 장세를 납부하면서 각기 광산을 채굴하거나 제품을 생산하는 등 독립된 자영 수공업자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때로 수령에게 현품이나 노동력을 착취당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특수한 예이며 대부분 독립된 자영 수공업장을 보유하였다. 지방의 철물 제조업이 성장하자 정부는 이들도 과세 대상으로 지목하여 외공장안(外工匠案)에 등록하고 장세를 부과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철장 내에서도 업무가 분화되어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도검류(刀鎌類)를 주조하던 주철장(鑄鐵匠), 부정류(釜鼎類)를 주조하던 수철장(水鐵匠), 놋그릇을 만드는 유철장(鍮鐵匠)이 장세를 수취당하는 주류였다. 철장(鐵匠)은 명칭만 보면 장인이지만 철제품의 원재료가 되는 철을 생산하는 사람으로서 일종의 철광업자에 가까웠다.

공철을 채납하는 농민들 역시 철을 캐기 위해 먼 거리를 왕래해야 하고 식량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등 피해가 컸기에 공역에 대하여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렇게 농민이 직접 철을 채납하는 철장도회제를 폐지해도 될 만큼 사적 철물 생산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므로,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세조(世祖, 재위 1455~1468) 연간부터는 철장 역의 면제가 빈번해졌다. 대신 농민들이 공철 생산에 부담을 느끼는 점을 이용하여 상인과 수령들의 대납이 유행하였는데, 1461년(세조 7년)에는 부역 농민들의 이해를 일정 정도 반영하여 철장도회제를 혁파하고 공철을 바칠 때 현물 또는 미곡 대납을 허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대납은 농민들이 원할 때만 허용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대납을 통해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부상들은 지방의 수령에게 청탁하여 농민에게 대납을 강요하게 하고 이 대납에 대한 부채를 갚지 못할 경우 재산을 무자비하게 약탈하였다. 이처럼 관리와 상인 간의 결탁으로 빚어진 대납의 폐단은 공철 뿐 아니라 모든 공물에 동일하게 발생한 현상으로서 민생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으며, 결국 중앙 정부는 1468년(예종 즉위년) 10월 “대납하는 자는 공신⋅종실을 막론하고 극형에 처한다”는 전지를 내리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전기 도자기 수공업의 편제와 운영」,『역사와 현실』33,이병희,한국역사연구회,1999.
「조선전기 수공업체제의 정비」,『역사와 현실』33,이혜옥,한국역사연구회,1999.
「조선전기 제지(製紙) 수공업의 생산체제」,『역사와 현실』33,한정수,한국역사연구회,1999.
편저
「야철수공업과 철광업」, 유승주, 국사편찬위원회, 2003.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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