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후기수취 제도의 문란과 개편

양역의 폐단

병조판서 홍계희(洪啓禧)가 『균역사실(均役事實)』1)의 책자를 왕세자에게 올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은(殷⋅주(周)나라 때에는 전지(田地)에 의하여 병사를 동원하여 병정(兵政)이 농정(農政)에 붙었습니다. 후세에 이르러 병정과 농정이 한 번 나누어져서 선왕(先王)의 정치가 실추되었습니다. 우리 조정의 오위(五衛)의 법은 실로 부병(府兵)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번(番)을 돌아가면서 쉬게 하였기 때문에 병정(兵政)이 농정(農政)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간혹 성(城)을 쌓거나 변방을 지키는 역(役)이 있어 조정에서 기병(騎兵)⋅보병(步兵)이 식량을 가지고 멀리 달려가는 폐단을 진념(軫念)하여 포목(布木)을 바치고 고립(雇立)시키는 것을 허락하여 왔는데, 이것이 징포법(徵布法)이 생겨나게 된 이유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오위를 혁파하고 훈국(訓局)을 설치했는데, 병사를 양성하는 수요(需要)를 오로지 양보(良保)에게 책임 지웠기 때문에 베를 징수하는 길이 차츰 넓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어영청(御營廳)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금위영(禁衛營)이 계속하여 만들어지기에 이르러서는 베를 징수하는 법이 이미 처음보다 외람스럽게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교묘한 명색(名色)을 만들고 일을 빙자하여 거두어들이는 것이 날마다 증가하고 달마다 가중되었습니다. 양군(良軍)이라고 칭하고 포(布) 2필(疋)을 거두는 것이 숙묘(肅廟) 초년에는 30만이었으나 지금은 50만이 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신역법(身役法)이 매우 엄하여 위로는 공경(公卿)의 아들에서부터 아래로는 편맹(編氓)에 이르기까지 각각 소속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음덕(蔭德)이 있는 사람은 충순위(忠順衛)가 되거나 충찬위(忠贊衛)가 되고, 음덕이 없는 사람은 정병(正兵)이 되거나 갑사(甲士)가 되었으므로 민지(民志)가 안정되고 민역(民役)이 고르게 되었습니다. 근래에는 세도(世道)가 점점 변하고 법망(法網)이 점점 해이해져 사대부의 자제들은 이미 다시는 그 이름을 제위(諸衛)에 예속시키지 않았고, 향품(鄕品)의 냉족(冷族)도 역시 양반이라고 칭하면서 신역을 면하기를 도모하게 되었으므로 이에 군역(軍役)이 모두 피폐하고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백성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피폐하고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백성은 날로 증가하고 달로 가중되는 군역을 담당하였으니, 이 백성이 어찌 날로 더욱 곤고하여져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백성들 가운데 양역(良役)에 응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내(畿內)⋅삼남(三南)⋅해서(海西)⋅관동(關東)에 있으니, 이 여섯 도(道)의 민호(民戶)가 무릇 134만인데, 잔호(殘戶)⋅독호(獨戶) 72만을 제하면 실호(實戶)는 겨우 62만입니다. 그런데 사부(士夫)⋅향품(鄕品)⋅부사(府史)⋅서도(胥徒)⋅역자(驛子)⋅치곤(緇髡)양역에 여러모로 헤아려 그 가부(可否)를 결정할 수 없는 사람들이 또 5분의 4가 거주하기 때문에 양역에 응하는 사람은 단지 10여 만입니다. 10여 만의 민호로 50만의 양역을 담당해야 하니, 한 집안에 비록 4~5인이 있어도 모두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신포(身布) 비용이 4~ 5냥의 돈인데, 한 집의 4~5인이 모두 납입하면 해당되는 비용은 20여 냥입니다. 이들은 세업(世業)도 없고 전토(田土)도 없어 모두 남의 전토를 경작하여 1년에 수확하는 것이 대부분 10석을 넘지 못하는데, 그 반은 전토의 주인에게 주면 남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20여 냥의 돈을 낼 수 있겠습니까. 비록 날마다 매질을 가하더라도 내어 바칠 수 있는 계책이 없어 결국에는 죽지 않으면 도망갑니다. 도망한 자와 죽은 자들을 또 그 대신으로 충당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이에 백골징포(白骨徵布)와 황구첨정(黃口簽丁)의 폐단이 있게 되었으며, 징족(徵族)⋅징린(徵隣)으로 죄수들이 감옥에 가득하고 원통하여 울부짖는 소리가 심해져서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양역을 변통시키자는 의논이 있게 된 이유입니다.

영조실록』권75, 28년 1월 13일(을해)

1)『균역사실(均役事實)』은 균역청 당상인 병조판서 홍계희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사도세자(思悼世子)에게 균역법 제정의 경과와 결말을 알리기 위하여 1751년(영조 27년) 12월에 편찬하여 1752년(영조 28년) 1월에 펴냈다.

兵曹判書洪啓禧進均役事實冊子于王世子, 其書曰 殷周之時, 以田出兵, 而兵寓於農. 及夫後世, 兵農一分, 而先王之政隳矣. 我朝五衛之法, 實倣府兵之制, 更番迭休, 兵不傷農. 間有築城⋅戊邊之役, 朝家軫念騎步兵裹糧遠赴之弊, 許以納布雇立, 此徵布之法所由起也. 壬辰亂後, 罷五衛設訓局, 則養兵之需, 專責於良保, 而徵布之路稍廣矣. 逮至御營廳守禦廳摠戎廳禁衛營相繼而作, 則徵布之法, 已濫觴矣. 此外巧爲名色, 憑藉徵歛者, 日增月加. 稱以良軍而收布二疋者, 在肅廟初年猶爲三十萬, 而今則爲五十萬矣. 國初則身役之法甚嚴, 上自公卿之子, 下至編氓, 莫不各有屬處. 有蔭者爲忠順衛爲忠贊衛, 無蔭者爲正兵爲甲士, 民志以定, 民役以均. 邇來世道漸變, 法綱漸弛, 士夫子弟, 已不復隷名於諸衛, 以鄕品冷族, 亦稱兩班, 圖免身役, 於是乎軍役盡歸於疲殘無依之窮民矣. 以疲殘無依之窮民, 當日增月加之軍役, 則斯民安得不日益困苦而莫之支哉. 今夫民之應良役者, 盡在畿內三南海西關東, 此六道民戶凡百三十有四萬, 而除殘獨戶七十二萬, 實戶僅六十二萬. 而士夫鄕品府史胥徒驛子緇髡等, 不可擬議於良役者又居五之四, 則應良役者只有十餘萬矣. 以十餘萬之戶, 當五十萬之良役, 一家之內雖有四五人, 皆不得免焉. 而一人身布費四五兩錢, 則一家四五人竝入者, 當費二十餘兩矣. 此輩無世業無田土, 皆耕人之田, 一年所收多不過十石, 而歸其半於田主, 則餘者幾何. 而可以辦此二十餘兩之錢哉. 雖日加鞭扑, 無計辦納, 畢竟不死則逃. 逃者⋅死者又無以充其代. 則乃有白骨徵布黃口簽丁之弊, 徵族徵隣, 囚繫滿獄, 宛轉呼號, 感傷和氣. 此所以有良役變通之論也.

『英祖實錄』卷75, 28年 1月 13日(乙亥)

이 사료는 『영조실록』권75, 영조 28년 1월 13일조에 기록되어 있는 병조판서 홍계희(洪啓禧, 1703~1771)가 양역(良役)의 폐단에 대해 아뢴 내용이다. 양역(良役)은 조선 시대 16〜60세의 양인 장정이 지던 국역(國役)으로, 군역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조선 초기 군역제는 16〜60세에 이르는 양인 남자를 정군과 보인으로 편성하여 운영하였다. 정군은 현역으로 입역하는 자이고, 보인은 정군을 재정적으로 보조하는 자였다. 정군이 상번하는 동안 보인은 재정적인 보조를 해야 하는데, 1명당 면포 1필씩 부담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 전기 군역제는 16세기 이후 지주제의 발전으로 군역을 담당하는 양인 농민의 경제적 기반이 붕괴되면서 번상(番上) 정군(正軍)의 역이 고된 노역(勞役)이 되었다. 이에 보인으로부터 받은 포로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을 사서 대신 입역시키는 수포대립제(授布代立制)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정부는 1541년(중종 36년)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을 실시하였다. 군적수포법은 지방 수령이 관할 안의 군역 부담자로부터 번상가(番上價)를 일괄해서 포로 징수하고, 이것을 중앙에 올리면 병조에서 다시 군사력이 필요한 각 지방에 보내어 군인을 고용하게 하는 제도였다. 군적수포제 실시로 양인 장정 대부분은 1년에 2필의 군포를 내는 납포군으로 바뀌었다. 사실상 군역군포를 납부하는 부세가 되었으며, 국가의 입장에서는 재정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병농 일치의 방식 대신 병농 분리의 정책을 점차 확대해 갔다. 그런데 이렇게 군역이 부세로 자리 잡으면서 많은 문제점이 야기되었다. 우선 군포의 징수가 일원적이지 않아 5군영뿐 아니라 중앙의 관청이나 지방의 감영(監營)병영(兵營)이 각각 군포를 배당받아 거둠으로써 양정(良丁)은 이중⋅삼중의 군역을 부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정부는 재정 압박의 타개책으로 군포의 액수를 증가시켰는데, 이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군포 징수의 실무를 담당한 수령⋅아전들이 부리는 농간과 횡포가 많았다. 이에 따라 백골징포(白骨徵布)황구첨정(黃口簽丁)인징(隣徵)족징(族徵) 등 각종 폐단이 자행되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재력 있는 양인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양반 신분을 취득하여 양역의 부담에서 벗어나려 했고, 소농 빈농층은 이중 삼중의 부담을 지게 되어 양역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가장 큰 폐단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후반에는 이러한 문제점으로 수취의 기반 자체가 흔들려 더 이상 수취가 어려워졌다. 정부는 어떠한 형태로든 양역의 폐단을 시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양역변통론이 제기되었으며, 1750년(영조 26년) 실시된 균역법은 그 대안으로 나타난 제도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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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말기 군정문란의 사회경제적고찰」,『이산조기준박사화갑기념논문집』,정덕기,기념사업준비위원회,1977.
「숙종조 양역변통론의 전개와 양역대책」,『국사관논총』7,정만조,국사편찬위원회,1990.
「조선 후기의 양역변통논의에 대한 검토」,『동대논총』7,정만조,동덕여자대학교,1977.
「17⋅18세기 양역균일화 정책의 추이」,『한국사론』13,정연식,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85.
「임란이후의 양역과 균역법의 성립」상⋅하,『사학연구』10⋅11,차문섭,한국사학회,1961.
저서
『조선 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정연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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