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후기수취 제도의 문란과 개편

균역법 시행

양역(良役)의 절반을 감하라고 명령하였다. 임금이【명정전(明政殿, 창경궁 정전)】에 나아가 전직⋅현직 대신과 비국 당상육조 당상, 양사 제신을 불러 두루 양역의 변통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구전(口錢)은 한 집안에서 거두는 것이니 주인과 노비의 명분이 문란하며, 결포(結布)는 이미 정해진 세율이 있으니 결코 더 부과하기 어렵고, 호포(戶布)가 조금 나을 것 같아 1필을 감하고 호전(戶錢)을 걷기로 하였으나 마음은 매우 유쾌하지 않다. 영의정은 비록 가볍게 걷는 것이 옳다고 하나 절목(節目)을 보면 이 역시 호구를 수괄(搜括)하는 것이다.

백성의 뜻을 알고 싶어 재차 대궐문에 나아갔더니, 몇 사람의 유생이 ‘전하께서는 백성을 해친 일이 없는데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을 신은 실로 마음 아프게 여깁니다’라고 말하고, 방민(坊民)들은 입술을 삐쭉거리면서 불평하고 있다고 말하니, 비록 강구(康衢)에 노닌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군포(軍布)는 나라의 반쪽이 원망하고 호포는 한 나라가 원망할 것이다. 지금 내가 어탑에 앉지 않는 것은 마음에 겸연(歉然)한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경 등은 알겠는가? 호포결포나 모두 구애되는 단서가 있기 마련이다. 이제 1필은 감하는 정사로 온전히 돌아가야 할 것이니, 1필을 감한 대안을 경 등은 잘 강구하라” 하였다.

영조실록』권71, 26년 7월 9일(기유)

命減良役之半. 上御明政殿, 召時原任大臣, 備堂及六曹堂上, 兩司諸臣, 歷詢良役變通之策. 上曰, 口錢則徵於一家, 主奴名分紊矣, 結布則已有定稅, 決難加賦, 戶布雖似差勝, 減一疋而收諸戶, 心甚不快. 領相雖以輕歛爲是, 而且觀節目, 便是括戶也. 欲知民情, 再次臨門, 數三儒生曰, 殿下無傷民之事, 而今爲此事, 臣實痛心, 云, 而坊民曰鼓吻稱冤, 雖遊於康衢, 豈加於此乎. 軍布半國之怨, 戶布一國之怨. 今予之不坐御榻者, 心有所歉然而然. 卿等知之乎. 戶布, 結布皆有掣肘之端. 今則全歸於減一疋之政, 其減疋之代, 卿等善爲講究也.

『英祖實錄』卷71, 26年 7月 9日(己酉)

이 사료는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당시 논란거리였던 군역의 부담을 감면하는 내용이다. 이 조치는 이후 균역법(均役法)으로 이어졌다. 균역법은 조선 시대 군역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하여 만든 세법이다. 1750년(영조 26년) 종래 인정(人丁) 단위로 2필씩 징수하던 군포가 여러 폐단을 일으키고 농민 경제를 크게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군포 2필을 1필로 감하기로 하는 한편, 균역청을 설치해 감포(減布)에 따른 부족 재원을 보충하는 대책을 마련하게 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전세(漁箭稅)⋅염세(鹽稅)⋅선세(船稅) 등을 균역청에서 관장하여 보충한다는 등의 균역법이 제정되어 1751년(영조 27년) 9월 공포되었다.

조선 시대 군역은 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良人) 남자에게 부과하여, 이를 정군(正軍)과 보인(保人)으로 나누어 번상(番上)하는 정군을 보인이 경제적으로 돕도록 하였다. 그런데 정군의 번상제가 해이해지면서 중종(中宗, 1488~1544) 때부터는 번상 대신 포를 바치게 하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가 실시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모병제가 실시되면서 군역군포 2필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어 군역으로서의 군포가 국가재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군정 문란으로 돈이 있고 세력 있는 양인은 관리와 결탁하여 군역을 면제받고, 힘이 없고 가난한 양인군역을 졌다. 이에 부족한 군포를 보충하기 위해 이미 사망한 군역 대상자에게도 그 몫을 가족에게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16세 미만의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군포 부담자가 도망하면 친척에게서 징수하는 족징(族徵), 이웃에 연대 책임을 지워 징수하는 인징(隣徵) 등 갖은 방법이 횡행하였다. 균역청 구관당상(句管堂上)으로 임명된 홍계희(洪啓禧, 1703~1771)에 의하면 “50만여 명이 부담해야 할 양역(良役)을 10만여 명이 부담하는 상태에 이르자 곳곳에서 농민의 농촌 유리 현상이 두드러진다”라고 하였다.

군역 개선책은 인조(仁祖, 재위 1623~1649)효종(孝宗, 재위 1649~1659) 대 이후 계속 강구되어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대에는 군포 징수를 인정 단위로 하지 않고 가호(家戶) 단위로 하여 양반에게도 징포하자는 호포론(戶布論), 군포를 폐지하고 토지에 부가세를 부과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자는 결포론(結布論), 군포를 폐지하고 각 사람마다 전화(錢貨)로 징수하자는 구전론(口錢論) 등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러나 신분적인 특권을 우선시한 양반층의 강경한 반대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고, 군포를 반으로 줄이자는 감필론(減匹論)이 대두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750년 영조는 균역청을 설치하여 군포 2필을 1필로 감필한다는 선포를 하고, 이에 따라 각 군문에 부족한 군포를 보충해 주는 급대재정(給代財政) 마련을 강구하게 하였다.

1751년 9월 반포된 균역법 내용은 군포 감필에 따른 급대재정으로 군문을 합치고 군사비를 절약하는 감혁(減革)으로 얻는 재원이 약 10만 냥, 선혜청과 지방 관청 경비 일부를 균역청 재원으로 이월(移越)하여 얻는 재원 약 7만 냥, 놀고 있는 한정(閑丁)을 수괄하여 1인당 선무군관포(宣武軍官布)를 1필씩 부과하여 얻는 재원 5만 냥, 어장 및 어전세(漁箭稅)⋅염세(鹽稅)⋅선세(船稅)의 수세로 얻는 10만 냥, 토지 매 결당 쌀 2말 혹은 5전씩 전세(田稅)에 부과하여 얻는 40만 냥, 지방관의 사용(私用)으로 쓰던 은결(隱結)과 여결(餘結)을 국가 수입으로 전용(轉用)하여 얻는 5만 냥 등 모두 80만 냥으로 군포 감필에 따른 부족 재원을 마련하였다.

균역법 시행으로 군포 1필이 감해졌으나 군포의 근본적인 성격에는 변동이 없었으므로 군역 대상자의 도망은 여전하였으며, 도망자⋅사망자의 군포가 면제되지 않아 이를 다른 양인이 2중⋅3중으로 부담함으로써 군포 감필 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양인들은 계속되는 무거운 군역에 불만을 품었고, 철종(哲宗, 재위 1849~1863) 때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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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조선 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정연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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