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후기농업 생산력의 증대

모내기의 장점

일반적으로 모내기법을 귀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김매기의 수고를 줄이는 것이 첫째이다. 두 땅의 힘으로 하나의 모를 서로 기르는 것이 둘째이다. 옛 흙을 떠나 새 흙으로 가서 고갱이를 씻어 내어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셋째이다.

어떤 사람은 모낸 모가 큰 가뭄을 만나면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된다 하여 모내기법을 위험한 방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무릇 벼를 심는 논에는 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하천이나 물을 댈 수 있는 저수지가 꼭 필요하다. 이러한 것이 없다면 벼논이 아니다. 벼논이 아닌 곳에서 가뭄을 우려한다면 어찌 유독 모내기법에 대해서만 그렇다고 하는가.

임원경제지』, 본리지 권5, 종예 상, 도류

大抵所貴於揷秧者有三. 省鋤功, 一也. 二土之氣, 交養一苗, 二也. 去故就新, 洗髓蠲濁, 三也. 或以其遇大旱, 棄全功, 謂之危道. 然此有不然者. 凡種稻之田, 必須有川可引, 有瀦可漑. 無此則非稻田也. 非稻田而慮旱, 何獨揷秧爲然哉.

『林園經濟志』, 本利志 卷5, 種藝 上, 稻類

이 사료는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저술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본리지(本利志) 권5, 종예(種藝) 상(上), ‘도류(稻類)’에 실려 있는 모내기의 장점에 대한 내용이다. 『임원경제지』는 사대부가 전원생활을 하면서 알아야 할 다방면의 지식과 정보를 총 16개 항목으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어, 조선 후기의 대표적 박물학서 또는 백과전서라 할 수 있다.

모내기는 이앙법(移秧法)이라고도 한다. 이앙법은 못자리에서 기른 모를 꺼내어 본 논에 옮겨 심는 것이다. 모를 심기 위하여 못자리에 볍씨를 뿌리고, 이 볍씨가 일정 기간 자라서 모가 되면 논에 옮겨 심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모내기에 의한 벼농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사』에 1292년(공민왕 18년) 모를 키워 심는 모내기 재배법이 사용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모내기는 이미 고려 시대부터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내기가 보급되기 이전까지는 직파법(直播法)에서 발생하는 냉해와 관리 면적이 넓은 데서 오는 노동력 낭비를 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김매기의 수고”라는 서유구의 말처럼 잡초를 뽑아 없애는 것이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는 방편으로 이앙법이 가장 적합하였지만, 가뭄이 매년 겹쳐 관개 문제로 농사를 실패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조선 초기 정부는 이앙법을 금지하고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이를 명시하였다. 직파법은 일단 볍씨가 뿌리를 내리면 그 뒤에 다소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더라도 어느 정도 수확이 가능한 반면, 이앙법을 실시할 경우 모내기할 때 비가 오지 않으면 벼가 완전히 말라 죽어 수확을 전혀 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앙법은 잡초를 없애는 제초 작업이 상대적으로 간소하여 투입되는 노동력을 줄일 수 있고, 볍씨도 절약할 수 있었다. 또 비가 오지 않더라도 볍씨를 파종하여 모를 키우다가 가뭄이 해소된 후에 모를 논에 옮겨 심을 수 있는 건앙법(乾秧法) 등 이앙법을 응용한 더욱 발전된 농업 기술이 차츰 마련되어 갔다. 이에 16세기까지도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일부에서만 활용되던 이앙법은 17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삼남 지방 전체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선 후기에는 정부도 이앙법을 적극적으로 금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앙법 실시의 장점이 널리 알려지고, 각 지방마다 수리 시설이 증가하면서 이앙법을 실시할 수 있도록 여건이 개선되어 갔기 때문이다. 특히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에는 황폐화된 토지를 개간하는 과정에서 생산력의 신속한 회복이 절실하였기에 정부도 이앙법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였다. 이에 따라 17세기 이후에는 정부의 관리 감독 하에 대규모 수리 시설의 보수와 축조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이앙법의 또 다른 장점은 1년에 두 번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모판에 모를 재배하다가 가을보리를 수확하고 난 후 5월에 본 논에 모를 옮겨 심을 수 있기 때문에 농업 생산량이 전체적으로 증대되었다. 이에 서유구이앙법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 서유구이앙법을 실시하면 노동력이 감소하고, 모를 옮겨 심는 과정에서 부실한 모를 제거할 수 있고, 나아가 모를 심는 땅과 본 논에 옮겨 심는 땅의 지력을 모두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이익이 크다고 하였다. 다만 물을 댈 수 없는 여건인데도 이앙법을 시도할 경우 실패할 여지는 여전히 있었고, 이에 따라 정부는 관개가 원활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이앙법을 하지 못하게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넓은 토지를 갖지 못한 자작농, 소농의 경우 한 번 농사가 잘못되면 치명적이어서, 빚을 지고 토지를 잃게 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이렇게 토지와 유리된 빈농들은 사실상 농업에서 임노동자가 되어 토지를 직접 소유한 지주층에게 고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직접 경작지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넓은 경작지를 대여해서 농사를 짓고 소득을 올리는 경영형 부농이 출현하였는데, 이들 역시 몰락한 농민들을 노동자로 고용하였다. 경영형 부농들은 보통 일반 농가의 2배 이상 되는 면적을 경작하였는데, 이는 가족 노동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고 반드시 별도의 노동력을 동원해야만 가능했다.

본래 농업은 계절적 성격이 강하지만, 이앙법의 실시는 한 해 농사에서 농번기에 노동력 수요가 크게 늘어나는 현상을 심화시킨 면이 있다. 이는 지주층과 부농들이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노동을 투입하여 소득을 올리는 등 상업적 농업을 경영하는 데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이렇듯 이앙법 보급은 생산력을 증대시켜 농민의 계층 분화를 촉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5~16세기 수전농법의 전개」,『한국사론』31,염정섭,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94.
「18세기 조선의 소빈농층과 모내기」,『한국사학보』8,이정철,고려사학회,2000.
저서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 김건태, 역사비평사, 2004.
『조선후기농학사연구』, 김용섭, 일조각, 1988.
『조선농업사연구』, 민성기, 일조각, 1988.
『조선후기 사회경제사의 연구』, 송찬식, 일조각, 1997.
『조선시대 농서 편찬과 농업의 발달』, 염정섭,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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