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후기농업 생산력의 증대

경영형 부농

부유한 백성은 토지 겸병(兼幷)에 힘쓰고 농사를 많이 짓는 것에 욕심을 내어 적게는 3, 4석씩, 많게는 6, 7석씩 한꺼번에 모를 부어 노동력을 줄이고 한꺼번에 모를 내어 수고를 줄입니다. 비록 어쩌다가 가뭄을 당하더라도 대부분 좋은 논을 소유하고 있어서 수확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백성은 볍씨를 뿌리고 모내는 일을 맨 나중에 하므로 가뭄을 만나 흉년이 들면 입에 풀칠할 길이 없습니다.

정조실록』권50, 22년 11월 30일(기축)

富民務其兼幷, 貪於多作, 小而三四石, 大而六七石, 一時注秧, 以省其力, 一時移種, 以除其勞. 雖或遇旱, 多有美田, 所收夥. 然貧殘之民, 注秧移種, 最爲居後, 遇旱値歉, 糊口無路.

『正祖實錄』卷50, 22年 11月 30日(己丑)

이 사료는 홍주(洪州) 유학(幼學) 신재형(申在亨)이 경영형 부농에 대해 올린 상소 내용이다. 경영형 부농은 조선 후기 농업 생산력 발달과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경영의 확대, 상업적 농업, 임노동(賃勞動)의 고용을 통하여 부(富)를 축적했던 자작 또는 소작농층이다.

경영형 부농은 그들 스스로 직접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경영 규모가 클 경우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농업을 합리적으로 경영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경영형 부농은 조선 후기 광범위하게 전개되던 봉건 지배층의 토지 겸병과 소생산자층의 계층 분화를 배경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지주제가 더욱 확대되면서 민전의 겸병(兼幷)이 심해지고,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지주층의 소작지를 빌려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의존하였다. 그러나 소작지를 얻는 것도 점차 어려워지면서 부지런한 소작인들은 토지를 빌리는 데 유리하였다. 그리고 부지런한 농민들은 이앙법견종법 등으로 노동력을 절감하여 소출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절약된 노동력을 바탕으로 경영 규모 확대가 가능했으며, 농업 생산물을 상품 시장에 판매함으로써 잉여생산물을 축적하기도 하였다.

경영형 부농은 자작지나 소작지를 막론하고 농지의 개간과 매매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경지를 확대해 나갔는데,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농법의 전환을 통한 노동력 절약과 소출 증대, 즉 농업 생산력의 발전이었다. 그들이 경영하는 농지는 대개 3, 4정보인데, 때에 따라서는 20정보 이상의 농지를 경영하는 자도 있었다.

경영형 부농은 합리적 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계층으로, 자영⋅소작농은 농지의 일부를 대여하기도 하고, 또 부를 축적하여 지주층이 되는 자도 있었다. 경영형 부농의 농업경영 원리는 농민층의 분화에 따라 토지로부터 유리된 노동력을 흡수 수용하는 자본가적 생산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에 경영형 부농은 봉건적인 생산양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생산양식을 수립할 수 있는 사회계층에 가까운 존재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후기의 제문제」,『현대한국역사학의 동향-1945-1980』,김용덕,역사학회,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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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세기 농업고용노동의 전개와 발달」,『한국사연구』77,최윤오,한국사연구회,1992.
저서
『조선시대 고공 연구』, 강승호,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증보판 조선후기농업사연구』Ⅱ, 김용섭, 일조각, 1990.
『증보판 한국근대농업사연구』상⋅하, 김용섭, 일조각, 1988.
『증보판 조선후기농업사연구』Ⅰ, 김용섭, 지식산업사, 1995.
『조선후기 사회경제사의 연구』, 송찬식, 일조각,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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