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후기농업 생산력의 증대

간척 사업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강도(江都)의 신언절목(新堰節目)을 최근에 본부(本府)에서 마련하여 본사(本司)에 올려 보냈는데 각항 조건에 대하여 참조 첨삭하여 별단에 써서 올려 재가를 받아 준행하겠다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강화부 선두포(船頭浦)의 신언 절목

1. 제언(堤堰)을 쌓을 때 일을 살핀 패장(牌將) 중에서 절충(折衝) 한계중(韓啓重)의 사람됨이 부지런하고 성실하니 제언의 별장(別將)으로 차정한 뒤에 동쪽⋅서쪽의 언직(堰直)을 각 한 사람씩 별장으로 하여금 생활이 안정된 합당한 사람을 후보자로 삼아 신중하게 살펴서 선발하여 차출하고 그들로 하여금 보살피게 한다.

1. 신축한 제언이 간혹 퇴락(頹落)한 곳이 있으면 별장은 자세히 살펴 제언 내부를 기경(起耕)하기 전이라면 본부에 보고하여 형편에 따라 민정(民丁)을 징발하고 기경 후라면 경작자를 징발하여 즉시 보수하며 비록 퇴락처가 없더라도 매년 봄과 가을의 농한기에는 본부에 보고하고 혹 잡석으로 증축하든지 혹 목책(木柵)을 설치하든지 혹 나무를 심던지 하여 영구히 완고하도록 한다.

1. 제언 내의 전장(田場)은 둘레가 광활하여 거의 30여 리가 되는데 종전에 백성들이 간혹 사사로이 둑을 쌓은 일이 있으나, 혹 미처 기경하기 전에 무너지기도 하고, 혹 1, 2년 농사를 짓다 바로 무너져 버리기도 하여 그 숫자가 꽤 많은데 이제 큰 제언을 쌓은 뒤에는 이들이 시끄럽게 일어나 모두가 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무너져 버린 제언은 새로 쌓은 자가 주인이 된다’는 사목에 의해 일체를 허가하지 않으며 입안(立案)을 받은 적이 있는 자는 더욱 들어 줄 것이 없거니와, 작은 제언을 막았을 때부터 경작하던 자도 경작한 곳 이외의 저수처는 모두 공유로 귀속시킨다.

……(중략)……

1. 제언 내를 기경할 처음에는 경작을 원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본부에 신고하게 하여 본부에서 낭청을 내보내되 혹 군관 중에서 일을 잘 아는 사람을 대동하고 별장과 함께 살핀 뒤 경계를 정하여 떼어 주게 한다. 추수가 끝난 뒤에는 다시 군관과 별장을 보내 작황을 조사하고 측량하여 사사로 쟁점(爭占)하거나 뒤엉켜 경작하는 폐단이 없게 한다.

1. 경내와 원근의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어 한자리를 얻고자 할 자가 필시 많을 것이니 참작하여 규정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다. 본토의 백성이라면 양반과 상인을 막론하고 근실하고 힘써 지을 자를 가려서 경작하게 하되, 대호(大戶)는 두 섬지기[石落只], 중소호(中小戶)는 한 섬지기, 잔호(殘戶)는 열 마지기[斗落只]씩 경작하게 하고, 다른 곳 사람에게는 허가하지 않는다. 매년 파종이 다 끝난 뒤에는 영문(營門)에서 적간하여 경작할 만한 곳이 경작되지 않고 있으면 별장을 무겁게 결곤(決棍)하여 착실하게 경작하도록 한다.

1. 제언 내의 새로 기경한 곳은 법전의 규정대로 3년에 한하고, 세를 받지 않는다.

비변사등록』권58, 숙종 33년 11월 19일

司啓辭, 江都新堰節目, 頃者自本府磨鍊, 上送于本司, 謹就各頃條件, 參商添刪, 別單書入, 以爲啓下遵行之意, 敢啓, 答曰, 依爲之.

江華府船頭浦新堰節目.

一, 築堰時, 看役牌將中折衝韓啓重, 爲人勤幹, 仍差該堰別將後, 東西邊堰直各一人, 使別將, 極擇有根着可合人, 望定差出, 使之看護爲白齊.

一, 新築之堰, 或有間間傷破處是白良置, 別將這這看審, 堰內未起耕前, 告于本府, 隨便調發丁, 起耕後, 調發田夫, 趁卽修補爲白乎旀, 雖無傷被處是白良置, 每於春秋農歇之時, 告于本府, 或增築雜石, 或排置木柵, 或種植樹木, 以爲永久完固之地爲白齊.

一, 堰內田場周回廣闊, 幾至三十餘里, 曾前民人等, 間有私自築堰, 或未及起耕, 而潰決, 或一二年作畓, 而旋卽潰決, 其數頗多, 到今大堰, 旣築之後, 此輩紛紜齊起, 皆以爲已物是白去乎. 此則依破堰新築者爲主之, 事目一切, 勿施爲白乎旀, 至於有立案者段, 尤不當聽理是白在果, 小堰之時方耕作者段, 置耕作處外, 貯水處段, 盡爲屬公爲白齊.

……(中略)……

一, 堰內起耕之初, 使各其願耕人等, 呈于本府, 本府出送郞廳, 或帶率軍宜中解事者, 與別將眼同, 定界折給爲白有如可. 及至秋成之後, 又送軍官與別將, 摘奸打量, 俾無私自爭占紛紜濫耕之弊爲白齊.

一, 境內及遠近民人, 聞風坌集, 願受一廛者, 其麗不億, 不可無參酌定式之道是白置. 本土民人, 則勿論兩班常漢, 擇其勤實力農者, 許耕爲白乎矣, 大戶則二石落只, 中小戶則一石落只, 殘戶則十斗落只式, 許耕爲白乎旀, 他處人段, 勿許爲白乎旀. 每年畢付種後, 自營門摘奸, 如有荒廢可耕之處是白去等, 別將從重決棍, 以爲着實勸耕之地爲白齊.

一, 堰內新起耕處, 依法典限三年, 勿爲收稅爲白齊.

『備邊司謄錄』卷58, 肅宗 33年 11月 19日

이 사료는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시기 강화도의 간척 사업에 관한 내용이다. 강화도 간척 사업은 고려 말부터 진행되었다. 당시 남송(南宋)과의 교류로 중국 강남 지방으로부터 관개(灌漑) 기술, 토지 이용법, 시비법 등을 전수받았다. 고려 말 간척 기술은 조선 시대로 이어져 해안 지형 특성, 조류 특성, 식생 등의 지식과 방조제⋅수문⋅수로 등을 건설하는 토목 기술도 발달하였다.

둑을 쌓는 작업은 5~10명으로 조를 이루어 주민들이 우선 5m 정도의 말뚝을 1~2m 간격으로 갯벌에 박고 이들 말뚝에 의지하여 싸리나무⋅솔가지⋅칡⋅갈대 등으로 담장을 친 후 담장의 앞과 뒤에 개흙으로 둑을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둑은 견고하지 못해 조류 등의 영향으로 1~2년 정도 후에는 대부분 무너졌다. 따라서 강화에서 둑을 쌓는 공사 장소는 강한 조류를 피할 수 있는 아늑한 곳에 위치한다.

전란 이후에는 대대적인 간척 사업이 실시되었다.1707년(숙종 33년) 완공된 선두포언(船頭浦堰)은 조선 후기 간척 공사를 대표하는 것으로 다수의 기술 인력이 차출되어 각종 기계⋅기구를 현장에서 제작⋅수리하여 사용하였다. 그리고 선두포언 공사에 새로운 토석 운반 방법이 고안되었다. 즉 갯벌이 질고 깊어서 둑을 쌓을 무거운 돌을 운반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갯벌 위에 판자를 깔고 그 위에 돌을 얹어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렇게 개척된 토지에는 세금이 3년 동안 면제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한국의 갯벌』, 고철환,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9.
『조선시대 간척지 개발』, 박영환 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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