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후기실학자의 토지 개혁론

박지원의 한전론

박지원은 황공하게도 농서를 올리면서 이 기회에 건의를 드립니다. ……(중략)…… 신의 나이로 역시 남의 집 두어 대째의 일을 보아 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 부조(父祖)의 전업(田業)을 능히 그대로 지켜 타인에게 팔지 않은 사람은 열에 다섯 정도이고, 매년 토지를 떼어 파는 사람이 열에 일곱여덟 정도 됩니다. 이로 보아 남아도는 재산을 축적하여 토지 점유를 증대시키는 자의 수도 알 만합니다.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법령을 세우십시오. 모년 모월 이후부터 제한된 토지보다 많은 자는 더 가질 수 없고, 그 법령 이전부터 소유한 것은 비록 광대한 면적이라 해도 불문에 부치며, 그 자손으로 지자(支子)나 서자(庶子)가 있어 분급해 주는 것은 허락하고, 혹시 사실대로 하지 않고 숨기거나 법령 이후에 제한을 넘어 더 점유한 자는 백성이 적발하면 백성에게 주고, 관아에서 적발하면 관아에서 몰수하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수십 년이 못 가서 전국의 토지는 균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소노천(蘇老泉)이 소위 조정에 조용히 앉아 천하에 법령을 내리되 백성을 놀라게 하지도 않고 대중을 동요시키지도 않고, 정전제를 실시하지 않으나 정전제의 이익을 얻는 것으로서, 비록 주나라의 정전제라 하더라도 이보다 월등하게 나을 것은 없으니, 참으로 확실한 주장입니다.

아! 천하의 온갖 폐단과 고질은 군대 문제에 결부되어 있으나, 그 근본을 따지고 보면 병농이 일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군대를 아낌은 항상 백성들을 아끼는 것보다 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군대를 독사나 맹수보다 두려워하여 천하의 거의 절반을 그들을 받드는 데 쏟아 왔습니다.

한나라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상하 수천 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려 보려는 군주와 계책을 가진 신하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이 주야로 묘책을 생각해 보아도 끝내 이렇다 할 계책을 마련해 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하루도 군대를 망각해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군대 문제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하면서 토지를 상실하고 의지할 곳 없는 백성은 치지도외(置之度外)하여 까맣게 잊은 듯이 함은 무엇이겠습니까. 대개 이들이 논두렁과 밭고랑을 떠나게 됨은 그 원인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고, 장부를 놓고 그 수를 기록해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불어나 어느덧 천하 인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는데도 또 이렇게 많아진 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백성은 장차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어찌 그들이 천하 인민의 절반인지 알 수 있는가. 이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나라의 황건⋅적미(赤眉), 당나라의 방훈(龐勛)과 황소(黃巢, ?~884)의 무리가 과연 모두 농업에 전심한 토착민이었다면 어떻게 하루아침에 백만의 군중을 불러 모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겸병의 폐해는 반드시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하루에 두 사발씩 밥을 더 먹는다고 하면 천하 사람이 하루에 먹을 밥에서 그 절반을 축내는 꼴이 됩니다. 그러니 하물며 그 토지를 가진 자가 열 배, 백 배로 합니다.

그러므로 진(秦)⋅한(漢) 이후 역대 나라를 잘 다스린 사람이 없는 것은 그 이유가 어찌 다른 데 있겠습니까. 큰 근본이 이미 붕괴되어 백성들로 하여금 뜻이 안정되지 못하고 모두 요행만 바라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위에서 정령을 내리는 사람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나, 끝내 고식적인 결론을 얻음을 면하지 못하고, 아래에서 정령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아침에 저녁 일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급박하여 구차하게 미봉하고 말뿐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병폐로, 역대 정치의 득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귀척(貴戚)과 총신(寵臣)을 깊이 죄책할 것도 없고, 호부 겸병자를 몹시 혐오할 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오직 나라를 잘 다스려 보려는 의지와 통치의 근본이 확립되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거룩한 우리나라 수천 리 강토는 처음부터 정전을 구획해 본 적도 없었고, 또한 정전을 구획한 경계를 파괴당한 일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성대한 시대를 만나 독자적으로 한 국가의 제도를 마련하였으니, 마음의 자세를 정밀하고 순일하게 가지고 탕평을 표방하는 정치나 토지의 경계를 정리하고 백성의 소유를 균등하게 하려는 정책은 옛 성왕과 처음부터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토지 소유를 제한한 후 겸병한 자가 없어지고, 겸병한 자가 없어진 후 산업이 균등하게 될 것이고, 산업이 균등하게 된 후라야 백성이 모두 안정되어 각기 제 토지를 경작하게 되고, 근면한 사람과 나태한 사람의 구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근면한 사람과 나태한 사람의 구별이 드러나게 된 후 농사를 권면할 수 있고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농업정책에 대해 다시 군더더기 말을 붙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물감이 갖추어져 있고 그림 솜씨도 뛰어나다 하더라도 종이나 명주와 같은 바탕이 되는 것이 없으면 붓을 댈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분수에 넘침을 피하지 않고 이렇게 주장하는 바입니다.

『연암집』권17, 한민명전의

臣趾源誠惶誠恐因進農書而獻議曰. ……(中略)…… 以臣犬馬之齒, 亦甞觀人數世矣. 其能保守父祖之田業而不賣與人者, 十居其五, 其歲歲割土者, 十常七八. 則其畜嬴餘以益占者, 數可知矣. 誠立爲限制曰. 自某年某月以後, 多此限者, 無得有加, 其在令前者, 雖連阡跨陌不問也, 其子孫有支庶而分之者聽, 其或隱不以實及令後加占過限者, 民發之與民, 官發之沒官. 如此不數十年而國中之田可均. 此蘇老泉所謂端坐於朝廷, 下令於天下, 不驚民不動衆, 不用井田之制, 而獲井田之利, 雖周之井田, 無以遠過於此者, 誠篤論也. 噫天下之百弊痼疾在於兵, 而究其本則兵不寓農故耳. 然而有國之愛兵, 恒加於赤子之上. 而亦其畏之也反有甚於毒虺猛獸, 則傾天下之半以奉之. 自漢至皇明之世, 上下數千年間, 非無願治之君, 石畫之臣, 而其日夜謨訏, 迄無善策. 然亦不能一日而忘兵也. 若此至於失土無賴之民, 寘之度外, 漠然若忘者何也. 盖其身離壟畝, 類非一朝一夕之故, 而無簿籍錄其數, 所以浸浸然半天下, 而又不覺若是其多也. 勒此民將安所歸乎. 何以知其半天下也. 此易知耳. 漢之黃巾赤眉, 唐之龐勛黃巢, 使其徒果皆土著專業之民, 則亦惡能一朝嘯聚其百萬之衆耶. 故兼幷之害, 不必在大. 匹夫匹婦, 能兼兩盂, 則猶爲折天下一日之食而逋其半. 而况什百其田者乎. 故自秦漢以來, 百世無善治者, 豈有他哉. 大本旣壞而使民志不定, 莫不出於僥倖之途. 上之所以出治者, 日不暇給, 而卒未免因循姑息之歸, 下之所以承令者, 朝不慮夕, 而亦不過苟且彌縫而止. 此固天下之通患, 而歷代之得失可知矣. 然則貴戚近習, 不須深罪, 豪富兼幷, 不可痛惡. 而惟在求治之志, 制治之本, 立不立如何耳. 於皇我東, 提封數千里, 初未甞與於井地區畫之中, 而亦不被阡陌毁開之烈. 幸値大有之世, 自爲一王之制, 則其精一平蕩之法, 疆理均民之術, 與古昔聖王, 未始不同也. 故曰限田而後, 兼幷者息, 兼幷者息, 然後產業均, 產業均, 然後民皆土著各耕其地, 而勒惰著矣. 勒惰著而後, 農可勸而民可訓矣. 臣於農務之策, 不當更贅他說. 而譬如畵者, 丹靑雖具, 摹畫雖工, 不有紙絹之質爲之本焉, 則毫墨無可施之地. 故不避僭越, 敢爲之說焉.

『燕巖集』卷17, 限民名田議

이 사료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지은 『연암집(燕巖集)』의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에 수록된 한전론(限田論)에 관한 내용이다. 『한민명전의』는 1799년(정조 23년) 학자 박지원이 저술한 한전론적 토지개혁안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은 청에 다녀와 저술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해 상공업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 이용, 화폐 유통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그는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 혁신, 상업적 농업 장려, 수리 시설 확충 등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1797년(정조 21년) 면천 군수에 제수된 박지원은 1799년 농서를 구하는 교지에 응해 농서인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지어 올렸다. 『과농소초』는 그가 황해도 금천 연암골에서 생활하던 당시 경험으로 지은 농서이다. 그 뒤 그는 면천 군수로 재직하며 토지문제와 농촌문제를 직접 관찰한 경험을 토대로 『한민명전의』를 지었다. 두 번째 올린 농서였다. 박지원은 『과농소초』에서 중국 농법의 도입 및 재래 농사 기술의 개량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첨부한 『한민명전의』에서는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론을 제안해, 심각한 토지 소유 불균형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박지원은 주(周)나라의 정전제(井田制)를 이상적 토지제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에는 정전제가 재현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박지원은 당시 농촌문제의 핵심은 지주 전호제에 의한 토지 겸병에 있다고 판단하고, 토지 겸병의 폐단을 제거함으로써 농촌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토지 상한선을 정하고, 법령이 공포되고 일정 기간이 경과한 다음에는 상한선 이상의 토지 매점을 금지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법령 공포 이전에 구입한 토지는 그것이 대토지 소유라 하더라도 불문에 부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토지의 분할 상속을 허용하며, 법령 공포 후 상한선 이상을 구입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면 수십 년이 못 되어 나라 안의 토지가 균등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박지원한전론은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설정하는 토지개혁론이었으나, 하한선을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토지개혁의 효과를 감소시키고 있다. 또한 상한선을 초과한 토지를 매입하거나 몰수해 재분배하는 대신 상속 제도 등에 의해 토지가 상한선 이하로 축소되기를 기다렸다.

한전론은 만민평등 관점에서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신분제 존속과 그 계층에 상응한 토지의 계층적 소유를 전제로 하고 있다. 한전론에서는 지주전호제의 계속적 존재를 용인하고 있으며, 토지 소유의 상한을 초과해 실질적으로 점유하는 경우에 대한 대책도 미비하다.

이와 같이 박지원한전론은 상당히 미온적인 개혁안이었다. 그러나 그가 토지 소유 상한선을 주장한 것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한전론이 토지 개혁안으로 채택되었을 경우 지주층의 반발을 최소화하며 장기간에 걸쳐 토지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익(李瀷, 1681~1763)한전론은 토지 소유 하한선을 규정하여 영업전(永業田)으로 하고 매매를 금지시키는 개혁안이었고, 박지원한전론은 토지 소유 상한선을 규정하여 대토지 소유를 막으려고 했던 개혁안이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연암 박지원의 경제사상」,『아세아연구』25,송주영,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1967.
「연암 박지원의 경제사상」,『창작과 비평』7,송찬식,창작과,1967.
「성호 이익과 연암 박지원의 한전제 토지개혁 사상」,『이원순교수화갑기념 사학논총』,신용하,교학사,1986.
「실학의 토지제도 개혁론」,『동국역사교육』4,차은주,동국역사교육회,1996.
저서
『조선시대 농본주의사상과 경제개혁론』, 오호성, 경인문화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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