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후기수공업과 광업의 발달

민영 수공업의 발달

경국대전』에 보면 공장(工匠)의 등급을 나누어서 차등을 두어 수세(收稅)한다고 하였는데, 그 차등을 나누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만약 기량이 정밀하거나 중요한 물건을 만드는 자를 높은 등급에 둔다면 이 두 부류는 의당 장려해서 권면해야지 세금을 무겁게 해서 억눌러서는 안 된다. 대체로 공장(工匠)의 일은 노력을 많이 들이지 않으면 반드시 기교가 정밀한 뒤에야 두 배의 이익을 취할 수 있고, 노력이 남과 똑같고 기교가 남들과 같은데 이익을 홀로 많이 취하는 자는 없다. 의당 똑같이 세금을 정하되 그 기물이 특히 정밀한 하는 자에 대해 그 세금을 참작해서 감면해 주어야 한다.【예를 들어 궁시(弓矢)나 총검(銃劍)이나 갑주(甲冑) 같은 중요한 물건을 만드는 자나, 책장(冊匠), 묵장(墨匠), 필장(筆匠), 각자장(刻字匠), 악기장(樂器匠), 선자장(扇子匠), 능라장(綾羅匠) 중에서 능력 있는 자가 이에 해당한다. ○ 『경국대전』에는 서울의 공장(工匠) 또한 세금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서울의 공장(工匠)들은 모두 일정한 세금이 없다. 다만 관청에서 일을 시킬 것이 있으면 기술이 있는 사람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관청 일이라고 해서 값을 적게 주고 있다. 지방에서도 세가 있거나 없거나 말할 것도 없이 기술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강제로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있다. 관청에서 이렇게 하기 때문에 권세가의 양반들도 이것을 본떠서 함부로 일을 시키고 값을 주지 않는다. 형편이 이러하기 때문에 장인을 업으로 하는 자들은 오히려 자기의 기술이 남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한다. 이로 인하여 모든 수공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제품이 조잡해졌다. 이것이 전국적으로 관습이 되었고, 사람의 심목에 습관이 되어 버려서 조잡하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하고 있다.】

또 생각하여 보면 수공업자나 상인은 없어선 안 되는 점은 선비나 농부와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수공업과 상업을 전업으로 하는 자가 너무 많으면 농업에 해가 될 것이므로 많으면 세를 중하게 하여 억제하고, 적으면 세를 가볍게 하여 재화가 통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제조하는 물품이 정교하지 못하고 물화가 통하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세를 가볍게 하여야 한다.

반계수록』권1, 전제 상, 잡설

按大典工匠分等第, 收稅有差, 未知其等第之分, 何以爲之也. 若以技精者或造重器者爲高等, 則斯二者當奬以勸之, 不宜重稅而抑之也. 大凡工匠之事, 非勞力甚, 則必技巧精然後, 能取倍利, 未有勞等於人, 巧同於眾, 而利獨厚者也. 宜一㮣定稅, 而其器用之尤當精緻者, 量免其稅可也.【如弓矢人銃劍甲冑, 而冊匠墨匠筆匠刻字匠樂器匠扇子匠綾羅匠之能者. ○大典京中工匠亦有稅. 然今則京中工匠皆無常稅. 而只官有役則隨聞捉致役之, 稱以官役, 少給其價. 外方則勿論有稅無稅, 直隨所聞威勒役之而已. 公府旣如此, 勢家兩班又從而效之, 償不當直. 是以業工匠者, 猶恐其技之聞於人. 此所以百工無度, 麤惡不成樣也. 因以通國成俗, 則人習心目, 不復知其所以麤惡矣.】

又按工商之不可無, 與士農無異. 但業之者過多則害於農, 多則重其稅以抑之, 少則輕之, 以開通貨之路. 卽今本國制造未精, 物貨不通, 在所當輕.

『磻溪隨錄』卷1, 田制 上, 雜說

이 사료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저술한 『반계수록』권1, 전제 상, 잡설 중 조선 후기 민영 수공업의 진흥과 관련한 내용이다. 유형원의 이런 안들은 조선 후기에 전개된 수공업의 변화와 관련되어 제시된 것이다.

조선 전기의 관영 수공업은 공장(工匠)공장안(工匠案)에 등록하고 파악하여 관영 수공업장에서 복무하는 형식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국역 체제가 해이해지면서 관영 수공업자가 업장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현상은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더욱 확대되었다.

17세기 이후 관영 수공업장에서 이탈한 수공업자는 장인세를 납부하면서 민영 수공업자로 활동하였다. 1657년(효종 9년) 승정원에서는 소속 장인(匠人)이 없어 병조에서 주는 약간의 가포(價布)로 두서너 명의 사장(私匠)을 고용하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관영 수공업이 쇠퇴한 상황이었다. 민영 수공업자인 사장의 물건은 품질과 가격 면에서 관영 수공업자의 물건보다 우수하여, 정부도 몇 개의 물종을 제외하고 민영 수공업자를 임용하거나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품을 공인(貢人)을 통하여 시장에서 조달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민영 수공업자들이 모든 노동 시간을 그 자신의 경영 활동을 위해 쓸 수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잔존한 봉건 정부와의 관계는 시장의 수요에 대응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경영이 자리 잡기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유형원의 지적처럼 관청에서 민영 수공업자를 고용할 때는 임가(賃價)를 적게 주는 것이 관행이었으며, 관부의 일이라는 명목으로 심한 착취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심지어 흉년이 들어 재원이 확보되지 못했을 경우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 장인이 굶어죽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권세가의 양반들도 관청과 마찬가지로 민영 수공업자를 홀대하였으므로 이들은 관청이나 양반 세도가에 임용되기를 기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봉건 권력의 자의적 수탈에 대해 유형원은 세금을 가볍게 함으로써 수공업을 진흥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생산력 낙후의 원인을 사회 제도의 문란함으로 파악하고, 경제 과정의 분업 안착을 국가 발전의 필수적 조건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상업과 수공업 진흥책은 어디까지나 중농주의적 입장에서 농업과 상업⋅수공업의 균형을 조절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그는 상업의 발전을 주장하면서도 상인에 대한 신분적 차별을 완전히 부정하지 못했고, 상업 자본의 확대 발전은 농업에 해가 되므로 억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반계수록』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저술한 것은 균전제와 관료제였다. 곧 그는 종래의 농본주의, 균산주의(均産主義) 입장에서 제도를 개혁하고 자영 농민이 중심이 되는 국가를 이상적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외부에서 유입된 새로운 학문이 아닌, 고례(古禮)의 회복과 왕도 정치의 실현이라는 전통적 입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그의 사회 개혁안은 당시 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으나, 사실상 봉건적 신분 제도를 인정하는 선상의 개혁안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성에도 그의 생각은 이익(李瀷, 1681~1763)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 비롯한 이른바 실학파 후학들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보다 근대 지향적인 사상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유형원은 전통 사상에서 근대 사상으로의 전환기에 나타난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후기 수공업의 발전과 새로운 경영형태」,『대동문화연구』9,김영호,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1972.
「반계 유형원 연구」,『근세조선사연구』,천관우,일조각,1979.
저서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강만길,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3.
『조선시대 상공업사연구』, 강만길, 한길사, 1984.
『이조후기 수공업에 관한 연구』, 송찬식, 한국문화연구소, 1973.
『이조후기 상공업사연구』, 유원동, 한국연구원, 1968.
편저
「수공업의 발달」, 김영호, 국사편찬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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