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후기수공업과 광업의 발달

장인의 임노동자화

사옹원 1) 관원이 도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본원의 옛 규례는 밖에 거주하는 번조장인(燔造匠人)1)신역으로 3필을 받아 원의 인원수 중에서 530명분은 분원(分院)에서 입역(立役)한 장인들이 노임으로 받되 거두어지는 수량대로 받고, 나머지 352명분은 내외의 각종 인부와 물품 대금이 모두 이곳에서 나오도록 옛날부터 행해졌고 변경된 적이 없었습니다. 작년부터 이정청(釐正廳)2)의 절목에 의하여 신포를 3필을 내는 자는 모두 1필을 감하였습니다. 이에 비단 작업비만 계속하여 지급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장인을 입역시킨 노임도 책정한 대로 줄 수 없어 모두 큰 소리로 불평을 하고 장차 일을 그만 둘 지경입니다. 부득이 누차 비국(備局)에 보고하였더니 병조의 남는 정포(丁布) 10동 30필을 넘겨주어 이것으로 제대로 지급하고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금년에는 비국에서 각종 여정의 성책이 아직 다 도착되지 않아 그 액수를 채울 수 없다 하여 넘겨주지 않고 있습니다. 분원에서 일을 시작할 날짜와 여러 도에 수포(收布)를 통보할 시가가 곧 지나게 됩니다. 부득불 급히 변통하지 않을 수 없으니 비국으로 하여금 감축한 수량만큼 중외의 남는 정포 중에서 떼어 주어 제때에 일을 시작하게 하고 여러 도에 통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비변사등록』권58, 숙종 33년 2월 2일

1)사옹원(司饔院) : 조선 시대 왕의 식사나 궁중의 음식 공급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
1)번조장인(燔造匠人) : 질그릇, 사기그릇 등을 불에 구워 만드는 장인이다.
2)이정청(釐正廳) : 숙종 29년(1703) 군제의 문란을 정리하고 군정을 쇄신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이다.

司饔院官員, 以都提調意啓曰, 本院舊規, 外居燔造匠人身役, 例捧三疋, 元數內五百三十名則分院立役, 匠人受其直, 如其所捧之數, 其餘三百五十二名則內外各樣人夫物種之價, 皆出於此, 流來通行, 未有變易矣. 自上年, 因釐正廳節目, 身布凡納三疋者, 皆減一疋. 以此不但役價, 無以繼用, 至於匠人雇立之價, 不得准給, 擧皆呼冤, 將至撤役. 不得已累報備局, 則移給兵曹餘丁布十同三十疋, 以此得以准給完役矣. 今年則備局, 稱以各樣餘軍, 成冊尙未齊到, 無以充其額數, 不爲劃給. 分院始役日期, 諸道收布行會, 將至過時. 不得不急速變通, 令備局准其減縮之數, 中外餘丁布中, 趁卽劃給, 以爲及時始役, 行會諸道之地, 何如, 答曰, 允.

『備邊司謄錄』卷58, 肅宗 33年 2月 2日

이 사료는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707년(숙종 33년) 2월 2일조 내용으로, 그릇을 굽는 번조장인(燔造匠人)의 신포(身布)가 삭감되어 사옹원(司饔院)의 경비가 줄어들자 비변사에서 감축된 수량만큼 여정목(餘丁木)에서 떼어 주기를 청하는 사옹원 관원의 보고서이다.

조선 전기에는 관영 수공업장에 삼번제(三番制)로 출역하여 종사하는 관공장과 개인이 경영 주체가 되는 사공장(私工匠)이 있었다. 관공장은 서울에서 왕실과 관청의 수요품을 생산하는 경공장(京工匠)과 지방의 병영, 주⋅군⋅현에 소속된 외공장(外工匠)으로 나누어졌다. 『경국대전』에는 “경공장외공장장적을 마련하여 공조, 해당 관아, 각 도와 각 읍에 보관한다”라고 규정하고, 경공장의 정원은 129종에 약 280명으로 공조(工曹)를 비롯한 각 관청에 소속되어 있었다. 지방관청의 외공장은 약 3600명으로서 경공장보다 수는 많으나 직종은 27종에 지나지 않았다.

관공장들은 3번으로 무리를 만들어 한 번씩 번갈아 공역일(公役日)에 나가는 제도에 따랐으며, 소속 공장에서 60세까지 종사하였다. 일반 사공장들은 관청의 필요에 따라 일정 기간 공역을 부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기간은 노동 대가 없이 무상으로 근무하였으며, 공역 일수에 대해서는 장세(匠稅)가 면제되고 공역이 없는 날 행한 자기 경영 활동에 대해서는 장세를 납부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조선 정부의 지배 체제가 해이해지고 재정 사정이 악화하면서 광범한 관영 수공업 체제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특히 재정 확보를 위한 국역(國役) 제도의 변화는 장인부역 노동에 의거한 관영 수공업이 급속히 사라지게 하였다. 아울러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장인에 대한 혜택과 급여가 줄어들고 이에 따라 노비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면서 장인을 기피하는 풍토가 확산되었던 것도 관영 수공업을 무너뜨리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심지어 관영 수공업이 폐지된 후 관청이 임용가를 규정하고 민간 수공업자를 임용하는 것으로 제도가 바뀐 후에도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남았다. 관청에서는 관부의 일이라는 명분 아래 임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거나 노동의 대가 이상으로 착취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러한 사실상의 수탈로 인하여 당시 사공장들은 관부에 고용되는 것을 꺼렸다.

그리하여 무기와 진상 물품을 제조하는 일부 관영 수공업만이 겨우 유지되는 가운데 부역 노동에서 벗어난 관장(官匠)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영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상인 자본이 경영하는 민간 수공업장에 고용되어 임노동자 장인으로 생활하기도 하였다. 관청 수공업의 폐지는 종래 공역을 직접 노동 형태로 제공하던 것을 전적으로 장세로 지불하게 됨으로써 장인이 모든 노동 시간을 스스로 계획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에 따라 민간 수요에 응대하는 수공업 분야와 시장의 발달은 더욱 촉진되었다.

대동법 실시와 관영 수공업 붕괴로 상대적으로 늘어난 시장 수요 때문에 점(店) 또는 점촌(店村)이라 불린 민영 수공업장은 조선 후기에 와서 그 발전이 더욱 촉진되었다. 조선 후기 민영 수공업은 종이⋅자기⋅철물⋅가구⋅농기구⋅직물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하였으며, 특히 철기와 유기(鍮器) 같은 비교적 규모가 큰 제조업소에서는 소속 장인의 힘만으로는 수요를 충당할 수 없어 외부 장인임노동자로 고용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점의 구성원은 상당한 자본을 가지고 작업장을 경영하는 물주(物主)와 그가 고용하여 품삯을 지불하는 임노동자 장인들로 이루어졌다. 이 장인들은 분화된 제작 공정에 따라 각각 역할을 달리하였으며, 그 자신의 기술과 노동력 이 외에는 가진 것이 없고 임금을 받는 것 이 외에는 생산물과 이윤의 분배에 전혀 참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수공업의 변화는 조선 후기 이래 사회 경제적 변화의 반영이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후기 17~19세기의 장인」,『동촌 주종환박사 화갑기념논문집 한국자본주의론』,권병탁,동촌 주종환박사 화갑기념 논문집 간행위원회,1989.
「조선시대의 상공업자 연구」,『한국의 사회와 문화』20,권병탁,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3.
「조선후기 수공업과 장인계층」,『한국의 사회와 문화』16,김신웅,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1.
「이조후기 상업자본에 의한 수공업 지배-상인물주의 출현을 중심으로」,『창작과 비평』8권,송찬식,창작과 비평사,1973.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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