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조선 후기수공업과 광업의 발달

광업의 활성화

……(전략)…… 지금 황해 감사 이의준(李義駿)의 장계를 보니, 수안군(遂安郡)의 금혈(金穴)정조 18년(1794) 호조가 적간(摘奸)한 뒤로 화성부에 관문(關文)을 보내 점(店)의 관할권을 화성부로 옮겼습니다. 금점(金店) 5곳 중 두 곳[兩庫]의 금맥은 이미 바닥이 나서 점을 거의 철폐하는 상황이고, 세 곳[三庫]의 금맥은 풍성합니다. 올여름에 새로 판 금광이 39곳이고, 비가 와서 채굴을 중지한 금광이 99곳입니다.

현재 연군(鉛軍)이 550여 명인데 도내의 무뢰배들이 농사를 그만두고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 소문을 듣고 와서 이번 여름 장마로 대부분이 흩어졌는데도 현재 남아 있는 막(幕)이 아직도 700여 곳이 되고, 그 인구 또한 1500명 남짓입니다. 총 인구의 수효가 일정하지 않고 거두는 세금 또한 그에 따라 들쭉날쭉합니다.

점을 가장 많이 설치할 때는 하루아침에 거두는 세금이 수천 냥이 되는데, 그 중에 700냥은 화성부에 상납하고, 50여 냥은 점 내 소임(所任) 등의 요가(料價)이고, 차인(差人)차지(次知)에게 분급하는 천 여냥 외에도 막세(幕稅), 토세(土稅), 전세(廛稅) 등의 명목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차인에게 소속되는 것도 있고 본관(本官)에 소속되는 것도 있습니다. 깊은 산골에 범죄자들의 소굴이 만들어져서 일반 백성까지도 이익이 난다는 소문에 동요하게 하니 장래에 큰 우려가 될 뿐만 아니라 이미 당장의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대책은 일체 엄금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점(店)을 설치한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어 촌락이 즐비하고 장사치들이 재화를 유통시키고 있어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습니다. 지금 만약 점진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갑자기 흩어지게 한다면 이익을 잃고 할 일을 잃은 무리를 안주시킬 방법이 없어서 도리어 소요를 일으키는 단서가 될 것이므로 갑자기 철폐하는 것도 쉽게 얘기를 꺼내기 어렵습니다. 이른바 차인(差人)은 물을 건너는 데에 급급하여 농간을 엄하게 단속하여 막지 못하기 때문에 공납(公納)은 적고 사비(私費)는 많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만약 부득이하여 그대로 존치하게 된다면 반드시 특별한 조치를 해서 각별히 단속하여 폐단을 막고 멀리 내다보는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실로 당장의 급선무입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금을 채굴하는 것이 원래 법으로 금하고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몰래 채굴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고, 또 많은 점민(店民)들을 갑자기 흩어지게 하면 도리어 폐단이 생기기 쉬우니 우선은 예전대로 두게 하소서. 그리고 단속하는 방법으로 말하면, 호조에서 사람을 차출해서 보내거나 감영(監營)에서 차송하거나 차송되는 사람이 계사(計士)가 아니면 막비(幕裨)이니 저들의 우열을 가지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화성부에서 비속(裨屬)을 선발하는 것보다 못하니 전심전력으로 단속하여 만약 폐단이 될 단서가 있으면 도신(道臣)이 발견하는 대로 화성부에 관문을 보내 서로 규찰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上)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이렇게 한 뒤에도 앞으로 안렴(按廉)을 나갈 때 폐단이 드러나면 도신(道臣)부터 규찰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뜻으로 엄히 신칙(申飭)하라고 하였다.

비변사등록』권188, 정조 22년 7월 27일

……(前略)…… 卽見黃海監司李義駿狀啓, 則以爲遂安郡金穴, 甲寅自戶曹摘奸後, 華城府移關移店. 而金店五處中, 兩庫金脈旣盡, 幾至撤店, 三庫金脈豐盛. 今夏新鑿之穴, 爲三十九, 値雨停役之穴, 爲九十九. 目下鉛軍, 爲五百五十餘名, 非但道內無賴之輩, 廢農投入, 四方逐利之類, 聞風還至, 値今夏潦, 太半零散, 而見在幕數, 猶爲七百餘, 人口亦爲一千五百零. 人摠多寡無常, 收稅之數, 亦隨以贏縮.

而店設最盛時, 一朝捧稅數千餘兩內, 七百兩華城府上納, 五十餘兩店中所任等料價, 除下一千餘兩差人次知外, 此幕稅土稅廛稅等名色, 非止一二, 或屬於差人, 或屬於本官. 而深山絶峽, 成一逋逃之藪, 致使常民, 動於聲利, 非但有將來之深慮, 已爲目下之巨弊. 爲今之策, 莫如一切防禁. 而設店已多年所, 村落櫛比, 商賈通貨, 便成一大都會. 今若猝遽無漸, 一朝渙散, 則失利失所之輩, 旣無奠接之方, 反爲騷擾之端, 猝地撤罷, 亦難率爾議到. 而所謂差人, 急於濟水, 不能嚴束防奸, 乃至公納少而私費多. 今若不得已而有仍存之擧, 則斷當別般措置, 另加拘檢, 以圖其杜弊經遠之策, 實爲目下急務. 請令廟堂稟處矣. 採金固是法禁, 而此則與潛採有異, 且念許多店民, 欲令一朝散去, 則反易生奸, 姑令依前置之. 而若其句檢之道, 則無論自戶曹差送與自監營差送, 非計士則幕裨, 有何彼此優劣可言乎. 莫如自華城擇定裨屬, 專意檢飭, 而如或有貽弊之端, 道臣隨所現發, 論移華城, 互相糾察爲宜. 以此分付何如. 上曰, 依爲之. 如是之後, 弊端現發於來頭按廉之行, 則先自道臣, 難免不察之責. 以此嚴飭可也.

『備邊司謄錄』卷188, 正祖 22年 7月 27日

이 사료는 『비변사등록』권188, 정조 22년 7월 27일조에 실려 있는 수안군 금광에 대한 내용이다. 수안군 금광은 1794년(정조 18년) 금점(金店)을 설치해 본격적으로 금을 채굴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정부가 광산을 독점하여 필요한 광물을 채굴하였다. 정부가 수요 액수를 일률적으로 정하여 부과하면, 해당 고을 수령들이 농민들을 강제로 부역에 동원하여 채취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 이래 민간인의 광산 채굴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17세기 중엽부터 민간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관영 광업의 동요는 내부에서 먼저 와해 요인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1625년(인조 3년) 이미 호조 소관의 단천공은점(端川貢銀店)에서 지역민의 저항에 직면한 정부가 공납할 은을 채굴하지 않는 시간에 사적인 은 채굴을 허용하고 그 일정량을 세금으로 받기로 양보한 일이 있었다. 결국 이는 1651년(효종 2년) 점을 설치한 뒤 민간인으로 하여금 납세를 하게 하는 설점수세제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광업 자체가 사업의 성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사업인 탓에 제도 설립 초기에는 부상대고(富商大賈)가 광업에 참가하는 예는 볼 수 없었으나, 17세기 말이 되자 개발 분위기가 조성되어 상인들 역시 은 광업을 이윤이 남는 사업 분야로 고려하게 되었다. 또 호조 이외에도 납을 캐는 연점(鉛店)의 생산 관리를 맡던 서울의 군문(軍門) 및 각 지방의 영문(營門) 역시 은광 개발을 경쟁적으로 추진하고, 이 과정에서 은의 사적 생산이 허용되면서 광업의 민영화는 더욱 촉진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청과의 무역으로 은(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 개발이 활기를 띠어 17세기 말에는 거의 70개소의 은광이 개발되었다. 여기에 은점 설립과 수세(收稅) 업무 대행권을 노린 서울의 부상대고들이 호조를 자극하여 군⋅영문의 납[鉛] 채굴 광산인 연점(鉛店)을 탈취하도록 유도하였는데, 이러한 전략이 성공을 거두어 마침내 호조가 이들 부상대고를 별장(別將)으로 파견하여 은점과 연점을 관리하고 수세하게끔 하였다. 또 1702년(숙종 28년) 호조는 군⋅영문의 연점과 은점을 모두 흡수하여 독점적인 설점수세권을 입법화하였다. 그러나 원칙만 설정했을 뿐 처벌 규정이 없었던 탓에 호조가 아닌 각 군문이나 영읍의 관장이 조정의 허가를 받지 않고 설점수세하거나 잠채를 비호하는 현상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연점을 탈취당한 군⋅영문은 호조의 설점을 방해하고 기존 은점에 별도로 세를 부과하는 등의 방법으로 맞섰으며, 지방의 토호나 부상대고, 수령들 역시 결탁하여 별장제에 저항하였다. 이러한 분쟁이 날로 심각해지자 1740년(영조 16년) 호조의 수세권은 인정하되 설점은 왕명으로만 가능하게 한 조치가 내려졌는데, 이는 은점 신설을 둔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광산 개발은 이득이 많았기 때문에 합법적인 절차 없이 영읍의 비호 아래 이루어지는 민간업자의 잠채는 오히려 더욱 성행하였다.

결국 은점이 점차 줄어 23개소밖에 남지 않자, 호조는 1775년(영조 51년) 별장제를 폐지하고 수령수세제를 채택하였다. 별장제 하의 설점수세제가 호조의 자체 자금으로 점을 설치하고 영세 광산업자들이 개발에 참여하며 별장이 수세를 대행하는 형태라면, 수령수세제는 물주(物主)가 호조의 설립 허가를 받아 자기 자본으로 점을 설치하고 해당 지역 수령은 이들로부터 세금을 받아 납부하는 제도였다. 이러한 제도는 상업 자본에 의한 광산 개발을 더욱 촉진하였다.

18세기 말에는 상업 자본의 광업 경영이 활발해지면서 기존의 은광이나 동광뿐 아니라 사금 채굴에 투자가 몰리면서 금광 개발도 활발해졌다. 당시 물주가 금⋅은⋅동광업을 경영하는 방식은 동일하게 자리 잡아 갔으나, 수령수세제가 적용된 시기는 각 광업 별로 다소 차이가 있었다. 처음 은광업에 적용된 수령수세제는 민간 자본에 의한 광산 경영, 곧 물주제하의 광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1780년(정조 4년)에 동광업에, 1806년(순조 6년)에는 사금광업에도 적용되어 갔다. 사료는 정조 22년의 보고서이므로 바야흐로 사금광업에 수령수세제가 적용되기 직전의 상황을 보여 준다.

물주는 기록상 대개 물주로 나타나지만 이들이 상인이었기 때문에 사상(私商)으로도 불렸으며, 설점 전과 후의 역할에 따라서도 다른 명칭으로 불렸다. 설점 전 광맥을 물색하는 단계에서는 찾아낸 산지를 보고하고 호조의 관문을 얻는 것이 이들의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설점을 한 뒤에 물주는 호조 소관 점의 점주이자 호조에 납부하는 세액을 수납하도록 직무를 부여받았으므로 ‘차인(差人)’으로 지칭되었다. 그런데 사료에서 나타난 것처럼 이들 차인은 일단 설점이 완료되면 서울에 거주하다가 수세 업무를 대행할 때만 해당 지역을 왕래하였으며, 자본금을 투여한 것 이상으로 높은 이윤을 수취하였다. 이 때문에 차인들은 모리배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공납(公納)은 적고 사비는 많은 지경에 이르렀다. ”는 것은 이들 차인들이 상당한 이득을 취하면서 상대적으로 호조에 납부하는 금액이 줄어들고 있었으나 정부가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물주 중심 광산 경영에서 실질적인 운영자는 현지에 거주하는 혈주(穴主)나 덕대(德大)였다. 이들은 대개 그 지역민으로서 광산업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가진 경영 전문가였으나 호조의 점 설립 허가를 받을 만한 사회적 위치나 경제력을 갖지 못했다. 이에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작업 과정은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사금광의 경우 은⋅동광산과 달리 제련 노동자와 시설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간단한 소도구로 흙을 파고 강물로 운반하며 사금을 채취하는 과정에 적합하게 분업이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광산 노동자들은 인근에서 징발된 농민이 아니라 대체로 농촌에서 유리되어 떠도는 임노동자들이었다. 이미 호조 별장제 하에서도 광산의 실질적 운영자인 점장(店匠)이 별장을 선정하고 호조의 공문을 받아 설점에 착수하면 몰려드는 인근의 농민들과 농지에서 유리된 유랑민들을 광산 노동자로 고용하였던 것이다. 사료에서는 이들을 연군(鉛軍)으로 부르는데, 이 칭호는 본래 군⋅영문의 연점(鉛店)에 종사하던 모군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그대로 광산 노동자라는 의미로 전용되었다. 이들은 점(店) 거주민이라는 의미에서 점민(店民)으로도 불렸으며, 광산 규모에 따라 100여 명에서 수천 명에 달하였다. 사료에서 이들의 인구수가 일정하지 않고 거두는 세금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 이유는 세액을 산정하는 기준을 연군의 숫자에 기준하였기 때문이다. 광산마다 생산량에 차이가 있으며, 이에 따라 모집한 연군의 숫자에도 차이가 나고, 이는 다시 수세액의 차이로 이어졌다. 그 외 잡세로는 토세(土稅), 막세, 전세(廛稅) 등이 부과되었다고 하는데, 각 시기별⋅지역별로 광산마다 일률적이지 않고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연군은 군역잡역을 면제받고 일정액의 노임을 받으며 일하였으나 당시 채굴 시설이 원시적이었던 탓에 노동 조건은 항상 열악하였다. 연군의 대부분은 생업을 찾아 유랑하였으므로 생활 터전이 없고 호적조차 없었다. 그들은 빈민들이었으며 숫자가 엄청났던 탓에 조선 후기의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절도와 부녀자 약취 외에 민가에 나타나 강제로 숙식을 요구하기도 하고, 소속된 점이 다른 광산의 연군들에 의해 침해받을 경우 사적으로 보복하여 유혈 사태로 번지기도 하였다. 이에 정부는 유민을 막기 위해 수차례 채광을 금지하고 연군들을 쫓아냈으나, 이들은 끊임없이 모여들어 채광을 시도하고 때로는 결집하여 수령에게 설점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체 엄금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점진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갑자기 흩어지게 할 경우 할 일은 잃은 무리들이 소요를 일으키게 된다”는 내용은 이들이 반란 세력으로 합류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위정자들의 심리가 드러난 부분이라 하겠다.

아울러 “점을 설치한 지 여러 해가 되어 촌락이 즐비하고 장사치들이 재화를 유통시킨다”는 내용은 연군들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광부들은 광산 인근에 저급한 주거 시설을 마련하고 일반 사회와는 격리된 광산촌을 이루었으며, 필요한 식량과 일용품을 인근 마을이나 행상으로부터 구입하여 생활하였다. 또 광산의 점촌에는 서울과 지방관청에서 파견한 차인들과 국내외의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금⋅은⋅동을 구입하기 위하여 몰려들었으며, 이렇게 상거래가 급속히 활성화되는 까닭에 점촌은 빠르게 큰 도회지를 이루었다. 이처럼 광산의 개발과 민영화에 관한 사료들은 조선 사회가 봉건적 수취 체제를 벗어나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의 사회 경제적 변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후기의 광업정책 연구(2)-연은광개발을 둘러싼 논의를 중심으로-」,『민족문화연구』10,유승주,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1976.
「조선후기의 광업정책 연구-연은광개발을 둘러싼 논의를 중심으로-」,『민족문화연구』9,유승주,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1975.
「조선후기 광업의 경영형태에 관한 일연구-17⋅8세기 별장제 하의 은점을 중심으로-」,『역사교육』28,유승주,역사교육연구회,1980.
「조선후기 유황광업에 대한 연구-특히 17⋅8세기 군아문의설점수세점을 중심으로-」,『이홍직박사회갑기념한국사학논총』,유승주,이홍직박사회갑기념한국사학론총간행위원회,1969.
「조선후기 금은동광업의 물주제연구」,『한국사연구』36,유승주,한국사연구회,1982.
「조선후기 광업경영의 발전-금은광업을 중심으로」,『한국사 연구』32,임병훈,한국사연구회,1981.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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