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근대일제의 경제 침탈

토지 가옥 증명 규칙

칙령 제65호

토지가옥증명규칙

제1조 토지⋅가옥을 매매⋅증여⋅교환 혹은 전당할 때에는 그 계약서에 통수 혹은 동장의 인증을 받은 후 군수 혹은 부윤의 증명을 받아야 한다.

제2조 제1조의 증명을 받은 계약서는 완전한 증거가 되며, 오직 그 정본(正本)에 따라 해당 관청에서 효력이 발생한다.

제3조 군수 및 부윤은 토지가옥증명부를 비치하고 제1조의 증명을 시행한 때에는 즉시 그 내역을 기재한다.

제4조 누구든지 군수 혹은 부윤에 신청하여 토지가옥증명부의 열람을 요구할 수 있다.

……(중략)……

제6조 통수⋅동장⋅군수 및 부윤이 고의 과실로 권리가 없는 자의 청구에 따라 인증 혹은 증명을 시행하거나, 이유 없이 인증 혹은 증명을 거절 혹은 지연하거나, 토지증명부에 부실하게 기재하거나, 또 토지가옥증명부 열람을 거절했을 때에는, 이로 인해 손해를 받은 자에게 배상의 책임을 진다.

제7조 통수⋅동장⋅군수 및 부윤의 처분에 대해 이의가 있는 자는 그 감독관청에 즉시 신청할 수 있다.

제8조 당사자 중 한 편이 외국인으로서 이 규칙에 따라 증명을 받은 경우에는 일본 이사관의 사증(査證)을 받되, 만약 이를 받지 못하면 제2조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당사자의 양편이 외국인으로서 증명을 받고자 할 때에는 일본 이사관에게 신청하여 일본 이사관이 먼저 해당 군수 및 부윤에게 공문으로 알려 토지가옥증명부에 기재한 후 증명한다.

……(하략)……

『관보』제3598호, 1906년(광무 10년) 10월 31일

勅令第六十五號

土地家屋證明規則

第一條 土地家屋을賣買贈與交換或典當時其契約書에統首或洞長의認證을經後에郡守或府尹의證明을受을得이라

第二條 前條의證明을受契約書完全證據가되며但其正本을依야當該官廳에셔卽施行力이有이라

第三條 郡守及府尹은土地家屋證明簿備置고第一條의證明을施時卽其要項을記載이라

第四條 何人이던지郡守或府尹에申請야土地家屋證明簿의閱覽을求을得이라

……(中略)……

第六條 統首洞長郡守及府尹이故意過失로權利가無者의請求依야認證或證明을施거나無故히認證或證明을拒絶或怠緩거나土地證明簿에不實記載行거나又土地家屋證明簿의閱覽을拒時此로由야損害受者에게賠償責을任이라

第七條 統首洞長郡守及府尹의處分을對야異議가有者其監督官廳에卽申出이可이라

第八條 當事者의一方이外國人으로本則을依야證明을受境遇에日本理事官의査證을受호若理事官의査證을受치못면第二條의效力을生치못이라

當事者의兩方이外國人으로證明을受코時日本理事官에게具申야日本理事官이先히當該郡守或府尹에게知照야土(十)地家屋證明簿에記載後證明()이라

……(後略)……

『官報』第3598號, 1906年(光武 10年) 10月 31日

이 사료는 개항 이후 토지에 대한 개인의 사적 소유를 규정한 「토지 가옥 증명 규칙」으로, 대한제국이 1906년(대한제국 광무 10년) 칙령 및 법부령(法部令)으로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 확대를 허용한 법령이다.

조선의 토지 제도에 내재된 철학은 ‘왕토 사상(王土思想)’으로, 기본적으로 모든 토지는 군주의 것이었다. 따라서 개인이나 기관은 국왕에게서 필요한 토지를 빌려 사용하는 대신 정해진 세금을 바침으로써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부담한다는 것이 조선을 세운 유학 관료들이 구상했던 이상적인 토지 제도 운영 방식이었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원칙적으로 개인 대 개인 간의 토지 매매는 존재할 수 없으며, 건국 초기 조선 정부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의거해 고려 말기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대단위 토지를 해체해 자영농에게 배분하는 방식으로 국가 경제를 재편해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소규모 자영농 중심의 경제는 역사 속에 크게 두 가지 위기를 맞게 된다. 먼저 임진왜란 이후 전 국토가 황폐화하고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자영농이 감소하는 대신 대규모 토지를 독점한 대지주가 나타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또한 농업 기술과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미작 농업 노동력 수요가 감소하고 그 결과 지주와 소작인 관계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이는 조선 초기 유학 관료들의 구상과 달리 토지의 사적 소유를 전제 혹은 지향하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조선의 토지 제도는 사문화되고 실제로는 사적 소유 관습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또한 1800년대 중반 이후 서구 열강 및 주변 국가들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조선의 전통적인 토지 제도는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 프랑스⋅미국⋅영국⋅러시아 등 구미 자본주의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먼저 서구화를 시작한 일본, 구미 국가의 침략을 받으면서 제한적 근대화를 추진했던 청나라마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략을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외국인을 포함한 개인의 토지 소유⋅운영⋅매각이 법적으로 보장되어야 했다. 따라서 서구 열강 및 주변 국가들은 조선과의 근대적 조약을 통해 개항장에서부터 이러한 토지의 사적 소유를 조금씩 확대해 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국가 전체적으로 확산된 계기가 바로 「토지 가옥 증명 규칙」이다. 이 법령이 반포되기 1년 전인 1905년(광무 9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내정권을 사실상 장악했는데, 이 법령은 일본인의 조선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기획된 것이다. 이 법령은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가 개항장 등 특정 지역에만 제한되었던 것을 폐지하고 국내 어디에서나 부동산 소유를 인정하고 증명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외국인이 국내에서 토지나 가옥을 매매⋅증여⋅교환⋅전당하였을 때에는 그 계약서에 통수(統首) 혹은 통장의 인정을 받은 후 군수나 부윤에게 그 증명의 발급을 요청하면, 군수나 부윤은 토지 가옥 증명부를 비치하고 발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법령이 공포되면서 국내에서 외국인의 토지⋅가옥 소유가 보장받게 되었다. 한편 제8조에서 외국인의 토지⋅가옥 증명에 대해 일본 이사관의 사증(査證)을 받도록 한 것은 일본인 외에 다른 외국인의 조선 내 토지⋅가옥 구매를 통제하기 위한 조항으로, 조선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확보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를 통해 일본인의 조선 진출을 가로막는 중요한 장애물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 법령과 한일 병합 이후 시행된 조선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조선의 토지 경제는 제도적⋅실제적으로 완전히 일본에게 장악되었다. 또한 토지의 사적 소유와 운영이 보장되면서 조선 사회는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맞게 재편되기 시작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통감부시기토지⋅가옥증명문서에관한고찰」,『법사학연구』37,김건우,한국법사학회,2008.
「우리나라의 근대토지소유권 변천에 관한 연구 : 근대적 토지소유권 형성을 중심으로」,,조남근,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98.
「19세기 후반 지계제도와 가계제도」,『지역과 역사』8,최원규,부산경남역사연구소,2001.
저서
『한말⋅일제초기의 토지조사와 지세개정』, 배영순,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2.
『한국 근대 토지제도의 형성』, 조석곤, 해남,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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