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경제현대경제 개발 계획의 추진과 경제 성장

포항 종합 제철소 완성

초석 다진 경제 자립

경제 자립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종합 제철이 3일 준공되었다. 조강(粗鋼) 기준으로 연간 103만 2천 톤의 생산 능력을 가진 이 종합 제철은 지난 70년 4월에 착공된 이래 3년 3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종합 제철은 10개 공장과 12개 설비로 구성되어 있어 원광(原鑛)으로부터 중후판(中厚板) 빌레트 같은 각종 철강제품을 생산하기까지 일관 생산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일관 생산 공정을 가진 종합 제철을 건설하는데 그 동안 들어간 비용은 외자 1억 6806만 달러 내자 543억 원 등 무려 1215억 원이 들어갔다.

이제 종합 제철의 가동으로 73년을 기준으로 볼 때 아직 128만 톤의 철강재 공급을 해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긴 하지만 철강재의 자립도가 크게 높아졌고 연간 약 5400만 달러의 외화 절약(수입 대체 효과)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당국은 추산하고 있다.

또한 고용 효과 면에서도 건설 기간 중에 연 동원 인원이 약 810만 명에 달했고, 종합 제철의 완공으로 4300명이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 종합 제철은 자동차공업⋅조선공업⋅기계공업 기타 연관산업에 대한 원자재 공급으로 국산화 등 발전을 촉진하는 효과를 낳고 있어 경제자립의 초석이 되고 있다.

예부터 한 나라의 부를 철의 생산과 소비량을 가지고 측정하고 있는 것도 제철소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선진 공업국 가운데 종합 제철소를 갖지 못한 나라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가 그 동안 여러 차례 유산(流産)의 어려운 고비를 겪으면서 끝내 종합 제철을 완공시킨 것도 이 같은 중요성 때문이었다.

종합 제철이 태어나기까지에는 적지 않은 파란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처음 종합 제철 건설을 계획했던 것은 58년도인 자유당 정권 때였다. 당시 상공부는 종합 제철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ICA자금 3000만 달러와 내자 130억 원을 들여 강원도 양양에 연산 20만 톤 규모로 추진했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그 후 5⋅16 후에 부정 축재자들로 하여금 제철 공장을 건설하여 정부에 헌납하도록 군사 정부에서 추진했었으나 민정 이양 이후 무산되고 말았다.

우리 정부가 본격적으로 종합 제철 건설을 추진한 것은 지난 66년 12월 6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코퍼스」 제철 회사를 중심으로 한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 4개국의 제철 회사들로 구성된 대한(對韓) 종합 제철 차관단(KISA)이 발족된 때부터였다. 그 후 KISA는 67년 6월에 서독에서 열린 제2차 회의에서 「프랑스」가 신규 가입되어 5개국 8개 회사로 멤버가 늘어났다.

처음에는 종합 제철의 규모는 60만 톤으로 하고 후에 100만 톤으로 확장할 것을 합의하고 67년 10월에 우리 정부와 KISA는 조강연산 60만 톤 규모의 종합 제철 건설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69년 4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IECOK(대한(對韓) 국제 경제협력회)에서 종합 제철의 타당성 조사를 맡았던 IBRD는 종합 제철이 규모가 작아 경제성이 없다는 보고를 했고 이에 따라 KISA의 미국 및 서독 멤버들이 차관을 기피함으로써 종합 제철 건설 계획은 유산(流産)되었다.

이 같은 사태에 직면한 정부는 단독으로라도 종합 제철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굳혔으며 박 대통령은 69년 5월에 종합 제철의 경제성과 타당성 조사를 스스로 검토할 것과 차관선을 제3국에 돌릴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대일 청구권 자금 가운데서 7370만 달러를 종합 제철 건설에 투입하고 차관을 일본에서 얻음으로써 종합 제철 건설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산고를 거쳐 3일 준공된 종합 제철은 원료로 철광석 연간 146만 톤, 석탄 80만 톤, 석회석 33만 톤을 쓰게 되며 조강 연산 103만 2천 톤을 생산하게 된다.

철강 제품으로 선철 95만 톤, 열연(熱延) 코일 60만 6500톤, 후판(厚板) 18만 4천 톤, 강판(鋼板) 14만 1천 톤을 생산하여 조선 공업 등 철강재를 원료로 사용하는 산업에 공급하게 된다.

〈경향신문〉, 1973년 7월 3일

礎石다진 經濟自立

經濟自立의 象徵이라고 할 수 있는 綜合製鐵이 3일 竣工되었다. 粗鋼기준으로 年間 1백 3만 2천 톤의 生産能力을 가진 이 綜合제철은 지난 70년 4월에 착공된 이래 3년 3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綜合제철은 10개 공장과 12개 設備로 구성되어 있어 原鑛으로부터 中厚板 빌레트 같은 각종 철강제품을 생산하기까지 一貫生産體制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一貫生産工程을 가진 종합제철을 건설하는데 그 동안 들어간 費用은 外資 1억 6천 8백 6만 달러 內資 5백 43억 원 등 무려 1천 2백 15억 원이 들어갔다.

이제 綜合製鐵의 가동으로 73년을 기준으로 볼 때 아직 1백 28만 톤의 철강재 공급을 海外에 依存하지 않을 수 없긴 하지만 철강재의 自立度가 크게 높아졌고 年間 약 5천 4백만 달러의 外貨節約(輸入代替効果)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당국은 추산하고 있다.

또한 雇傭效果面에서도 건설기간중에 年動員人員이 약 8백 10만 명에 달했고, 종합제철의 완공으로 4천 3백 명이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 종합제철은 자동차공업⋅造船공업⋅기계공업 기타 聯關産業에 대한 原資材 공급으로 國産化 등 발전을 촉진하는 효과를 낳고 있어 經濟自立의 礎石이 되고 있다.

예부터 한 나라의 富를 鐵의 生産과 消費量을 가지고 測定하고 있는 것도 제철소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先進 공업국 가운데 종합제철소를 갖지 못한 나라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가 그 동안 여러 차례 流産의 어려운 고비를 겪으면서 끝내 종합제철을 완공시킨 것도 이 같은 중요성 때문이었다.

綜合제철이 태어나기까지에는 적지 않은 파란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처음 종합제철건설을 계획했던 것은 58년도인 自由黨政權 때였다. 당시 商工部는 종합제철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ICA資金 3천만 달러와 內資 1백 30억 원을 들여 江原道 襄陽에 年産 20만 톤 규모로 추진했었으나 實行되지 못했다.

그 후 5⋅16後에 不正蓄財者들로 하여금 제철공장을 건설하여 정부에 獻納하도록 軍事政府에서 추진했었으나 民政移讓 이후 霧散되고 말았다.

우리 정부가 본격적으로 綜合製鐵 건설을 추진한 것은 지난 66년 12월 6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코퍼스」 製鐵회사를 中心으로 한 西獨 英國 伊太利 등 4개국의 제철회사들로 구성된 對韓종합제철 借款團(KISA)이 發足된 때부터였다. 그 후 KISA는 67년 6월에 西獨에서 열린 제2차회의에서 「프랑스」가 新規 加入되어 5개국 8個 會社로 멤버가 늘어났다.

처음에는 종합제철의 規模는 60만 톤으로 하고 후에 1백만 톤으로 擴張할 것을 合意하고 67년 10월에 우리정부와 KISA는 粗鋼年産 60만톤 규모의 종합제철 건설에 관한 協定을 체결하고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69년 4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IECOK(對韓 국제 經濟協力會)에서 종합제철의 妥當性 調査를 맡았던 IBRD는 종합제철이 규모가 작아 經濟性이 없다는 報告를 했고 이에 따라 KISA의 美國 및 西獨 멤버들이 借款을 기피함으로써 종합제철건설계획은 流産되었다.

이 같은 사태에 직면한 정부는 單獨으로라도 종합제철을 건설하겠다는 意志를 굳혔으며 朴대통령은 69년 5월에 종합제철의 經濟性과 妥當性 조사를 스스로 검토할 것과 借款先을 제3국에 돌릴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對日請求權 자금 가운데서 7천 3백 70만 달러를 종합제철 건설에 投入하고 借款을 日本에서 얻음으로써 綜合製鐵 건설을 實現할 수 있었다.

이 같은 産苦를 거쳐 3일 竣工된 綜合제철은 원료로 철광석 年間 1백 46만 톤 석탄 80만 톤 석회석 33만 톤을 쓰게 되며 粗鋼年産 1백 3만 2천 톤을 생산하게 된다.

철강제품으로 선철 95만 톤 熱延코일 60만 6천 5백 톤 厚板 18만 4천 톤 鋼板 14만 1천 톤을 생산하여 造船공업 등 철강재를 原料로 사용하는 산업에 공급하게 된다.

〈京鄕新聞〉, 1973年 7月 3日

이 사료는 1973년 7월에 준공한 포항 종합 제철과 관련한 일간 신문 기사이다. 정부는 1967년부터 1971년까지의 제2차 경제 개발 계획 기간 중 장기적인 철강 공업 육성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1965년 12월 5개국 8개 회사의 연합체인 대한 국제 제철 차관단(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KISA)이 결성되었고, 1968년까지 예비 협정과 기본 협정, 추가 협정이 이루어졌다. 1967년 7월 포항이 제철소가 들어설 자리로 결정되었고, 같은 해 9월 대한중석이 종합 제철 사업의 주체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1968년 4월 1일 대한중석을 모태로 포항 종합 제철이 창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3억 원(75%), 대한중석이 1억 원(25%)을 출자하여 설립 자본금 4억 원으로 설립된 포항 종합 제철 주식회사는 일관제철소(一貫製鐵所)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국영 기업으로 운영되었다.

일관제철소 건설은 관련 산업에 대한 파급 효과, 방위산업 육성 등의 문제와 맞물려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정권이 집권 초기부터 매우 의욕을 보인 사업이었다. 그러나 당시 포항 종합 제철은 정상화되기까지 많은 난관을 거쳐야 했다. 먼저 1968년 말까지 KISA가 자금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당시 세계은행 한국 담당자가 포항 종합 제철이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미국 등 서방은 제철소의 규모가 작아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줄곧 반대 입장을 피력하였다.

결국 한국 정부는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일관제철소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박태준은 전원 합의체라는 의사 결정구조를 가진 일본 내각을 집요하게 설득하여 지원 결정을 얻어 냈다. 한국과 일본은 1969년 12월 종합 제철 건설 자금 조달을 위한 「한일 기본 협약」을 체결하였다.

1973년 7월 3일 조강 기준 연산 103.2만 톤 규모의 포항 종합 제철 준공식이 거행되었고, 1976년 5월 제2기 설비 확장 공사를 준공하여 조강 기준이 연산 260만 톤 규모로 확대되었다. 1978년 12월 조강 기준 연산 550만 톤 규모의 제3기 설비 확장 공사를 준공하였으며, 이어서 1983년 조강 기준 연산 910만 톤 체제의 제철소를 완공하였다.

그 뒤 포항 종합 제철은 급증하는 국내 철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1985년 광양만의 바다를 메워 제선-제강-압연 공정을 직결하는 최신 제철소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 5월 조강 기준 연산 270만 톤 규모의 광양 제1기 설비 공사를 완공하였고, 1988년 10월 동일 규모의 제2기, 1990년 12월 300만 톤 규모의 제3기 설비 공사를 준공하였다. 그리고 1992년 10월 2일 종합 준공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이때 포항종합제철의 조강 능력은 연간 2080만 톤에 달하였다. 또한 기술 자립을 위한 독자 기술 개발 필요성에 따라 포스텍과 산업과학기술연구소, 회사를 잇는 산학연 체제도 구축하였다.

이후 포항 종합 제철(2002년 포스코로 사명 변경, 이하 포스코)은 지속적인 설비 효율화와 생산성 향상을 통해 1998년 조강 생산 기준으로 세계 1위 철강 회사가 되었다. 그리고 1999년 추진된 프로세스 혁신을 통해 구매⋅생산⋅판매 등 전 부문의 업무 프로세스를 재정립하고 디지털 통합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2000년에 민영화된 포스코는 조강 생산 5000만 톤을 목표로 해외 생산 기지를 확대하고자 베트남, 인도 등지에 일관제철소 건설을 추진하는 등 주요 해외 거점에 생산 설비를 증설하고 있다. 아울러 혁신적인 독자 기술 개발을 통하여 글로벌 리더십을 강화하고 있으며, 안정적인 원료 확보를 위하여 해외 투자를 확대하고, 자동차 강판, 고급 API 강재 등 고부가가치 전략 제품의 판매 비중 또한 높여 가고 있다. 포스코는 2010년 조강 생산 3061만 톤, 매출액 60조 5000억 원, 영업이익 5조 7000억 원을 달성하였으며, 자산 규모는 68조에 이르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국가자본에 관한 연구: 포항종합제철을 사례로 하여」,,전인권,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92.
「대일청구권자금의 도입과 포항제철의 건설」,,정대훈,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11.
편저
『포항제철 30년 발자취: 1968-1998』, 포항제철, 포항종합제철 홍보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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