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삼국 시대관등제와 신분제

신라의 경위제

그 나라의 관명(官名)에는 자분한지(子賁旱支)⋅제한지(齊旱支)⋅알한지(謁旱支)⋅일고지(壹告支)⋅기구한지(奇貝旱支)가 있다.

『양서』권54, 「열전」48 제이 신라

其官名, 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貝旱支.

『梁書』卷54, 「列傳」48 諸夷 新羅

이 사료는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의 일부로, 신라의 관명(官名)을 전하고 있다. 『양서』는 중국 정사(中國正史) 중에서 처음으로 신라를 열전(列傳)에 독립시켜 기술한 역사서이다. 특히 『양서』 신라전은 521년 양나라에 파견된 신라 사신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6세기 전반 신라의 사정을 잘 보여 준다. 이 사료는 그 가운데서도 당시 신라의 정치 제도와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사료에 따르면 6세기 전반 신라의 관명으로 자분한지(子賁旱支)⋅제한지(齊旱支)⋅알한지(謁旱支)⋅일고지(壹告支)⋅기구한지(奇貝旱支)가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관명’은 일반적으로는 ‘관직(官職)’을 뜻하나, 여기서는 관리의 등급인 관등(官等)을 가리킨다. 이 사료에 보이는 관등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17관등 가운데 일부와 대응되는데, 자분한지(子賁旱支)는 제1등 이벌찬(伊伐湌), 제한지(齊旱支)는 제3등 잡찬(迊湌), 알한지(謁旱支)는 제6등 이찬(伊湌), 일고지(壹告支)는 제7등 일길찬(一吉湌), 기구한지(奇貝旱支)는 제9등 급찬(級湌)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사료에는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일부만이 기록된 셈이다. 왜 『양서』 신라전이 17관등의 전부가 아닌 일부만 기술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초기 연구에서는 6세기 전반까지 신라가 17관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520년 신라는 율령(律令)을 반포하면서 관리의 복장인 공복(公服)도 함께 제정했던 만큼 율령을 반포할 때 이미 17관등제가 완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관련 정보의 오류로 인해 『양서』 신라전에 17관등이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편 신라의 관등은 크게 경위(京位) 17등과 외위(外位) 11등으로 구분되었다. 경위가 신라의 왕경(王京), 즉 경주 지역의 6부인(6部人)을 대상으로 한 관등이라면, 외위는 지방 세력을 대상으로 한 관등이었다. 이 사료에 보이는 관등은 경위로, 경위는 사로국(斯盧國)을 구성한 여러 세력을 국왕 아래의 6부로 편제하며 마련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사료는 경위제의 성립과 아울러 6세기 전반 신라가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 제도를 마련해 간 과정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신라육부체제연구』, 전덕재, 일조각, 1996.
『신라 집권관료제 연구』, 하일식, 혜안,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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