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삼국 시대관등제와 신분제

신라의 외위제

외위(外位)

문무왕(文武王) 14년(674)에 여섯 무리[6부]의 진골(眞骨)을 5경(京) 9주(州)에 나가 거주하도록 하면서 별도의 관명(官名)을 칭하였다. 그 위계는 경위(京位)에 견주었는데, 악간(嶽干)은 일길찬(一吉湌), 술간(述干)은 사찬(沙湌)에, 고간(高干)은 잡찬(級湌)에, 귀간(貴干)은 대나마(大奈麻), 선간(選干)【혹은 찬간(撰干)이라고 한다.】은 나마(奈麻)에, 상간(上干)은 대사(大舍)에, 간(干)은 사지(舍知)에, 일벌(一伐)은 길차(吉次)에, 파일(彼日)은 소오(小烏)에, 아척(阿尺)은 선저지(先沮知)에 견주었다.

삼국사기』권40, 「잡지」9 직관 하

外位. 文武王十四年, 以六徒眞骨出居於五京九州, 別稱官名. 其位視京位, 嶽干視一吉湌, 述干視沙湌, 高干視級湌, 貴干視大奈麻, 選干【一作撰干】視奈麻, 上干視大舍, 干視舍知, 一伐視吉次, 彼日視小烏, 阿尺視先沮知.

『三國史記』卷40, 「雜志」9 職官 下

이 사료는 『삼국사기』 직관지에 보이는 신라 외위(外位)에 대한 내용이다. 신라의 관등(官等)은 크게 경주 지역의 왕경인(王京人)을 대상으로 한 경위(京位)와 지방의 세력가를 대상으로 한 외위로 구분되었다. 이 사료를 보면 외위는 674년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대 왕경에 살던 진골을 지방으로 이주시키며 별도로 칭한 관등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삼국사기』의 편찬자가 관등으로서의 신라 외위를 고려 시대 지방관을 뜻하는 ‘외관(外官)’과 혼동한 데서 비롯된 오류로 추정된다.

이 사료에 보이는 11등급의 외위는 크게 간계(干系) 외위와 비간계(非干系) 외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악간(嶽干), 술간(述干), 고간(高干), 귀간(貴干), 선간(選干), 상간(上干), 간(干)은 모두 간(干)의 호칭을 가지고 있는데, 간(干)은 본래 성읍 국가(城邑國家) 내지 소국(小國)이라고 하는, 작은 정치 집단의 수장(首長)이었다. 신라는 주변의 여러 정치 집단을 정복⋅복속시키며 그 지배층을 신라의 지배층으로 흡수⋅편입하였는데, 그 중의 일부는 왕경의 경위를 수여받았고, 그렇지 못한 나머지는 위와 같은 외위를 받았다.

다음으로 일벌(一伐), 일척(一尺), 피일(彼日), 아척(阿尺)은 간의 호칭이 붙지 않은 비간계 외위이다. 이들은 본래 간(干) 아래에 있던 신료 집단으로 짐작되는데, 신라에 통합되고 차츰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외위 체계 내로 편제되었다고 이해된다.

외위제경위제가 확립된 시기인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대에 일단의 정비가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다만 신라의 외위 체계가 이 사료처럼 처음부터 11등급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524년 세워진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鳳坪里新羅碑)」에 보이는 관등 기록을 근거로 처음에는 5등급 정도의 간단한 체계로 출발하였지만, 후대로 갈수록 등급이 세분화되었던 것으로 본다. 신라의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늘어나는 지방 세력가를 지배층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외위의 등급도 점차 늘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외위제는 한편으로 경위외위를 서로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한 제도였다는 점에서 지방민에 대한 왕경인의 차별 의식을 밑바탕에 깔고 있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신라육부체제연구』, 전덕재, 일조각, 1996.
『신라 집권관료제 연구』, 하일식, 혜안,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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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 신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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