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사회삼국 시대법률과 사회 풍속

일월신과 화랑도

이에 대왕[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이 영(令)을 내려 원화(原花)를 폐지하였다. 여러 해 뒤에 왕은 다시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모름지기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왕은] 다시 영을 내려 좋은 가문 출신의 남자로서 덕행(德行)이 있는 자를 뽑아 [명칭을] 고쳐서 화랑(花郞)이라고 하였다. 처음에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으니, 이것이 화랑 국선(花郞國仙)의 시초였다.

삼국유사』권3, 「탑상」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

검군(劒君)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근랑(近郞)의 무리[徒]에 이름을 올려 두고 풍월(風月)의 뜰에서 수행하였다. 진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라고 하였다. 당시 대일(大日) 이찬(伊湌)의 아들이 화랑이 되어 ‘근랑’으로 불렸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삼국사기』권48, 「열전」8 검군

500년 동안 이름난 사람(名世)이 배출되니, 원랑(原郞)⋅난랑(鸞郞) 같은 적선(謫仙)들이 명승지를 두루 찾아 한가로이 노닐었고, 친히 찾아와 입문(入門)한 자가 천이며 만을 헤아렸습니다. ……(중략)…… 계림(鷄林)의 『선적(仙籍)』을 살펴보니 위는 동월(東月), 아래는 서월(西月)로서, “내가 만든 이 법을 옛 법으로 삼아서 해마다 살피는 것을 거르지 말라.”라고 하고는 자손에게 물려주시니, 그 내용이 서책에 남아 있습니다.

『동문선』권31 「표전」 팔관회 선랑하표(곽동순)

於是大王, 下令廢原花. 累年, 王又念欲興邦國, 須先風月道. 更下今, 選良家男子有德行者, 改爲花郞. 始奉薛原郞爲國仙, 此花郎國仙之始.

『三國遺事』卷3, 「塔像」4 彌勒仙花⋅未尸郞⋅眞慈師

劒君笑曰, “僕編名於近郞之徒, 修行於風月之庭. 苟非其義, 雖千金之利, 不動心焉” 時大日伊湌之子, 爲花郞, 號近郞, 故云爾.

『三國史記』卷48, 「列傳」8 劒君

五百歲而名世出, 有原郞⋅鸞郞之謫仙, 探奇選勝而得逍遙遊, 踵門入室者, 以千萬數. ……(中略)…… 按仙籍於鷄林, 上東月而下西月, “法自我而作古, 歲一吹以爲常” 貽厥子孫, 布在方冊.

『東文選』卷31 「表箋」 八關會仙郞賀表(郭東珣)

이 사료들은 신라 화랑도(花郞徒)와 관련한 내용으로, 특히 화랑도의 여러 명칭 중 하나인 풍월도(風月道)와 관련한 내용을 선별하였다. 흔히 화랑의 기원 문제와 관련해서는 『삼국사기』권4의 진흥왕(眞興王) 37년조(576) 기사가 많이 거론되어 왔다. 하지만 『삼국유사』권3의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郞)⋅진자사(眞慈師)조에는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내용도 일부 수록되어 있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삼국유사』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 따르면 ‘원화(原花)’를 폐지하였다가 여러 해가 지나 다시 나라를 흥하게 하기 위해 그것의 명칭을 ‘화랑(花郞)’으로 고쳐 부활시켰다고 한다. 주목되는 것은 원화제를 부활시키는 과정에서 “모름지기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삼국사기』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대목이며, 진흥왕이 원화제를 시행하다 폐지한 다음 본래 존재했던 풍월도를 일으켜 화랑제를 시행하고자 하였음을 시사한다. 결국 『삼국유사』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는 화랑의 제정이 풍월도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일러 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원화제가 시행되던 무렵부터 ‘풍월도’란 명칭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삼국사기』권48의 검군(劒君) 열전을 살펴보면, 검군(劒君, ?~628)이 화랑인 근랑(近郞)의 무리에 이름을 올려 두고 풍월(風月)의 뜰에서 수행하였다는 기사에서 ‘풍월’의 명칭이 사용된 사례가 확인된다. 따라서 ‘풍월도’란 명칭은 늦어도 6세기 전반기부터는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풍류도(風流道)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사료가 있다. 바로 1478년 성종(成宗)의 명으로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는 「팔관회 선랑하표(八關會仙郞賀表)」이다. 이 글은 고려 인종(仁宗, 재위 1122~1146) 대에 활동했던 곽동순(郭東珣)이 지은 것으로, 원랑(原郞)⋅난랑(鸞郞)을 포함해 화랑에 대한 언급이 담겨 있다. 여기에 보이는 난랑은 최치원(崔致遠, 857~?)이 서문을 지은 「난랑비(鸞郞碑)」의 주인공과 동일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어찌되었든 곽동순은 화랑에 대해 언급하면서 “계림(鷄林)의 『선적(仙籍)』을 살펴보니 위는 동월(東月), 아래는 서월(西月)이었다.”고 서술하였는데, 『선적』은 최치원이 「난랑비」 서문을 지으면서 참고하였던 『선사(仙史)』처럼 풍류도의 연원을 밝힌 서적으로 짐작된다. 『선적』에는 동월과 서월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동월과 서월의 ‘월(月)’은 공교롭게도 풍월도의 ‘월(月)’과 같다. 즉 화랑과 관련 있는 풍월도나 동월, 서월 모두 ‘월(月)’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로 보아 화랑은 ‘월(月)’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수서(隋書)』 「신라전(新羅傳)」에는 신라의 풍속과 관련해 “매년 정월 초하루 아침에 서로 축하하며 국왕은 군신(群臣)에게 연회를 베푼다. ……(중략)…… 그날 일월신(日月神)에게 배례”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특히 『수서』 「신라전」의 풍속 관련 기사는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때 신라에 온 수(隋)나라 사신이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신라에서 일월신을 섬기는 풍속이 있었다는 『수서』 「신라전」의 기사는 신빙성에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 권1에 실려 있는 연오랑(延烏郞)⋅세오녀(細烏女)조에도 일월신에 대한 제사가 등장한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가자 해와 달이 광채를 잃는 변고가 발생하여, 이에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영일현(迎日縣)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따라서 영일현에서 하늘에 지낸 제사는 해와 달에 대한 제사인 일월제(日月祭)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신라에서 일월신을 섬기는 풍속이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경우, 화랑과 관련해 ‘월(月)’자가 들어가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연원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리게 된다. 즉, 화랑은 전국의 명산 대천(名山大川)을 돌아다니면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이때 일월신에 대한 의례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 때문에 화랑과 관련해 풍월도 등 ‘월’ 자가 들어가 있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던 듯하다. 따라서 풍월도란 명칭 속에는 일월신을 섬겼던 신라인의 풍속이 반영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화랑설치에 관한 제 사서의 기사 검토」,『역사교육』88,김기흥,역사교육연구회,2003.
「화랑에 관란 제명칭의 검토」,『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12,김상현,신라문화선양회,1991.
「신라 진흥왕대 정치사회와 화랑도 제정」,『사학연구』92,박남수,한국사학회,2008.
「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일월제」,『문화사학』11⋅12⋅13,이명식,한국문화사학회,1999.
저서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이기동, 일조각, 1984.
편저
「최치원의 난랑비서와 화랑 관련 제명칭의 갈래」, 박남수, 주류성출판사, 2009.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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